로버트 오펜하이머
원자폭탄 핵개발자
책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와 영화 오펜하이머"의 줄거리는 실제 인물의 전기입니다. 그는 원자폭탄의 핵 개발자로서 맨해튼 계획을 지휘하고 트리니티 실험까지 진행했었습니다. 하지만 역사 속의 그는 죄책감 속에 살았던 인물로 기억됩니다.
그는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살았으며, 왜 그렇게 살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적습니다. 원폭으로 수만 명을 잔인하게 죽인 대량살상 무기의 역사도 그와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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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 천 글
로버트 오펜하이머 - 원자폭탄 핵개발자, 맨해튼 계획과 트리니티
이론물리학자, 핵개발자
1904년에 태어난 'Julius Robert Oppenheimer(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이론 물리학자입니다. 아버지는 수입 사업가였고, 어머니는 화가였기에, 부유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유대인입니다. 항상 1등을 했지만 운동신경은 없었고, 혼자만 있다 보니 학교폭력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큰 키를 가졌지만 몸무게가 평생 60kg을 넘지 못할 정도로 마른 그는 공부에만 전념해서 하버드 대학교 화학과에 들어갔습니다. 그후 캠브리지 대학도 다니고 영국, 독일 유학까지 갔습니다. 강의를 하게 되자 몇 주 만에 네덜란드어를 마스터해서 할 정도로 언어적 천재성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천재성에도 고통은 있었습니다. 대학에 다니던 중 한 교수로 인해 도저히 점수가 나오지 않자 스트레스가 심했던 것입니다. 결국 교수를 독살할 생각으로 독 사과 계획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사전에 들통나서 거기서 멈췄는데, 너무 기괴해서 의사가 정신과 치료를 받게 하기도 했습니다.
원자폭탄 개발의 시작
1929년, 겨우 25살의 나이로 선생이 되기도 합니다. 일방적 암기가 아니라 스스로 깨닫는 형식의 수업방식을 좋아했던 그는, 학생의 질문에 밤늦게까지 계속 답변해 줄 정도로 열정적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의 우상 같던 독일 교수 '막스 보른'이 유대인이란 이유로 박해받자 충격을 받기도 합니다.
반 나치즘이 싹튼 그는 좌익계 운동권 사람들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 사람들 중에서 '카타린 해리슨'이란 여자와 사귀게 됩니다. 그녀는 생물학자가 되고, 나중에 오펜하이머와 결혼에 이르게 됩니다. 이때, 독일 과학자가 놀라운 것을 발견합니다. 원자도 쪼개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납니다. 독일에서 발견된 원자의 분열 현상은 원자폭탄을 만들려는 시도까지 이어졌습니다. 이를 알게 된 영국이 먼저 폭탄을 연구했지만, 계속 독일의 공습을 받는 입장에서 도저히 진행할 수 없어서 미국으로 정보를 넘겨주게 됩니다.
맨해튼 계획과 오펜하이머
1942년, 히틀러가 먼저 원자폭탄을 만들면 끝장이라는 공포감이 서방세계를 휩쓸었습니다. 미국은 먼저 원폭을 만들기 위해서, 그 유명한 "맨허튼 계획"을 시작합니다. 사막 한복판에서 철저한 보안을 하며 시작되었는데, 어찌나 극비의 보안 사항이었는지 대통령도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합니다.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 개발 맨허튼 계획의 과학자 측 책임자가 되었습니다. 함께 일하던 과학자들을 불러 모아서 3년 동안의 감시와 통제 속에서 연구를 했습니다. 이 중에 노벨상을 탄 과학자가 12명이나 나왔으니, 당시 서방세계에서는 말 그대로 드림팀이 연구를 한 것입니다.
맨허튼 계획은 1943년 3월부터 1945년 10월까지 약 2년 7개월 동안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1945년 5월, 독일이 항복하게 됩니다. 그러자 프로젝트 책임자들은 허탈해집니다. 이 악마의 폭탄을 꼭 써먹어 보고 싶던 미국이 고른 상대는 이미 태평양전쟁에서 패전을 앞두고 있던 일본이었습니다.
트리니티 실험과 오펜하이머
드디어 1945년 7월 16일, '트리니티 실험'이 있었습니다. 멀리서 원자폭탄이 터지는 것을 본 오펜하이머는 거대한 불덩이를 보며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이에 대해 그는 "나는 세상의 파괴자이며, 죽음의 신이 되었다"는 말을 남기게 됩니다. (영화 오펜하이머의 줄거리는 이 이후의 죄책감을 다루고 있습니다)
일본에 떨어진 원폭은 엄청난 죽음을 만들어냈습니다. 4개월 이내에 죽은 원자폭탄 희생자(사망자)를 보면, 히로시마가 최대 16만 명, 나가사키가 8만 명이었습니다. 이중 절반이 그날 즉사했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을 만난 그는 괴로운 모습을 비쳤지만, 사람들은 마음 약한 애송이 과학자 정도로 여겼습니다.
맨해튼 프로젝트와 트리니티 실험을 주도한 오펜하이머는 미국 국민에게 인기 스타로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그는 노벨상 같은 것은 받지 못했습니다. 논문의 수가 적고, 그마저도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저 대량살상 무기를 만든 과학자였을 뿐입니다.
원작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그런데 또 큰일이 났습니다. 1949년 소련도 원자폭탄을 만들며 따라잡았던 것입니다. 미국은 더 강력한 폭탄을 만들자며 미쳐갔습니다. 그것은 수소폭탄이었습니다. 죄책감에 시달리던 오펜하이머는 이를 반대했습니다. 그런데 곧이어 "매카시즘 광풍"에 휩쓸리고 말았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보수 정부 편을 들지 않으면 빨갱이 좌익이라고 누명을 씌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건 70년 전에 있던 매카시즘 버릇입니다. 즉 70년 전으로 퇴보한 사람들입니다. 오펜하이머도 그렇게 휘말렸는데, 20년 전 과거에 아내, 친구들과 공산당 모임에 갔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결국 오펜하이머는 청문회에 서서 사상검증까지 받아야 했습니다. 죄책감과 치욕 속에 산 그는 오펜하이머, 물리학자이며 예술 철학자이며 와인 전문가였던 그는 결국 1967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후 책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2005)"와 영화 "오펜하이머(2023)"가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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