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수 사건
백인 편견과 한인 구명운동 역사
이 글은 살인사건으로 사형을 기다리던 한인이 결국 무죄를 받아내고 석방된 것을 다룹니다. 1983년에 있었던 이철수 사건인데, 이 사건을 통해서 미국이 얼마나 인종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사회인지를 알게 됩니다.
다행히 일본인 친구의 노력과 한인 교포단체의 구명활동이 큰 성과를 냈는데, 그 과정과 사연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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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들의 편견, 이철수 사건 - 무기징역과 사형 후 구명운동으로 무죄 석방
미국 인종 편견 문제
이철수는 1952년에 태어난 한국계 미국인입니다.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먼저 미국으로 건너간 어머니의 초청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영어도 서툴고 학교에서는 그로 인해 따돌림과 학폭까지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괴롭히는 상대를 때리다가 퇴학당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그의 인생이 꼬입니다. 집에는 차마 퇴학당했다고 말하지 못해서 학교에 간다고 나가던 그는 자전거를 훔쳤다가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그 후 무슨 일만 생기면 용의자로 잡혀들어가게 되는데, 미국에 아직도 인종편견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1973년 이철수 사건이 터졌습니다. LA의 차이나타운에서 여자친구와 함께 있던 그는 갑자기 체포되게 됩니다. 인근 식당에서 중국 갱단 간부인 임이택이란 사람이 권총 살해를 당한 것 때문이었습니다. 백인 관광객이 그를 본 것 같다는 엉뚱한 진술을 하면서 바로 용의자가 되었습니다.
이철수 사건
재판이 벌어졌습니다. 물증은 없었습니다. 증인이란 사람만 있는 재판인데, 그가 범인이 아닌 것 같다는 다른 목격자들의 증언은 무시되었습니다. 재판정은 오직 엉뚱한 진술의 백인의 말만 믿고 무기 징역을 때렸습니다. 그래서 듀엘 교도소에 수감되었는데, 여기서 또 사건이 터지게 됩니다.
교도소에서 갱단원인 모리스 니드햄이 그에게 칼을 휘둘렀습니다. 니드햄은 나치주의자이며 백인 우월주의자였습니다. 생명에 위협을 느낀 그는 대응하다가 그를 죽이게 됩니다. 결국 또 한 번 재판을 받게 되고, 마침내 사형 선고까지 받게 됩니다.
백인이 아닌 인종에게 편협한 미국 사법제도의 모순이 그대로 나타나는 재판이 또 한 번 있었습니다. 이때 그의 친구였던 란코 야마다라는 인물만 그의 편에서 노력했습니다. 그를 위해 구명운동을 벌였지만, 변호사들은 엄청난 돈을 달라고 하고 앞길은 막막했습니다.
구명운동과 한인 교포들
세월이 흐르고 그는 샌퀸틴 교도소로 이감되었습니다. 사형 집행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일본인 친구 란코 야마다는 답답해서 스스로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977년부터 본격적인 이철수 구명위원회를 만들어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어차피 편견이 심한 나라였기에, 법에 호소할 것이 아니라 여론을 형성해야 한다고 판단한 그는 이 사연을 신문에 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찾은 사람이 한인 신문기자였던 이경원 기자였습니다. 나름 신뢰를 받는 기자였기에 찾아갔지만, 처음에는 뜨뜻미지근한 반응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 야마다의 설득에 취재를 시작한 이경원은 1978년 특집기사를 냈습니다. 유니언지에 보도된 이 기사는 미국 전국으로 퍼졌고, 유명 방송사인 ABC 방송의 대표 프로그램에도 소개되었습니다. 이를 본 한인 교포들은 모금 운동을 시작했고 이철수 사건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습니다.
이철수 근황
후원금이 모이자 구명운동에 활기가 생겼습니다. 그 돈으로 사설탐정도 고용할 수 있었고, 그 덕에 당시 사건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또 다른 목격자도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재심이 열렸습니다. 1982년, 다시 열린 재판에서 거의 10년 만에 무죄 판결을 받아낼 수 있었습니다.
억울한 교도소 수감 때문에 살인사건까지 벌어졌으니 니덤 살인사건도 무효판결이 났습니다. 하지만 편견은 끝이 없었고 검찰은 항소했습니다. 이때 구명운동자들은 "사전형량조정제도"라는 법령을 찾아냈습니다. 이미 형을 살았으니 다른 범죄의 형량을 대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마침내 10년간의 복역 기간을 살인죄 복역으로 인정하는 결정을 얻어냈고, 1983년 석방될 수 있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한인 단체의 단합 중요성이 드러나고, 소수 인종 편견에 대한 방지책도 강화되었습니다. 그 후 이철수의 근황은 2014년 위장병으로 죽었다고 되어 있으며, 그를 도운 친구 야마다는 지금도 변호사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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