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지하다방 인질사건
1974년 명동 탈영병 총기난동 사건
1974년엔 2월, 4월에도 무장탈영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5월에 또 탈영병 총기난동 사건이 있었으니, 그것을 유네스코 지하다방 인질사건이라고 합니다. 서울 중구 명동8길에 있는 유네스코회관 지하에 있는 음악 다방에서 인질을 잡고 16시간 이상 인질극을 벌였습니다.
대책없이 저지른 무모한 무장탈영 사건의 시작부터 그사이의 에피소드, 사건 이후의 사형과정까지를 모두 정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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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 유네스코 지하다방 인질사건 - 무장탈영과 버스, 명동 시민 인질, SK 최태원
탈영 인질범과 중3의 최태원
1974년 당시 21살의 이원모와 20살의 최성환, 윤찬재는 동네에서 형아우하는 사이였습니다. 이원모는 절도, 폭행 2범이고, 최성환은 가정이 어려워서 중학교를 중퇴하고 막노동을 하던 전과 2범이었으며, 윤찬재는 말썽을 피우자 집안에서 학업을 중단시켜서 막노동을 하던 절도 전과 1범이었습니다.
이 중 이원모가 방위소집을 받고 군복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이들은 한심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강도질 한탕 크게 해서 일본으로 도망가자는 것이었습니다. 1974년 5월 20일, 이원모가 부대에서 M1 카빈 2정과 518발을 훔쳐 나오자 범행에 들어갔습니다.
아침 7시가 넘어, 서울 성동구 워커힐 앞을 지나는 포니 20M 승용차를 빼앗았습니다. 그 차는 선경개발 사장의 차였는데, 중3과 국민학생 2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 중3짜리가 최태원입니다. 유네스코 지하다방 인질사건에 훗날 SK 그룹의 회장 최태원이 될 중3이 등장한 것입니다.
유네스코 지하다방 인질사건의 시작
범인들은 운전사만 남긴 뒤, 학교에 가라며 아이들을 내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한남동을 거쳐서 용인톨게이트로 향했습니다. 이때 수상하게 여긴 순찰차가 따라붙었습니다. 그러자 범인들은 총을 쏴댔습니다. 이 과정에서 김장식 순경이 순직하게 됩니다. 경찰을 죽였으니 이제 일은 더 커졌습니다.
군경도 난리가 나서 출동했고, 도로에는 바리케이드가 쳐졌습니다. 더구나 차까지 고장나자 범인들은 당황했습니다. 그들은 동부고속버스를 탈취한 뒤, 남성은 다 내리게 한 후 차를 돌려서 다시 서울로 들어갔습니다. 제3한강교에도 바리케이드가 있었습니다. 길이 막히자 5분간 시가전이 벌어졌습니다.
명동 유네스코 인질사건은 일이 커져도 너무 커졌습니다. 버스의 여성 인질에게 바리케이드를 치우게 한 후, 차를 돌진해서 시내로 진입해버렸습니다. 그들은 명동 유네스코 회관에 도착하자, 버스 안내양 등 여성 3명을 인질로 잡고 지하다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도심 총기난동 사태가 터지다
오후 2시쯤, 다방으로 들어간 그들은 30명이 넘는 다방 손님까지 인질로 잡았습니다. 대형사건이 벌어지자 수천 명의 시민들이 구경나왔고, 이제부터 진짜 유네스코 다방 인질사건이 시작됩니다. 주범은 탈영 이유가 상관에게 매일 돈을 바쳐야 해서라고 했습니다. 안 주면 기합을 받았다는데...
군경은 단 그들을 달래기 위해서 빵과 맥주 등을 넣어주었습니다. 그러자 답례로 심장병자, 고령자, 버스 안내양을 풀어주었습니다. 군경은 가족을 불러서 설득하려고 했지만, 범인들은 속지 않으려고 만나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자수할까 하는 흔들림도 있었습니다.
핵심은 경찰관 살해였습니다. 이건 죄가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또 문제는, 이곳은 음악다방이라서 TV도 라디오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경찰관이 살아 있으면 자수하자는 생각이 있었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기사가 나온 신문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죽었기에, 결국 군경은 신문사에서 가짜로 만든 신문을 넣어 줍니다.
유네스코 회관 다방 인질사건의 총격
우리 주변에는 아무 생각도 대책도 없는 사람들이 꼭 있습니다. 이 범인들도 그랬습니다. 그 와중에도 음악을 틀어 놓고 춤을 추기도 하고 주방에서 밥을 지어 먹었답니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지만, 밖으로 연결된 유선 전화를 감시하는 건 소홀히 했습니다. 그 기회를 음악 DJ가 노리게 됩니다.
그러다가도 무슨 소리가 나면 신경질적으로 총을 쏴댔습니다. 새벽 4시까지 총질을 하던 범인들... 그러나 일찍부터 범행을 시작했으니 점점 졸려왔습니다. 이틈에 전화를 한 음악 DJ 남원우는 범인이 존다고 알려 왔습니다. 이에 군경을 새벽 6시가 되면 작전을 벌이기로 했습니다.
18명의 특공대가 대기했습니다. 그들은 포복을 문 앞까지 기어가서 덮칠 준비를 했습니다. 범인이 꾸벅 조는 순간! DJ가 그의 총을 낚아챘습니다. 이를 신호로 특공대가 뛰어들었습니다. 동시에 인질들도 범인 때려잡기에 나서면서, 범인들은 입술이 터지도록 맞고 구급차에 실려 나갔습니다. 유네스코 지하다방 인질사건은 이렇게 끝납니다.
인질범의 최후와 총살
아찔했던 무장 탈영병 사건은 여자 7명, 남자 17명의 다방손님들이 모두 무사한 가운데 종료되었습니다. 군사재판은 한 달도 안 돼서 열렸습니다. 군인과 함께 총기 강도를 벌였으므로 두 민간인도 군사재판에 섰습니다. 그들은 모두 사형을 선고받고 수도경비사령부 헌병대에 이감되게 됩니다.
교도소에서 많은 반성을 했는지, 그들은 교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1975년 8월 총살형이 결정되었습니다. 새벽 일찍 창에 실린 그들은 1시간 거리의 사형 집행자에 도착했습니다. 굵은 3개의 나무둥치와 교도소에서 차출된 9병의 총살조가 있었습니다. 범인들의 왼쪽 가슴엔 타겟 표식을 붙였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사형이 집행되기 전, 교인이 된 윤찬재는 두 눈을 기증하기로 약속했다고 합니다. 눈만이라도 광명을 찾는 데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1974년의 유네스코회관 지하다방 인질사건 중, 자신의 분노를 남에게 화풀이한다는 부분은 지금도 아찔하게 생각되는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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