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원인과 6.25전쟁 과정
- 한국전쟁 정리 (배경과 발발, 휴전일까지)
1500년대 이후의 단일 전쟁으로는 7번째로 많은 사상자를 낸 전쟁이 6.25전쟁입니다.
그리고 6.25전쟁의 피해는 너무나 막대했습니다.
6.25전쟁 원인과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하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이 글은 한국전쟁의 원인과 과정, 한국전쟁 기간, 종료일, 휴전일 등에 대한 정보가 있습니다.
6.25전쟁 원인 : 한국전쟁의 외적인 원인
6.25전쟁 원인은 외적인 원인과 내적인 원인으로 나누어서 봐야할 것입니다. 원초적인 원인제공자는 일본입니다. 일본은 한국전쟁, 즉 6.25전쟁 과정에서 돈을 벌어 경제성장의 기틀까지 마련했으니 한국에게는 최악의 운명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자 힘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 미국은 남한에, 소련은 북한에 들어가서 신탁통치를 했습니다. 한국이 태평양전쟁에서 전승국으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진: 6.25전쟁의 원인은 내전이라기 보다는 대리전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내전의 성격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다. / ⓒ pixabay.com)
하지만 신탁통치를 하는 소련과 미국의 입장은 확연히 달랐습니다. 소련은 세계 적화를 위해서 공산국가를 늘리려고 했지만, 미국은 세계대전이 끝났으니 해외의 전쟁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소련은 1947년 먼저 군대를 철수시켰고 결국 미국도 1949년 5월 미군을 철수시켰습니다. 이승만은 한국을 떠나는 미국과의 상호방위조약을 위해 노력했지만, 미국은 끝까지 정식 조약을 해 주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북한에게 6.25전쟁 원인의 하나로 넘겨졌습니다. 한국전쟁이 터져도 미국이 도와주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 것입니다.
(사진: 일본의 항복문서 싸인을 찍은 장면.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로 강탈하여 괴롭혔고, 패망하면서 6.25전쟁의 원인을 만들었다. 그리고 한국전쟁으로 돈을 벌어 경제를 되살렸다.)
당시 북한 김일성이 적화통일의 야욕을 가진 가운데,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지기 전인 1월에 미국은 애치슨라인을 확정했습니다. 이 발표 또한 6.25전쟁 원인으로 지목되는 부분입니다.
미국은 알류산열도에서부터 일본과 필리핀을 연결하는 라인으로 구.소련에 대한 방어계획을 세웠습니다. 애치슨라인 자체가 한국포기를 얘기한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한국과 대만이 제외되면서 김일성이 한국전쟁을 결심했다는 분석이 있어서 6.25전쟁의 원인으로 불리게 됩니다.
(사진: 6.25전쟁 원인으로 불리는 일명 애치슨라인. 미국의 설명은 붉은선에서 그 바깥쪽을 지원하겠다는 것이지만, 세계는 붉은선 안쪽만 지키겠다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 ⓒ stratfor.com)
6.25전쟁 당시 미국에게 한국은 일본을 방위하기 위한 완충지대에 불과했습니다. 또한 1950년 3월까지는 미국도 한국전쟁을 예견하지 못했습니다. 3월이 되서야 북한의 한국전쟁 준비가 끝났음을 발견하지만, 설마 정말로 전쟁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이 또한 6.25전쟁의 원인이 됩니다.
기밀 해제된 SL-17같은 문서를 보면 북한의 남침 동향에 대해 6.25전쟁 몇 개월 전부터 경고가 있었습니다.
극동사령관인 맥아더에게도 보고가 올라갔지만 원래 성격이 독선적이었던 그는, 자기 생각과 다른 방향의 정보는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방비하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6.25전쟁 원인은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6.25전쟁 원인 : 한국전쟁의 내적인 원인
과거에는 김일성이 스탈린을 설득해서 6.25전쟁을 일으켰다는 분석이 우세했으나, 최근에는 스탈린이 적극적으로 김일성을 부추겼다는 6.25전쟁 원인설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이 얘기는, 한국전쟁이 남북한의 주장이 충돌해서 일어난 내전이기 보다는 소련과 미국의 이익을 대신해서 들러리로 전쟁을 치렀다는 대리전 성격이 더 강했음을 뜻합니다. 북한은 소련 스탈린의 적화정책에 의해서, 남한은 미국의 일본방위선 보호를 위해서 전쟁을 벌인 대리전이었다는 주장입니다. 미국은 어떻게든 전쟁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지만, 한국을 내주면 일본이 위험해진다는 점 때문에 발을 뺄 수가 없었습니다.
(사진: 6.25전쟁 이전의 1945년 북한 해방일보가 발행한 신문. 이때만 해도 스탈린을 김일성보다 오른쪽에 배치하고 있다. 스탈린을 상위 인물로 본 것이다.)
소련군이 먼저 북한에서 철수를 하고 미국은 2년 후 철수했지만 김일성과 이승만의 활동은 달랐습니다. 김일성은 소련과 비밀군사동맹을 맺고 중공의 지원도 약속 받았지만, 이승만이 미국에게서 받아낸 것은 경제적 지원에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더구나 광복 후 북한의 경제력은 남한에 비해 월등해서 사회자본 투자도 유리했습니다. 전쟁도 자본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므로 6.25전쟁 원인에서 경제력에 의한 북한의 자신감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입니다.
이승만은 미국을 등에 업고 대통령이 된 친미주의자였지만, 미국을 이용하는 방법은 김일성이 소련을 이용하는 방법에 비해 성과가 높지 못했습니다.
(사진: 북한이 소련(현.러시아)로부터 지원받은 T34형 전차. 보통 북한군이 탱크를 앞세워 전진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전차기동전술을 몰라서 보병이 선두에 섰습니다. 그래서 진격속도가 느렸습니다. / ⓒ wikimedia.org)
최근 자료에 의하면 이승만도 6.25전쟁 이전에 북한을 침공할 생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미국이 워낙 소극적이어서 무기 확보에는 한계가 심했습니다. 가장 분명한 것은 남한과 북한의 지향성 자체가 크게 달랐다는 것입니다. 북한의 경우 친일세력을 처벌하고 구심점이 분명한 정치체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남한은 친일세력을 그대로 중용하였기 때문에 새로운 국가 체제를 만드는 속도가 느렸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들이 반공을 외치는 것은 기득권을 차지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어느 역사에서나 기존의 기득권에 안주하는 세력은 새로운 세력보다 변화가 느립니다. 이것은 내면에 깔린 또 다른 6.25전쟁 원인이기도 합니다.
(사진: 이승만과 김일성. 6.25전쟁 당시 이승만의 나이는 76세, 김일성의 나이는 38세였다. 북한에도 살아남은 친일파가 있었지만, 남한의 친일파는 돈과 권력까지 쥐고 살아남았다.)
혹자는 6.25전쟁 원인으로 남한의 안일한 대처를 논하기도 합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정말 몰랐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남한 군부에서도 북한이 전쟁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게 언제일지, 정말 전쟁을 할 것인지를 몰랐을 뿐입니다. 기록을 보면 부대를 정비하고 비상경계기간을 정해서 첩보활동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6.25전쟁 원인으로 거론되는 군인 1/2의 휴가설....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억세게 재수가 없었습니다. 하필이면 비상경계가 풀린 이틀 후 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6월 25일인지 알고 준비했더라도 상대가 안 되었겠지만, 설상가상으로 더 피해를 입은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반면 북한은 3.8선에서 여러 차례의 국지전을 도발하여 한국군의 전력에 대한 실험을 이미 끝낸 후였습니다.
6.25전쟁 과정 : 한국전쟁의 과정 정리
1950년 6월 25일 : 북한의 새벽 기습남침
1950년 6월 28일 : 서울 함락
1950년 7월 1일 : UN군 개입
1950년 8월 : 전국을 빼앗기고 낙동강 방어라인 구축
1950년 9월 15일 : 인천상륙작전
1950년 10월 19일 : 평양 점령
1950년 11월 : 중공군 개입
1951년 1월 : 1.4 후퇴
1951년 ~ 1953년 : 지리한 공방 전투
1953년 7월 27일 : 휴전 협정
6.25전쟁 과정 1 - 북한의 기습 남침 이후 낙동강 전선까지
6.25전쟁 발발은 6월 25일이었지만, 기밀 해제된 미 육군 참모부 문건 중에 1950년 6월 19일에 작성된 SL-17에는 만약 북한이 한국전쟁을 벌인다면 낙동강까지 후퇴한 후 인천상륙작전으로 반격한다는 계획이 적혀 있다고 합니다. 북한의 남침이 이미 예견되었던 것입니다. 맥아더의 극동 첩보부대에서도 북한 동향이 수상하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관심가지지 않았고 맥아더는 특유의 독단적인 성격 때문에 무시해버렸습니다. 이런 성격 때문에 이후에도 맥아더는 6.25전쟁 과정 중에 또 다른 실수를 하게 됩니다.
(사진: 북한국이 제작한 6.25전쟁 과정 당시의 북한군 진격 장면. 인공기와 정규군의 무장, 소련제 탱크와 전투기까지 보인다.)
북한은 파죽지세로 40일 만에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왔습니다. UN군은 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군의 진격을 막으려고 했지만 행운이 따르지 않았습니다. 하필 대가뭄이 들어서 강 깊이가 낮아진 것입니다. 걸어서도 강을 건널 수 있는 상황이라 북한군은 9월 안에 전쟁을 끝낸다는 목표로 총공세를 가해 왔습니다. 그래서 6.25전쟁 과정 중 낙동강 전선은 한국군과 UN군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경북 영천지역의 북한군 총공세를 반격하여 승리함으로써 시간을 더 끌 수 있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영천을 뚫렸다면 오히려 우리의 전열이 반 토막 되어 인천상륙작전 이전에 패배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사진: 인천상륙작전에서의 맥아더. 맥아더는 사진을 통해 멋지게 알려지고 싶어서 넘어져가며 사진을 다시 찍기도 했다는 후문이 있다. 낙동강에서는 워커장군이 사력을 다해 사수하고 있었다.)
6.25전쟁 과정 2 - 인천상륙작전과 1.4후퇴까지
연합군은 10월에 총공세를 벌이겠다고 소문을 퍼트렸습니다. 북한군은 그 이전까지 승리하려고 최대한의 전투부대를 낙동강 전선으로 보냈습니다. 하지만 맥아더는 9월 15일에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습니다. 이에 대해 여러 설이 존재하지만 중공이 상륙작전 정보를 북한에 미리 얘기해 주어서, 김일성도 나름의 대비를 하려고 경기도 일대의 부대 조정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마오쩌뚱은 원산이나 군산상륙작전설을, 2인자였던 저우언라이는 인천상륙작전설을 주장하는 등 혼선이 있었습니다.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은 북한의 예상보다 훨씬 빨리 시작되었고 11월 쯤에는 압록강까지 진격하게 되었습니다. 6.25전쟁 과정에서 최고의 승리감을 느끼는 날이었습니다.
(사진: 6.25전쟁 과정 중 인천상륙작전에서 미국인 중위가 인천 해안을 오르는 모습. 인천상륙작전의 기념비적인 사진이다. 이 병사는 몇 분 후 총에 맞아 전사한다.)
공식적으로 중공군의 개입은 11월 말로 되어 있지만 실질적인 개입은 10월 이전으로 보고 있습니다. 중공은 미리 압록강 일대에 중공군을 숨겨 두었고, 연합군은 그것도 모른 채 적진 깊숙이까지 들어간 상황이 되었습니다. 6.25전쟁 과정 중 맥아더가 또 한 번의 독선적인 생각으로 실수를 저지른 부분이기도 합니다. 맥아더는 중공군을 우습게 보았습니다.
중공이 인해전술을 쓰게 된 이유는, 중국 내전에서 지나치게 많은 군대를 보유하게 되었기 때문에 사상이 의심되는 부대의 군인들을 청소해버리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중공군은 중국 내전에서 전투 경험이 많았기 때문에 한 겨울의 산악 진격이 연합군보다 빨랐고 UN군은 포위당하는 꼴이 되었습니다. 6.25전쟁 과정에서 빼 놓을 수 없는 흥남철수 등은 그렇게 시작됩니다.
(사진: 인해전술로 유명한 중공군. 6.25전쟁 과정 중 반드시 등장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아무때나 인해전술을 한 것은 아니다. 상대를 포위하여 섬멸할 때 압도적인 물량으로 완전 전멸을 시키기 위한 방법이었다.)
6.25전쟁 과정 3 - 2년간의 공방전투와 휴전 성립까지
중공군은 미군에 비해 약체인 한국군을 집중적으로 공략하고 대규모 병력으로 포위, 섬멸하는 전략을 구사하였습니다. 그렇게 중공군은 크게 승리하며 서울을 다시 점령했지만 이후에는 중공군도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한국군과 연합군이 전열을 재정비해서 화력을 집중했던 것도 이유지만, 3.8선 이남에서의 연합군의 공군력이 워낙 막강하여 오히려 고전을 치렀습니다. 그 이유는 핵전쟁 확대를 우려한 소련이 공군지원을 3.8선 이북에서만 비밀리에 해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북한군과 중공군은 6.25전쟁 과정에서 또 한 번의 후퇴를 하기에 이릅니다. 전쟁이 1년을 넘을 즈음, 남북한은 지금의 휴전선 근처에서 서로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51년 7월부터 무려 2년 동안 휴전협정을 하게 됩니다. 그동안 전선에서는 계속 군인들이 죽어나갔습니다.
(사진: 죽은 부모의 시신 곁에서 어린 아이들이 울부짖고 있다. 6.25전쟁의 발발에서부터 휴전까지... 피난민 피해 뿐 아니라 민간인 사상, 학살과 군장병들의 끝없는 희생이 계속된 비극이었다.)
백마고지 전투 등에서 수십 차례 이상 서로 뺐고 빼앗기는 공방전이 6.25전쟁 과정 막바지에 계속되었습니다. 이것은 이른바 제한공격 전법 때문인데, 서로 깊숙이 진격하지 않고 근처의 상대를 계속 공격하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보기드믄 전법으로 지리한 전쟁이 2년간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그 사이에 맥아더는 핵폭탄 공격을 하자며 제3차 대전을 일으킬만한 주장을 하다가 해임되고 , 전쟁을 종용하던 소련의 스탈린이 죽었으며 미국의 대통령이 아이젠하워로 바뀌었습니다.
이승만은 끝까지 휴전을 반대했지만 한국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제 6.25전쟁 과정에서 마지막 시기에 휴전조인식이 있게 됩니다. 1953년 7월 27일, 남한이 빠진 가운데 북한과 중공, 그리고 연합군을 대표하여 미국이 휴전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6.25전쟁이 끝난 후, 미국은 그토록 기피하던 상호방위조약을 한국과 맺어주었습니다.
나 스스로 자신을 지킬 힘을 기르지 못 하면, 어떤 방식으로든 큰 고통을 치르게 된다는 것이 역사가 주는 교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