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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영화같은 6.25전쟁의 대반전 드라마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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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영화같은 6.25전쟁의 대반전 드라마

키스 키스세븐 2016. 7. 19.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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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영화같은 6.25전쟁의 대반전 드라마



6.25전쟁(외국에서는 한국전쟁이라고 함)에서 가장 영화같은 장면을 꼽으라면 인천상륙작전이 단연 첫 번째에 놓입니다.

뿐만 아니라 맥아더 장군하면 무엇이 생각 나냐고 물어도 첫 번째는 인천상륙작전입니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 목숨 바쳐 나라를 위해 싸웠던 전몰장병과 전쟁피해자들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영화보다 영화같은 작전


북한군은 40일 만에 낙동강 이북을 모두 점령했고, UN군의 워커장군은 방어선을 지키다가 그 자리에서 죽으라고 할 정도로 심각한 위기를 맞았습니다. 맥아더는 반전을 위해서 속으로는 9월에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하며, 겉으로는 10월에 낙동강에서 대반격을 하겠다는 헛소문을 퍼트렸습니다. 

이에 북한군은 그 이전에 전쟁을 마무리하려고 주력군을 낙동강에 모두 보내어 8월 대공세를 하게 되지만, 한국군과 UN군은 혈투로 이를 막아냈습니다. 당시 낙동강은 하필 최대의 가뭄을 겪으며 물높이가 낮아져서, 상류의 경우엔 걸어서도 건널 수준이었습니다. 이때 죽음으로 방어하지 못했다면 인천상륙작전은 아예 시도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사진: 인천상륙작전의 상상도. 인천상륙작전은 5천 분의 1이라는 확률이라고 부를 정도로 위험천만한 상륙작전이었지만, 결국 맥아더의 고집대로 진행되었고 6.25전쟁에서 대반전을 이루었다.(사진: 인천상륙작전의 상상도. 인천상륙작전은 5천 분의 1이라는 확률이라고 부를 정도로 위험천만한 상륙작전이었지만, 결국 맥아더의 고집대로 진행되었고 6.25전쟁에서 대반전을 이루었다. / ⓒ sethengstrom.blogspot.com)


인천상륙작전을 영화처럼 맥아더가 혼자 생각해 낸 것은 아닙니다. 6.25전쟁이 터지기 몇 개월 전에 작성된 SL-17문서를 보면, 낙동강에 방어선을 마련한 후 인천에 상륙해서 보급선을 끊는다는 등의 계획이 적혀 있었습니다. 

더구나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전쟁 당시 맥아더는 뉴기니 점령 작전을 통해 상륙작전을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섬을 차례차례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건너뛰며 상륙작전을 하여, 중간에 고립된 섬을 앞뒤에서 공격했던 것입니다. 어쩌면 자신의 부관이었던 아이젠하워가 유럽에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시킨 뒤 미국민의 영웅이 된 것에 질투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당시 상륙작전에 대해서는 가장 많은 경험을 가진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사진: 인천상륙작전 후 인천에 상륙하는 맥아더 장군. 독선적인 성격 때문에 북한의 남침을 오판했지만,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며 영화처럼 6.25전쟁을 반전시켰다.(사진: 인천상륙작전 후 인천에 상륙하는 맥아더 장군. 독선적인 성격 때문에 북한의 남침을 오판했지만,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며 영화처럼 6.25전쟁을 반전시켰다.)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했지만 미국 지도부에서는 군산이나 주문진을 권장했습니다. 인천은 조수간만의 차가 너무 심해서 상륙 가능한 시간이 겨우 2시간 정도 밖에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인천항은 7~10미터에 달하는 간만의 차가 있었습니다. 만약 이 시간 안에 다시 빠져나오지 못하면 물높이가 낮아지므로 큰 군함들은 갯벌에 걸려서 오히려 공격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을 해야 한다고 설득했습니다. 70대의 노장은 낙동강전선의 북한군에게 군수물자를 공급해주는 서울, 인천의 보급로를 끊어야 함을 주장했던 것입니다.


사진: 인천상륙작전 이틀 후에 찍은 인천항의 사진. 썰물과 밀물의 차이를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사진으로, 왜 6.25전쟁에서 인천상륙작전이 어려웠던가를 볼 수 있다.(사진: 인천상륙작전 이틀 후에 찍은 인천항의 사진. 썰물과 밀물의 차이를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사진으로, 왜 6.25전쟁에서 인천상륙작전이 어려웠던가를 볼 수 있다. / ⓒ nl.go.kr)


항간에 인천상륙작전을 영화같은 도박이라고 비유하는 말로, 5000대 1의 성공확률을 가진 작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논리적 근거로 계산한 말이 아니라, 그만큼 상륙작전을 펴기 어렵다는 의미로 비유된 숫자입니다.

그러나 역으로 기습의 효과도 있었습니다. 김일성도 UN의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한다는 얘기를 들었으나, 반드시 인천일 것이라는 확신을 하지 못했습니다. 중국의 마오쩌뚱마저도 상륙지점이 군산일 것이라는 예상을 했었습니다. 인천항에도 기뢰설치 등이 있었지만, 상륙작전이 예상보다 빨라서 북한군 방어부대가 겨우 천여 명 밖에 구성되지 못했습니다. 




사진: 미군에 의해 생포되는 북한군. 김일성과 북한도 연합군의 상륙작전이 있을 것이라는 정보를 가지고 방어하려고 했으나, 그보다 더 빨리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되었고 6.25전쟁의 상황은 급변했다.(사진: 미군에 의해 생포되는 북한군. 김일성과 북한도 연합군의 상륙작전이 있을 것이라는 정보를 가지고 방어하려고 했으나, 그보다 더 빨리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되었고 6.25전쟁의 상황은 급변했다. / ⓒ history.com)







크로마이트(Chromite) 작전의 결정과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준비


맥아더 사령부는 8월 12일에 크로마이트(Chromite) 작전을 결정합니다. 크로마이트란 뜻은 크롬이라는 광물이 나는 철광을 의미합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다면 낙동강 전선으로 보내기 위한 보급품과 지원병과 무기를 중간에서 차단할 수 있을 뿐더러, 공격만 하던 북한군이 오히려 포위되어 혼란에 빠지게 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은 영화에도 자주 등장하는 5000대 1이라는 확률이 말해 주듯이 위험한 작전입니다. 산술적 근거가 없는 말뿐의 숫자지만, 인천상륙작전에 동원되는 7만5천여 명의 병사들의 목숨이 걸린 작전이니만큼 치밀한 계획이 전제로 필요합니다. 


사진: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이후의 6.25전쟁 상황도. 9월 15일 낙동강 전선까지 밀린 방어선이 하단에 보이고(첫번째 그림), 날짜가 지날 때마다 북진하여 10월 24일에는 압록강에 이르렀다.(두번째 그림) 세번째와 네번째는 1.4 후퇴와 휴전시기이다.(사진: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이후의 6.25전쟁 상황도. 9월 15일 낙동강 전선까지 밀린 방어선이 하단에 보이고(첫번째 그림), 날짜가 지날 때마다 북진하여 10월 24일에는 압록강에 이르렀다.(두번째 그림) 세번째와 네번째는 1.4 후퇴와 휴전시기이다. / ⓒ slideplayer.com)


맥아더 사령부는 증원군과 낙동강 방어군 일부, 일본 주둔군 일부를 포함하여 제10군단을 창설했습니다. 약 7만 5천 명 정도의 이 병력이 인천상륙작전에 동원될 부대인 것입니다.

맥아더 사령부는 첩보활동과 예비 작전을 한국군에게 요청했습니다. 이에 한국 해군은 8월 18일과 20일에 덕적도와 영흥도를 점령하여 상륙부대의 길을 터놓았습니다.

또한 기습작전을 위하여 삼척, 군산, 남포, 장사에 거짓 공격을 가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에 대비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다른 곳에 상륙하는 것처럼 기만행위를 벌인 것입니다. 그리고 영흥도에는 첩보부대가 침투하여 30여 명의 섬주민 반공청년대와 함께 인천항 정보수집을 시작했습니다.


사진: 해군 영흥도 전적비. 6.25전쟁 발발 3개월 후, 덕적도와 영흥도를 점령하여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의 기초를 쌓은 첩보부대 및 특공대를 기념하는 비이다.(사진: 해군 영흥도 전적비. 6.25전쟁 발발 3개월 후, 덕적도와 영흥도를 점령하여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의 기초를 쌓은 첩보부대 및 특공대를 기념하는 비이다. / ⓒ mpva.go.kr)


인천상륙작전에 연합군은 1개 군단과 1개 해병사단이 동원되었습니다. 한국군은 보병 1개 연대와 해병대 1개 연대가 참가합니다. 그런데 한국군은 해병대 수급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제주도에서는 급하게 해병대 지원자를 모집하였는데, 이들이 해병대 3기와 4기입니다. 약 3천 명 정도인 이들은 대부분이 고등학생 학도병이었고, 그 중에 교사나 중학생도 섞여 있었습니다.

제주도의 학도병들은 겨우 1주일의 군사훈련과 5발의 사격훈련 뒤에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되었습니다. 부산에서 출발한 장병들도 신병인 경우가 많아서, 인천으로 가는 동안 배 위에 훈련을 받았다고 합니다.


사진: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에 참전 중인 학도병들의 모습. 이들이 한국 해병 3기와 4기들인데 고등학생 뿐 아니라 일부 중학생도 섞여 있었다고 한다. 6.25전쟁에 청춘을 바친 앳된 모습도 얼핏 보인다.(사진: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에 참전 중인 학도병들의 모습. 한국 해병 3기와 4기들은 모집된지 2주일도 안된 고등학생 뿐 아니라 일부 중학생도 섞여 있었다고 한다. 6.25전쟁에 청춘을 바친 앳된 모습도 얼핏 보인다. / ⓒ imhc.mil.kr/)


맥아더 사령부의 인천상륙작전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지만, 북한군도 나름의 보고체계를 통해 이를 감지하고 있었습니다. 8월 20일 이후의 북한군 긴급지시문이나 전투명령서를 보면, 인천상륙작전과 경기도 내륙방어를 위하여 부대를 조정하고 진지를 구축하는 등의 사전 준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력부대가 낙동강에 집중되어 있었고 연합군의 기만작전이 여기저기에서 진행되었는데다가, 인천상륙작전이 생각보다 너무 일찍 전개되어서 인천-경기지역에 겨우 2만 명 정도밖에 확보하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크로마이트-인천상륙작전 이전에 낙동강전선을 뚫으려고 했지만 영천지역 총공세에서 오히려 패배를 당하며 전투가 어려워졌습니다. 




사진: 낙동강 전선을 지키고 있는 군인들. 북한군은 한국군과 유엔군이 10월 대공세를 하기 전에 8월 대공세를 펴서 전쟁을 끝내려 했지만 실패했고, 그 사이에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다.(사진: 낙동강 전선을 지키고 있는 군인들. 북한군은 한국군과 유엔군이 10월 대공세를 하기 전에 8월 대공세를 펴서 전쟁을 끝내려 했지만 실패했고, 그 사이에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다. / ⓒ aks.ac.kr)







영화처럼 극적인 인천상륙작전은 6.25전쟁을 반전시키다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연합군 8개국의 함선이 동원되어 일본과 부산과 제주도에서 병사를 수송했습니다. 요코하마와 고베 등 일본의 여러 지역에서 출발한 배들이 제주도 남동쪽에서 만난 후, 부산에서 출발한 배들과 제주도 서쪽에서 합류하여 인천까지 이동하였습니다. 무려 260척이 넘는 함선의 군단이 7만5천 명의 병사를 태우고 이동하는 대장정은 장관을 이루었습니다. 북한의 공군력과 해군력이 너무 빈약하다보니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한국군은 새로 지원하여 1주일 밖에 안 되는 신병들이 많았기 때문에, 가는 동안 배 위에서 훈련을 했습니다. 물론 그들은 인천에 도착할 때까지 인천상륙작전을 하러 가는지 몰랐습니다.


사진: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위하여 제10군단을 만들었다. 무려 260척이 넘는 배가 7만 5천여 명의 병사를 태우고 인천으로 향하는 대장정을 하였다. 이들은 바다 위에서 태풍을 만나 고생을 하기도 했다.(사진: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위하여 제10군단을 만들었다. 무려 260척이 넘는 배가 7만 5천여 명의 병사를 태우고 인천으로 향하는 대장정을 하였다. 이들은 바다 위에서 태풍을 만나 고생을 하기도 했다. / ⓒ imhc.mil.kr)


그런데 인천상륙작전에 큰 돌발사항이 생겼습니다. 9월쯤이면 한국을 지나가는 태풍이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이미 9월 초에 일본에 정박 중이었던 배를 7척이나 파손 당한 맥아더의 연합군은, 12일에 또 태풍이 온다고 하니 고민에 빠졌습니다. 미 공군 기상청은 태풍이 오기 전에 미리 출발하여 태풍의 왼쪽에 위치하도록 건의했습니다. 태풍은 오른쪽보다 왼쪽의 위력이 덜하기 때문입니다.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 배들은 바다 위에서 태풍이 지나도록 대기해야 했습니다. 괴로웠지만 다행히도 아무 피해 없이 작전을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피해가 생겼다면 고려시대에 몽골군의 일본침략 때 일본을 구해준 태풍 가미가제처럼 북한에게 도움이 되었겠지만, 인천상륙작전의 배들은 현대기술로 만들어진 배이므로 상황은 달랐습니다. 


사진: 1950년 9월 15일, 드디어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은 시작되고 수 많은 배들이 긴장된 병사들을 태우고 인천 앞바다를 헤쳐 가고 있다. 오전 6시 30분과 오후 6시 30분, 이렇게 두 차례로 나누어 상륙작전을 벌였다. 6.25전쟁의 가장 극적인 장면이다.(사진: 1950년 9월 15일, 드디어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은 시작되고 수 많은 배들이 긴장된 병사들을 태우고 인천 앞바다를 헤쳐 가고 있다. 오전 6시 30분과 오후 6시 30분, 이렇게 두 차례로 나누어 상륙작전을 벌였다. 6.25전쟁의 가장 극적인 장면이다.)


미리 14일까지 폭격기와 함포사격으로 해안의 방어시설을 초토화시켜 놓은 후 9월 15일 새벽 인천 앞바다에 집결한 배들은, 멀리 팔미도의 등대가 켜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팔미도등대 특공대가 침투하여 등대를 확보한 것이 확인되는 순간입니다.

인천상륙작전은 3단계로 기획되었습니다. 조수간만의 차 때문에 하루 2번, 새벽 5~7시와 오후 5~7시의 밀물시간에 나눠서 상륙작전을 해야 했습니다. 빨리 빠져나오지 못하면 갯벌에 걸려서 배가 좌초됩니다.

새벽 6시 30분에 인천상륙작전의 첫 번째 상륙부대가 상륙했습니다. 한국해병대 중대와 미국해병대 대대는 인천 앞의 월미도를 점령하였습니다. 오후 5시 30분에는 2차 상륙이 시도되었습니다. 이 공격에서 인천의 북부와 남부를 동시에 공격하여 점령했습니다.


사진: 인천의 갯벌에 상륙 중인 해병대의 모습.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군은 허리가 잘려서 보급과 지원군을 받지 못하고 무너졌다. 6.25전쟁에서 서울 수복과 평양 점령, 압록강 진격은 인천상륙작전의 힘이기도 하다.(사진: 인천의 갯벌에 상륙 중인 해병대의 모습.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군은 허리가 잘려서 보급과 지원군을 받지 못하고 무너졌다. 6.25전쟁에서 서울 수복과 평양 점령, 압록강 진격은 인천상륙작전의 힘이기도 하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인천은 하루 만에 완전히 해방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국군 및 연합군은 20명 정도의 전사자와 170명 정도의 부상자가 있었지만, 북한군은 완전히 분쇄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영화같은 인천상륙작전은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가 성공한 작전이 되었던 것입니다. 북한군은 상륙작전이 벌어지기 전에 폭격과 함포사격에 수없이 죽었고, 상륙 후엔 진지에 숨은 채로 땅 속에 묻혀지거나 해서 거의 저항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서울 수복과정에서는 꽤 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인천 수복과정만 본다면 거의 일방적인 공격에 가까웠습니다. 또한 일반적인 전쟁처럼 낙동강 전선에서 부터 치고 올라왔다면 수만 명 이상이 더 희생되었을 전쟁을 앞당긴 것입니다. 이후 포위를 뚫고 북한으로 복귀한 북한 주력군은 절반 밖에 못 되었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인천상륙작전은 대규모 상륙작전임에도 불구하고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효과를 만들어내서, 영화의 소재로도 드라마틱한 면이 많습니다. 대표적으로는 1965년 영화인 "인천상륙작전"과 2016년 영화인 "인천상륙작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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