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작전의 첩보부대와 특공대
- 영흥도 작전, 팔미도등대 켈로부대 작전
인천상륙작전이 있기 직전, 첩보부대와 특공대의 활약은 영화의 소재가 될 만큼 극적입니다.
그래서 영흥도 작전과 팔미도 작전은 한국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다룬 적이 있고, 영화 인천상륙작전에도 등장합니다.
이 글은 영화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보아도 도움이 되는 글입니다.
인천상륙작전, 영화 같은 덕적도, 영흥도 탈환작전
인천상륙작전은 UN군이나 미국 주도로 이루어졌지만, 그 전의 사전준비는 한국군의 영화 같은 활약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맥아더 사령부는 9월 15일을 인천상륙작전의 D-day로 정했습니다. 그 후 8월 12일에는 한국해군에게 인천 일대의 정보수집을 요청했습니다. 한국해군은 인천 앞바다의 덕적도와 영흥도를 점령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첩보부대를 잠입시켜 인천상륙작전에 필요한 정보를 탐색하기로 합니다.
(사진: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한 첩보부대 활동이 영흥도에서 있었다. 이때 활약한 한국군 장교와 미군 장교, 그리고 영흥도의 민간인 반공청년단 대원들. 우측의 클라크 대위는 켈로부대에서도 활약했다. / ⓒ 미상)
덕적도와 영흥도는 인천항구로 들어가는 길목의 섬입니다. 이 두 섬의 위쪽에는 영화로도 유명한 실미도가 있습니다. 이곳은 북한군이 점령한 후 UN군 해군의 접근을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천상륙작전을 비밀리에 진행하려면 반드시 점령해야 하는 섬입니다.
당시에는 감시위성도 없었고 북한군의 공군력이 약했으므로, 이곳을 점령하면 기습작전에서 유리하게 되는 이점이 있습니다. 영흥도와 덕적도를 점령하면 인천항구를 직접 관찰하며 정보를 수집할 수도 있게 됩니다.
덕적도와 영흥도 탈환작전은 8월 18일과 20일에 감행되었습니다. 상륙작전이었지만 해병대를 동원할 수 없어서 함선에 승선 중인 해군을 선발하여 육전부대를 구성하였습니다. 영국과 캐나다 군함들의 함포사격 지원으로 화력 면에서 앞선 한국 해군은 인명 손실 없이 덕적도를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은 인천상륙작전의 첩보부대 근거지가 될 영흥도입니다. 해군 육전대는 무기가 빈약하여 영국과 캐나다 군함에서 기관총을 빌려서 영흥도 공격에 나섰습니다.
(사진: 덕적도와 영흥도 점령작전에 참가했던 해군 소속 육전대 대원들. 이들이 먼저 인천의 앞마당을 열어 놓았기에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다. / ⓒ 인천보훈지청)
덕적도와 영흥도의 북한군은 수십여 명밖에 안 되기 때문에 100명 정도로 구성된 해군 육전대가 유리했지만, 덕적도에 비해 영흥도의 저항은 거셌습니다. 영흥도에서는 4명의 전사자가 생겼습니다. 특히 고 박동진의 전사이야기는 유명합니다.
박동진은 적이 은폐하여 총을 쏘아대자, 육탄돌격으로 수류탄 공격을 하던 중 관통상을 당하였습니다. 박동진은 총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자신이 가지고 있던 총을 동료에게 가지라고 주었습니다. 무기가 충분치 않았던 한국군의 절박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덕적도와 영흥도를 점령한 한국군은 섬주민으로 반공청년단을 구성해 방어를 맡기고 철수했습니다.
(사진: 영흥도 전투에서 용맹하게 싸웠던 박동진은 장렬하게 전산하고, 그 공을 높여 해군에서는 유도탄 고속정인 박동진함을 진수하였다. 박동진은 영흥도의 일화로 국가보훈처가 정한 12인의 6.25전쟁 영웅으로도 기록되었다. / ⓒ 대한민국 국군 플리커)
인천상륙작전, 영화 같은 17인의 첩보부대 - 영흥도 첩보작전
덕적도와 영흥도를 점령한 한국군은 며칠 후, 맥아더 연합군 사령부의 요청으로 17명으로 구성된 첩보부대를 영흥도에 보냈습니다. 적의 방어 상태와 지형정보를 빼내오기 위한 침투작전이었습니다. 한군국 해군의 특수공작팀이 주도하여 비밀리에 작전이 시행되었습니다.
이들은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것을 대비하여 머리카락과 손톱을 깎아서 가족에게 전해 달라며 길을 떠났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이 있기 18일 전의 작전입니다. 인천상륙작전은 비밀리에 진행되었기 때문에 기밀이 발각되지 않도록 은밀히 진행되었습니다.
(사진: 영흥도에 있는 영흥도전적비의 모습. 이들 해군과 현지 반공청년단이 없었다면 인천상륙작전은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 ⓒ incheon.go.kr)
영흥도에 도착한 첩보부대는 반공청년단과 영흥도의 폐학교를 거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리고 밤이면 몰래 배를 타고 침투하여 정보를 캐내었습니다. 김일성도 연합군의 상륙작전을 예상하여 경기도 일대에 방어작전 구축을 지시하였으므로, 토굴 등의 각종 진지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습니다. 영흥도의 첩보부대는 이 진지공사에도 인부로 끼어들어서 정보를 알아냈습니다.
나중에는 미군 정보장교 1명이 추가로 투입되어 맥아더에게 직접 보고되었습니다. 이 정보들은 인천상륙작전을 기획하는데에 소중한 정보가 되었습니다.
(사진: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당시 사진.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은 미군만의 작전이 아니라 한국군의 희생이 바탕이 되어서 맺은 결실이기도 하다. / ⓒ 미상)
인천상륙작전이 있기 이틀 전인 9월 13일까지 첩보활동을 마치고 첩보부대는 철수명령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뒷마무리를 하기 위해서 임병래 소위의 조가 영흥도에 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인천상륙작전이 있기 하루 전인 9월 14일 밤, 갑자기 북한군 1개 대대가 기습을 해 왔습니다. 임병래 중위 조의 해군 첩보부대 6명과 반공청년 의용대원 30명은 빈약한 무기로 맞서 싸워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14명이 전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병력과 화력에서 북한군의 상대가 되지 못하는 첩보부대와 반공청년 의용군은, 북한군의 공격 때문에 도망가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싸워야 했습니다.
(사진: 영흥도 전적비에 있는 해군 전투 전사자 및 대한청년단 방위대원 추모비. 이들은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기 하루 전, 적의 습격으로 희생을 치뤄야 했다. / ⓒ mpva.go.kr)
결국 임병래 소위와 홍시욱 대원은 다른 대원들을 퇴각시키기 위해서 희생하기로 합니다. 다른 대원들이 해안가로 피신할 수 있도록 적의 이목을 끌어서 교전하였습니다. 마지막 총알 한발씩은 아껴서 자살하는데 쓰기로 하였습니다. 적에게 잡혀서 고문을 받다가 기밀작전인 인천상륙작전을 말해서는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영흥도에서 첩보부대는 인천상륙작전이 있기 하루 전, 안타깝게도 장렬히 전사하게 됩니다.
맥아더도 인천상륙작전에서의 첩보부대의 활약에 감사를 표했고, 미국도 임병래 소위와 홍시욱 대원에게 은성무공훈장을 수여했습니다. 현재 영흥도에는 해군 첩보부대 8명과 반공청년대 6명의 전사를 기리는 기념비가 있습니다.
(사진: 국가보훈처의 포스터의 일부분. 인천상륙작전의 기초를 마련하고 그 비밀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린 임병래와 홍시욱. 6.25 전쟁영웅에 선정되었으며 영흥도 X-ray 작전으로 기록되었다. / ⓒ 국가보훈처)
인천상륙작전, 영화처럼 극적인 팔미도 등대작전 - 켈로부대(KLO) 특공대
인천상륙작전에 동원될 함선들의 길을 트기 위한 덕적도와 영흥도 점령작전에 이어, 본격적인 팔미도 등대작전이 9월 14일에 벌어집니다. 팔미도 작전 특공대의 임무는 9월 15일 0시에 팔미도의 등대를 점령하고 등대에 불을 켜는 것이었습니다.
팔미도등대 작전 특공대는 6명으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켈로부대(KLO)로 불리는 이들은 영흥도작전에 투입되었던 미해군 대위, 한국육군 대령, 한국해군 대위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후에 1명의 한국군 증언자가 더 나타났습니다.
(사진: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반드시 켜져야 했던 팔미도 등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등대이며 11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앞쪽이 원래의 팔미도등대이고 뒤쪽은 새로 건설된 등대. / ⓒ blog.ohmynews.com/cornerstone)
팔미도는 인천 앞바다의 요충지이며, 팔미도 등대는 1903년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이기도합니다.
인천상륙작전이 새벽에 전개될 예정이었으므로, 켈로부대(KLO)부대원들은 캄캄한 새벽바다를 밝혀 함선들이 무사히 인천에 올 수 있게 도와야 했습니다. 당시의 인천은 조수간만의 차가 너무 커서 새벽 5~7시에 실패하면 오후 5~7시에나 상륙작전이 가능했습니다. 만약 등대를 못보고 길을 헤맬 경우, 밀물 때를 놓쳐서 작전이 어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사진: 팔미도등대 작전을 성공시킨 후 귀환하는 중에 찍었다고 알려진 사진. 보통 켈로부대(KLO)로 불리는 미국 첩보부대의 활약으로도 알려져 있다. 팔미도등대작전에는 미군과 한국군이 참여했다. / ⓒ 미상)
팔미도 등대작전에 켈로부대(KLO)원으로 참가했다는 증언에 의하면, 팔미도에 상륙한 이들은 북한군 2개 분대를 물리치고 등대를 점령했습니다. 미군 장교의 증언과 한국군 증언자의 증언이 엇갈리지만, KLO부대원들은 예정보다 늦게 팔미도 등대를 접수하고 불을 켜려고 했습니다.
프랑스식 석유등을 켜야만 하는데 불이 붙지 않았습니다. 이 장치는 파이프를 통해 석유가 공급되는 것을 나사 같은 작은 부품으로 조절하도록 되어 있는데, 그 작은 부품이 빠져 있어서 점등이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사진: 수많은 용사들의 희생으로 인천상륙작전은 무사히 시작될 수 있었다. 사진은 인천상륙작전 중 2차 상륙작전 모습. 팔미도등대, 월미도점령 이후 인천항에 본격적으로 상륙하고 있다. / ⓒ 미상)
어둠 속에서 1시간 40여분 동안 찾아 헤맸으나 그 작은 부품은 찾을 수가 없었고, 켈로부대(KLO)원들의 머릿속에는 캄캄한 바다 위를 떠돌아야 할 7만여 명의 인천상륙작전 장병들에 대한 걱정이 가득했습니다. 결국 지쳐서 바닥에 눕게 되었는데, 무언가 손에 잡히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석유 공급 조절부품이었습니다. 이렇게 영화처럼 마음 조리며 작전은 성공하고, 팔미도 등대불이 켜지는 것을 보며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할 함선들이 인천항에 모여들 수 있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은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숨은 영웅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