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사상륙작전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10대 학도병 참전 이야기
인천상륙작전은 6.25전쟁의 흐름을 완전히 바꿔놓은 전투입니다. 그리고 장사상륙작전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추진된 전투입니다. 여기에는 10대 후반에 희생을 감수한 수많은 학도병이 있었습니다. 장사상륙작전의 학도병들과 상륙함인 LST 문산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인천상륙작전의 뒤에서 잊혀진 장사상륙작전의 배경
인천상륙작전이 있기 직전, 경북 영덕군 장사리에서는 장사상륙작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천상륙작전이 워낙 큰 규모에 큰 성과를 거두어서인지 장사상륙작전은 모르는 이가 많습니다. 그리고, 묻혀진 이 상륙작전에는 어린 학도병들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이 학도병들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또 하나의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북한군이 남한을 거의 점령한 후의 낙동강 방어선에는 미성년 병사가 꽤 많았습니다. 그리고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모집된 해병대 3기, 4기는 10대 후반의 청소년이 다수였습니다. 더구나 장사상륙작전에서는 작전에 투입된 병사 전체가 학도병이었습니다.
장사상륙작전에 투입된 학도병은 군번도 주어지지 않은 민간인 학생신분이었습니다. 이들 중에는 자신이 장사상륙작전에 참가했었다는 사실을 전쟁이 끝날 때까지 모르는 이도 많았고,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한 속이기 작전이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더더욱 많았습니다.
그래선지, 6.25전쟁 이후 국가적 예우나 기록, 관리 측면에서 소홀한 점이 많았습니다. 당시 미성년자인 이들은 따로 분류되지 못해서, 그동안 국가적 예우에 억울해하며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었습니다. 다행히 1997년 LST 상륙함인 문산호가 인양되고, 2016년 작전명령서가 복원되며 화제가 되어 장사상륙작전이 알려졌습니다.
처음에 장사상륙작전이 구상된 것은 포항 이북을 빼앗기고 낙동강전선에 갇히면서 북한군의 후방 보급로를 공격할 필요성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미뤄지다가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양동작전으로 다시 추진되었습니다.
양동작전은 양공작전과 달리 적의 관심을 다른 데에 돌리는 것에 목적이 있습니다. 북한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혼란을 일으키는 것으로 장사상륙작전의 목적이 변경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사상륙작전은 기밀작전이면서도 부수적인 작전 정도로 취급받을 상황에 놓입니다.
원래 미군 해병대가 맡아야 하는 것이었지만 실패를 우려하여 미군은 포기하고 한국군이 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국군도 병력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학도병이 투입되게 됩니다.
장사상륙작전에서 희생하며 사라져간 학도병들
학도병이 주축이 된 장사상륙작전은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도록 공헌을 하였습니다. 맥아더 장군도 친필로 공로와 감사를 표명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장사상륙작전에 투입된 병력은 800여명이 못 되었지만, 북한군은 2개의 연대급이 상륙한 줄 알고 2개 연대병력을 투입했습니다. 10대의 청소년들이 T-34탱크를 앞세운 북한군 정예부대를 불러들여 전투를 벌이게 된 것입니다.
이 북한군은 낙동강전선을 뚫으려고 한국군과 유엔군을 압박하던 부대였습니다. 덕분에 낙동강전선의 북한군 압박에서 연합군은 좀 더 빨리 여유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북한군도 유엔군이 어딘가에 상륙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상황에서, 낙동강전선은 보전하고 북한군에게 혼란을 주게 되었으니 장사상륙작전은 큰 성공을 거둔 전투가 되었습니다.
장사상륙작전은 잘 모르는 사람이 많지만, 인천상륙작전의 전날 밤 경북 장사리에서 감행된 전투입니다. 하지만 인천상륙작전을 속이기 위해 계획된 작전이다 보니 어처구니없는 희생도 가져왔습니다.
장사상륙작전은 1950년 9월 14일 밤에 시작되었습니다. 다음 날 인천상륙작전이 벌어지므로 북한의 시선을 동서 양분시키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특수부대도 아니고 학도병이 적진 깊숙이 침투하는 것에 비해 작전 준비는 매우 소홀했습니다.
여기에는 고등학생과 일부 중학생까지 포함된 10대 후반의 학도병이 동원되었습니다. 겨우 2주일 훈련에 실탄 10발을 쏘아본 것이 전부인 학도병 720여 명과 작전 및 항해인원 등 총 780여 명이 경북 영덕군 장사리로 접근했습니다.
상륙함인 LST 문산호 한 척만으로 장사상륙작전은 진행되었습니다. 해안방어 부대에 의해 집중공격을 받을지 모른다는 대비는 없었습니다. 영국 구축함 한 척이 멀리서 엄호사격을 해주기로 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더구나 이 날은 태풍이 지나가는 날이었습니다. 풍랑이 심한 날씨에 연안에 배를 댈 수도 없는 상황에서, 50m나 떨어진 바다를 건너서 상륙해야 했습니다.
선봉조가 바닷가 나무와 배를 밧줄로 연결한 후 상륙작전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북한군이 이를 발견하고 집중포화를 퍼부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앞섰던 지휘계급과 학도병들이 죽어갔습니다. 이때 무전기는 파손되어 교신이 끊어졌습니다. 구축함과 연락이 안 되니 함포사격도 제대로 지원받을 수 없었지만, 구축함의 함포와 LST 문산호에 설치된 박격포의 포격 속에서 겨우 상륙이 진행되었습니다.
장사상륙작전의 학도병, 그 성과와 안타까움
학도병들이 생사를 걸고 상륙을 시도하는 와중에 LST 상륙함 문산호도 공격을 받아 좌초되고 말았습니다. 적의 포격에 의해 LST 문산호의 함미가 파괴되고 닻이 끊어진 것입니다. 결국 선장과 항해직원들도 상륙하여 유격대에 합류해야 했습니다.
북한군 해안수비대를 제압하고 해안을 접수한 후 학도병들의 처지는 더욱 막막했습니다. 애초에 3일을 계획하고 보내진 작전이라 식량과 탄약이 겨우 3일치 밖에 없었습니다. 그것도 6봉지에 미숫가루를 담아 전투식량으로 가져간 것이기에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허기와의 싸움도 각오해야 했습니다.
이들은 부산에서 출항할 때 북한군 군복과 소련제 장총을 지급받았습니다. 북한군처럼 위장하고 침입한 것은 유격대와 똑같았지만, 그 구성원은 민간인 신분의 학생과 얼떨결에 전투에 참전하게 된 민간인들이었습니다.
준비도 부실하고 지휘관마저 전사했으며 통신까지 두절된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학도병들은 5일이나 견디며 인근 북한군을 물리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마침내 북한군도 위기를 느끼고 16일에는 지원부대를 불러들였습니다. 북한군 제5사단의 정예부대 2개 사단은 T-34와 T-85 전차 4대를 동원하여 학도병 소탕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양동작전인지 모르는 학도병 유격대원들은 악착같이 싸웠습니다. 적의 진지와 교량 도로를 파괴하였습니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했지만, 지휘부는 18일이 되서야 학도병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LST 상륙함 조치원호를 보냈습니다. 상륙함 조치원호는 19일 도착했지만 북한군은 제2의 상륙이 있는 줄 알고 맹공을 가하였습니다. 이번에는 200m 거리에 정박했지만, 장사상륙작전의 학도병들에게는 문산호로 상륙할 때와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뒤쪽에서는 북한군의 기관총이 난사를 하고 있지만 살아남기 위해 바다에 뛰어들어 헤엄을 쳐야했습니다. 구명대를 탄 후 상륙함에 옮겨 타기 위해 해안에서 학도병들은 사투를 벌였지만 적의 추격은 맹렬했습니다. 결국 40명 가까이는 적진에 남겨둔 채 장사리를 떠나야 했습니다. 또 과정에서 학도병들은 총탄에 맡거나 바다에 휩쓸러 사라져갔습니다.
장사상륙작전의 동지회 회장의 증언에 의하면, 배에 오른 후 미군이 병사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것에 놀랐다고 합니다. 적진 깊이 유격전을 펼치는데 3일치 식량에 민간인 LST선에 태워서 학도병을 보낸 것은, 살아도 그만 죽어도 그만인 취급이었다고 느낀 것입니다.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장사상륙작전, 이 전투에서 139명이 전사하고 92명이 다쳤으며 수많은 학도병이 실종되는 희생을 치렀습니다. 지금 이 곳에는 추모를 위한 추모비와 기념공원이 들어서 있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이름 없이 죽어간 그들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전쟁의 밑바닥은 사실 이름 없는 그들이 희생으로 다져 놓은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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