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글라데시 쿠데타
라흐만 대통령과 셰이크 하시나 총리
1975년 8월 15일 새벽, 방글라데시의 초대 대통령이자 건국의 아버지인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은 군부 쿠데타로 가족과 함께 잔인하게 살해당했습니다. 당시 유럽 유학 중이던 두 딸, 셰이크 하시나와 셰이크 레하나만이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딸 셰이크 하시나는 다시 부활해서 방글라데시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그녀는 민주화 시위대에 의해서 쫓겨나게 됩니다. 계속된 방글라데시의 혼란... 그 기나긴 역사적 비극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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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글라데시 쿠데타 - 라흐만 대통령과 셰이크 하시나 총리
방글라데시 독립 대통령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은 방글라데시의 초대 대통령이자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입니다. 그는 카리스마 넘치는 연설가이자 정치 지도자로서 동파키스탄의 독립과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970년 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 서파키스탄 정부의 방해로 정권을 수립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1971년 3월 26일, 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을 이끌었습니다. 독립 후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라흐만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국가 재건에 힘썼습니다. 특히 사이클론 피해 복구, 토지 개혁, 산업 육성, 5개년 계획 등을 통해 경제 회복에 주력했습니다.
하지만 반대 군부 세력의 위협이 계속되었습니다. 쿠데타의 주축 세력은 파키스탄 정규군 출신으로 구성된 방글라데시 군부 세력이었으며, 이들은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파키스탄과의 재통합을 원했습니다. 또한 라흐만 정부 정책에 반발하던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 또한 쿠데타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라흐만 대통령과 쿠데타 사건
이들은 쿠데타 이후 이들은 방글라데시를 이슬람 국가로 만들려는 시도를 계속했습니다. 그러던 중 1974년 발생한 대기근은 라흐만 정부에 대한 민심을 악화시켰고, 정치적 불안정을 심화시켜 쿠데타의 빌미를 제공했습니다.
1975년 8월 15일 새벽 5시경, 방글라데시의 건국의 아버지,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 대통령은 그의 가족과 함께 잔혹하게 살해당했습니다. 파키스탄 정규군 출신으로 구성된 쿠데타군은 대통령 사저를 급습하여 라흐만 대통령과 그의 가족들을 체포했습니다.
당시 유럽 유학 중이던 두 딸, 셰이크 하시나와 셰이크 레하나를 제외한 모든 가족 구성원이 살해당했습니다. 심지어 10살에 불과했던 막내아들 셰이크 러셀도 쿠데타군의 총탄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쿠데타 이후, 라흐만은 단순히 살해된 것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매장당했습니다. 쿠데타를 주도한 세력은 라흐만과 관련된 모든 유산을 파괴하고 그를 역적, 매국노로 몰아붙였습니다.
딸 셰이크 하시나 총리의 실각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살아남은 딸 셰이크 하시나가 망명 생활을 끝내고 1981년 고국으로 돌아와 정치에 입문했습니다. 아버지를 죽인 군부 보수 세력에 대항해서 반군부 민주화 투쟁을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결국 1996년 선거에서 승리하며 40대 여성 총리에 올랐습니다.
이는 아버지가 암살된 지 21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이후 2023년까지 4연속 총선 승리를 거두며 장기 집권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후진국의 정치적 한계는 여전했고, 그녀 역시 시간이 지나며 야당 탄압을 계속했습니다. 장기 집권 과정에서 야당 탄압 및 언론 통제 등으로 '독재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대학생들은 시위를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하시나 총리는 강경 진압을 지시했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노동계와 문화계 등 각계각층이 시위에 동참했습니다. 결국 시위에 굴복한 군이 먼저 국민 편으로 돌아서면서 하시나 총리는 사실상 권력을 잃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하시나 총리는 군 헬기를 타고 관저를 빠져나가 해외로 도피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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