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익문사 뜻과 고종
대한제국 비밀정보기관의 화학 비사법
보통 사람들은 첩보기관이라고 하면 CIA나 국정원 같은 것을 연상합니다. 그러나 1902년, 대한제국에도 제국익문사라는 첩보기관이 있었습니다. 더구나 화학 비사법 같은 기밀 암호 방법 등 철저한 보안을 하고 매우 큰 규모로 운영되기도 했습니다.
고종 친서 전달 사건, 헤이그 특사 사건 등에도 고종은 제국익문사란 기관을 통했었다고 합니다. 그럼, 비보장정을 통해서 화학 비사법이란 무엇인지, 제국익문사의 운영자금은 어떻게 모았는지, 규모는 어느 정도인지 등에 대한 구한말 역사 여행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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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익문사란? (뜻과 고종의 비밀 조직) - 화학 비사법과 대한제국 비밀정보기관
국정원 같은 대한제국 비밀정보기관
대한제국에도 비밀정보기관이 존재했습니다. 100여 년 전, 강대국들 사이에서 식민지 쟁탈전이 치열하던 시기에도 세계 각국의 정보전은 매우 활발했습니다. 특히 일본은 조선을 침략에 맞서 대한제국도 비밀첩보기관인 제국익문사를 운영했다는 것이 알려졌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국정원이며 외국으로 치면 CIA나 KGB 같은 조직입니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고종은 세계 각국의 원수들에게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알리는 비밀 친서를 보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눈을 속여야 했던 일입니다. 여기에 조직적인 비밀 조직망이 나섰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잘 훈련된 비밀요원들이 황제를 도와 비밀 외교를 지원했다는 것입니다.
한편 장서각에는 "제국익문사 비보장정"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제국"은 대한제국을 의미하고, "익문사"는 신문사 명칭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황제 직속의 비밀정보기관임을 감추기 위한 이름입니다. "비보"는 황제에게 비밀스럽게 보고한다는 의미이고, "장정"은 규정집을 뜻합니다. 즉 제국익문사의 뜻은 대한제국 첩보국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제국익문사 비보장정의 기록
그 비밀 정보 요원의 임무에 대한 규정을 적은 책이 바로 비보장정입니다. 현대로 치면 설립 약관과 비슷한 형태입니다. 1조는 제국 익문사가 한성 중앙에 사무소를 두었다는 내용이고, 2조는 본사가 매일 비밀 보고를 구성하여 황제의 현명한 판단을 보좌하는 일을 주로 한다는 내용입니다. 이런 식으로 총 23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통신원을 가장한 61명의 비밀정보 요원은 국내외에서 다양한 정보 활동을 수행했습니다. 경성에서 활동하던 정보 요원은 보통 통신원이라 칭했으며, 전국 13개 도회에는 상임 통신원을 둬서 지방 관청이 지방을 떠돌아다니는 외국인을 살피도록 했습니다.
외국인의 왕래가 잦은 항구에는 특별 통신원을, 외국에는 외국 통신원을 둬서 해외 정세를 자세히 살피도록 했습니다. 이렇듯 제국익문사는 규모도 매우 컸으며, 임무 직무 체계도 체계적으로 분류되어 있었습니다. 제국익문사 비보장정은 당시 비밀 첩보기관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는 단 한 권의 역사적 자료이기도 합니다.
고종이 제국익문사를 만든 까닭
고종이 제국익문사를 만든 것에는 역사적 이유가 있습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입니다. 고종은 국내 관군만으로 감당이 되지 않자 청나라에 군사 지원을 요청을 했습니다. 당시 청국과 일본은 상호 약속에 의해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기 전에 알리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일본은 청국이 알려 주기도 전에 미리 알고 조선으로 파병을 했습니다.
대한제국과 청나라의 은밀한 외교 내용을 미리 알 수 있다는 것은 대한제국 조정에 일본 첩보원이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더구나 1895년, 친일파들이 춘생문 사건을 통해서 조정 내의 친미파와 친러파를 색출하여 축출해버리는 사건을 벌어집니다. 고종 입장에서는 이에 대응할 정보기관이 없었기에 제국익문사를 생각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1902년 고종은 제국익문사를 설립하고 비밀 정보기관 활동을 하도록 하게 되었습니다. 정보기관이므로 외부, 특히 일본에게는 그 존재를 숨겨야 했습니다. 그래서 익문사(益聞社)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로 합니다. 여기서 익문이란 이로운 소식이는 뜻이므로, 결국 제국익문사란 뜻은 대한제국을 위해 정보를 다루는 곳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기밀 암호 화학 비사법
미국 CIA, 소련 KGB뿐 아니라 영화 007 같은 것을 보면 비밀요원들은 은밀하게 정보를 주고 받는데, 제국익문사의 비밀요원들 역시 그러했습니다. 전국과 외국 각지에서 통신원들이 몰래 수집한 정보를 전신기를 비롯한 다양한 방법으로 보내옵니다. 그러면 전문 담당원이 수집된 정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다음 단계로 넘깁니다.
다음 단계의 정보 책임자는 이렇게 들어온 정보를 종합하여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그러나 보고서를 아무나 보게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화학 비사법"이란 방법을 사용해서 기록했습니다. 화학 비사법이란, 정보를 숨기기 위해 특별한 화학 물질을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설명하자면, 먹 대신 황혈염 같은 물질로 글을 썼다면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염화철 성분을 물에 녹여야만 글씨를 읽을 수 있습니다. 즉 화학 비사법은 단순히 글을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지도 알아야만 비로소 글을 읽을 수 있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문서는 사기라는 직책의 사람에게 전달되고, 그는 고종이 친히 펼칠 때까지는 아무도 열어보지 못하도록 황실 문장(자두꽃 무늬)과 "聖聰輔佐(성총보좌)"라는 글이 새겨진 도장을 봉투에 찍어 놨습니다. 여기서 성총보좌란 뜻은 임금의 귀에 도움을 준다는 의미입니다. 즉, 국가적 정보라는 뜻입니다.
제국익문사 운영자금
비밀첩보국을 운영한다는 것은 사실 엄청난 돈이 들어간다는 말과 같습니다. 다행히 제국익문사가 설립되던 1902년의 왕실 재정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개선되어 있었습니다. 왕실 재정을 전담하던 내장원의 회계 장부를 보면 5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아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한제국 권양 원년인 1896년 말만 하더라도 약 3,700원의 적자 상태였으나, 불과 2년 뒤인 1898년부터 재정 상태가 흑자로 돌아서고, 1900년대에 들어서는 수익이 배로 증가했습니다. 잡세, 광산 운영비, 해외 70여 개국으로 수출되는 홍삼 전매 사업 등이 그 받침대였습니다. 1903년엔 프랑스에 5만 근의 홍삼을 100만 원에 판매했다는 기사도 있습니다.
고종은 왕실의 자금을 활용하여 근대 사업에 투자했으며, 한성전기회사 등의 경제 분야와 근대식 병원과 학교 보조금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 다만 직접적으로 정보기관에 돈을 쓴다는 표현이 없어서, 이 역시 비밀로 하는 것이 분명했다는 정도를 알 수 있습니다. 지출이 있었으나 출처를 밝히지 않은 돈이 꽤 있었기 때문입니다.
추정하기로는, 제국익문사의 운영비가 내장원 전체 지출의 거의 40%에 달할 정도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누군가는 고종의 비자금이라고 하지만, 해외 은행 자금도 충분했습니다. 상해 등의 은행에 약 65만 달러가 존재했었습니다. 비자금이든 아니든, 고종이 직접 외국에 밀사를 파견하고 사절을 보낼 수 있으려면 일제의 감시를 피해야 했던 것입니다.
헤이그 특사 사건과 해산
당시 일본은 고종이 외부와 교섭할 수 없도록 궁궐의 외부인 출입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었기에, 고종은 다양한 방법으로 비밀 외교를 수행하며 007 작전과 같은 전략을 통해 국제 사회에 자신의 입장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는 전 세계에 있는 비밀 요원들을 동원하여 외교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또한, 고종은 일본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비밀 암호를 사용하여 문서를 송신했습니다. 당시 일본의 감시가 심했기 때문에, 고종은 문서의 내용을 알아보지 못할 암호로 작성하여 외국에 보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직책도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대한제국 요원들이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밀 외교 활동은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준, 이상설, 이위종이 파견되어 을사늑약이 일본의 불법 강제 조약임을 폭로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1908년에는 상해에 예치해 두었던 자금이 일제에게 강제로 빼앗기에 되면서 해외 활동이 크게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제국익문사 요원들은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도 독립운동 비자금을 만들고 순종을 보필했었습니다. 그러나 나라를 빼앗긴 후에도 계속되던 활동은 결국 일본에게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1920년 강제로 해산되게 됩니다. 그러나 제국익문사 요원이 누구였는지는 지금도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만큼 철저한 비밀 정보 기관이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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