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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한 지식 칼럼/역사&사건

호머 헐버트 헤이그 특사 공로자 1 - 고종 헤이그 밀사 사건의 외국인

2020. 2. 23.

[호머 헐버트 헤이그 특사 공로자 1 - 고종 헤이그 밀사 사건의 외국인]

망해가던 조선은 안간힘을 써서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잔혹하게 식민지로 만들려고 했고, 1905년 '을사늑약'을 당했습니다. 고종 황제는 그 억울함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1907년 '헤이그 특사'를 보냅니다.

우리 역사책에는 헤이그 밀사 사건에 한국인만 나오지만, 사실 여기에는 1명의 외국인이 더 있었습니다. 그는 제4의 헤이그 특사 '호머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입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오로지 한국의 광복을 위해 헌신한 사람입니다. 조국을 팔아먹고, 그 자손들까지 재산을 보존하느라 혈안인 한국인도 있는데, 남의 나라를 위해 평생을 노력한 호머 헐버트의 삶을 소개합니다.



제4의 헤이그 특사는 외국인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본에게 외교권을 빼앗긴 후, 고종 황제는 네덜란드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1907년 헤이그 특사로 이상설, 이준, 이위종이 임명되었으나, 사실 그 전인 1906년에 이미 호머 헐버트가 헤이그 특사로 임명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임무는 각국의 대통령, 수상을 만나고 일본의 불법 행위를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일본도 이 움직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고종 황제에게서 임무를 받은 그가 러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가는 길을 철저하게 감시했습니다.


고종 황제의 특사였으며 한글 띄어쓰기, 쉼표, 마침표를 정한 헐버트(고종 황제의 특사였으며 한글 띄어쓰기, 쉼표, 마침표를 정한 헐버트 [호머 헐버트 헤이그 특사, 헤이그 밀사 사건] / ⓒ Unknown)


그리고 1907년, 이상설을 비롯한 헤이그 특사가 출발했습니다. 일제가 헐버트의 유럽 행에 감시를 집중하느라고 미쳐 그들의 움직임을 파악하지 못한 것입니다. 호머 헐버트 덕에 이준 등의 특사는 무사히 조선을 빠져나갈 수 있었으니, 사실상 헤이그 특사는 4명이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또한 그는 헤이그 평화클럽에서 일본의 침략주의를 비난하는 지원 연설도 했습니다. 그 후 헐버트는 일본의 박해로 한국을 떠나야 했지만, 미국에서도 한국 독립운동가를 지원하며 1945년이 되도록 한국을 도왔습니다.



'헤이그 밀사 사건'이란 대한제국 광무 11년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만국 평화 회의'를 말합니다. 고종 황제가 끝까지 인준하지 않았으니 을사늑약은 분명히 불법적인 사건입니다.

이를 알리기 위해 특사가 파견되어 세계에 알렸으나, 일본의 방해에 의해 국가가 아니니 대표로서 참가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게 됩니다. 이에 이준은 울분을 참지 못해 병환으로 숨졌으며, 일제는 이를 핑계로 고종을 강제 폐위시키고 마지막 황제인 순종을 즉위시키게 됩니다.


네덜란드 헤이그 특사 이상설, 이준, 이위종(네덜란드 헤이그 특사 이상설, 이준, 이위종 [호머 헐버트 헤이그 특사, 헤이그 밀사 사건] / ⓒ Unknown)


그렇다면, 호머 헐버트는 누구일까요? 그는 미국에서 태어났으며 목사의 아들이었습니다. 가정이 모두 선교를 하던 기독교 가문인데, 가훈은 "인격이 승리보다 중요하다."였다고 합니다. 신학교에서 목회자의 길을 가던 그는 1886년 조선으로 가게 됩니다.

대한제국이 최초로 설립한 서양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에 교사로 온 그는 대한제국이 높은 문화유산을 가진 나라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교육만이 조선이 살아날 길이라고 생각하고, 1903년 YMCA 창립에 참여하여 이 단체를 사회 계몽단체로 가도록 방향을 잡아주었습니다.


한국 최초의 서양식 교육기관 육영공원 교사 시절(한국 최초의 서양식 교육기관 육영공원 교사 시절 [호머 헐버트 헤이그 특사, 헤이그 밀사 사건] / ⓒ sen.go.kr)




호머 헐버트의 사회 공헌

그러나, 헤이그 특사에 호머 헐버트라는 외국인이 있었다는 것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입으로만 전해져 오던 <아리랑>, <군밤타령>을 최초로 악보로 만든 인물입니다. 1896년 그가 아리랑의 악보를 만들지 않았다면, 우리는 당시 아리랑의 음률을 정확히 알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목회 일도 맡았던 헐버트 목사님은 1887년 언더우드와 함께 우리나라 개신교 최초의 세례를 준 사람이기도 합니다.


외국인 독립운동가 호머 헐버트 목사님과 그 가족들(외국인 독립운동가 호머 헐버트 목사님과 그 가족들 [호머 헐버트 헤이그 특사, 헤이그 밀사 사건] / ⓒ Unknown)


호머 헐버트는 1889년 최초의 한글 교과서인 <사민필지>를 만들었습니다. 이 책은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 지리 교과서입니다. 또한 그는 '서재필'을 도와서 1896년 최초의 한글신문인 <독립신문>의 창간도 도왔습니다. 이 역시 당시 그가 삼문출판사의 운영을 맡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들입니다.

1905년에는 15년간 연구했던 한국 역사책인 <한국사>를 펴냈고, 1906년에는 <대한제국멸망사>를 펴내서 역사, 문화, 산업 등 근대 한국의 모든 것을 총집대성하여 정리했습니다. 이것은 제대로 된 체계적인 근대사 역사 기록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금속활자, 거북선, 한글 등의 우리 발명품을 세계에 알렸습니다. 당시 세계는 제국주의가 널리 퍼졌기 때문에 미개국을 식민지로 만드는 것을 당연하듯 생각하던 때였습니다. 호머 헐버트가 이런 노력을 한 것은 절대로 우리 민족이 나라를 빼앗길 민족이 아니며, 일본의 침략은 불법적인 것이었음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한국을 현존하는 문자 중 가장 뛰어난 문자라고 주장하고, 1903년 미국에 보낸 보고서에서 한글이 영어보다 우수하다고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주시경'과 함께 한글 표기를 정리하며 띄어쓰기와 쉼표, 마침표를 도입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한글 띄어쓰기, 쉼표, 마침표를 만든 헐버트(한글 띄어쓰기, 쉼표, 마침표를 만든 헐버트 [호머 헐버트 헤이그 특사, 헤이그 밀사 사건] / ⓒ SBS)



호머 헐버트는 헤이그 특사 사건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교육과 사회 공헌, 종교 활동, 독립운동에서도 큰 역할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한국에서 했던 "최초"의 일들은 너무나도 많습니다. 한국에서의 한자 이름은 허흘법(許訖法)입니다. 그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외국인 최초로 건국공로 훈장 태극장을 받았습니다.

그는 석호필(프랭크 스코필드), 배설(어니스트 베델)과 함께 우리나라 광복에 큰 도움을 준 인물로 꼽힙니다. 다시 이런 역사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잊어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


[호머 헐버트 헤이그 특사 공로자 1 - 고종 헤이그 밀사 사건의 외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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