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그 특사 공로자 2 - 호머 헐버트, 내탕금과 외국인 독립운동]
대한제국 말기, 일본은 우리나라 황실의 개인 재산(약 2조 원)을 불법으로 빼앗아 갔습니다. 고종 황제는 외국인 독립운동가 호머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에게 마지막 임무로 이것을 되찾아 오도록 부탁했다고 합니다. 호머 헐버트는 어떤 사람이길래 고종이 이토록 믿었을까요? 한국 이름 허흘법(許訖法)로 살았던 그는 헤이그 특사 사건에서 제4의 밀사로 파견되기도 했고, 광복이 될 때까지 우리나라의 발전과 독립을 위해 최선을 다했던 인물입니다.
한국 대통령을 욕하며 일본 수상한테 사죄한다고 말하는 한국 국민들이 광화문 집회를 하는 시대... 그가 되살아난다면 아마도 눈물을 흘리며 통곡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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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호머 헐버트
미국인 호머 헐버트 목사님은 한국의 광복뿐만 아니라 한글 발전과 교육 발전에도 큰 공헌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1906년 네덜란드로 출발하여, 그 다음 해에 이위종, 이준, 이상설과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에 참여합니다.
그가 했던 임무는 각국의 대통령, 수상 등을 만나서 일본의 불법적인 조선 침략을 고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대한제국을 위한 연설을 했고 글을 썼으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등을 찾아다니며 노력했었습니다.
(그에게 조선 말 고종은 내탕금을 부탁했었다 [호머 헐버트 내탕금과 헤이그 특사 한글 띄어쓰기] / ⓒ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그가 고종의 큰 믿음을 받게 된 것은 참 눈물겹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에서 교사를 하던 그는 기울어 가는 조선의 멸망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었습니다. 1895년 일본이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일으킨 뒤, 고종은 큰 충격을 받고 흔들렸습니다.
이때부터 그는 고종의 신임을 받기 시작합니다. 고종 황제를 암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침실 근처에서 지키기도 하고, 권총을 품고 경호하기도 했었습니다.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기 전, 호머 헐버트는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를 만나러 미국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일본과 더러운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으려던 중이었습니다. 가쓰라-태프트 조약의 뜻은 조선을 일본에게 주는 대신, 필리핀을 미국의 식민지로 하겠다는 비밀조약입니다.
루스벨트는 계속 만나지 않고 일정을 미루다가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이루어진 뒤에야 만나줬습니다.
(한국의 독립운동가 헐버트 목사님의 가족들 [호머 헐버트 내탕금과 헤이그 특사 한글 띄어쓰기] / ⓒ mehansa.com)
호머 헐버트는 조선이 망해가는 시점에서 일제 통감부를 찾아가 항의하는 등 한국인을 돕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일본인들에게 부동산을 빼앗길까 봐 겁낸 조선인들이 헐버트의 이름으로 명의 이전해서 도와달라는 부탁을 하자 들어줬으며, 일본인이 '경천사 10층 석탑'을 훔쳐 가자 외국 신문에 고발해서 되찾아 오는 등의 도움도 줬습니다.
또한 항일투쟁 영문 외국어 월간지인 <한국평론>을 창간해서 한국의 억울함을 외국에 소개하고 도움을 부탁하기도 합니다.
(한국인의 뛰어난 민족성와 우수한 문화를 소개했던 글 [호머 헐버트 내탕금과 헤이그 특사 한글 띄어쓰기] / ⓒ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마지막 임무, 고종의 내탕금
대한제국은 1910년 '한일병합조약'으로 결국 나라를 빼앗깁니다. 그러나 그 한 해 전인 1909년, 우리 역사에는 첩보 영화에 버금가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황제에서 강제로 쫓겨나 순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고종이 내린 마지막 임무이기도 합니다. 호머 헐버트의 내탕금 찾기 작전은 고종의 피 맺힌 부탁으로 시작됩니다. '내탕금' 뜻은 대한제국 황실의 개인 재산을 말합니다. 조선의 왕들은 이 내탕금을 이용해서 상금을 내리거나 백성 돕기, 왕족 행사에 사용했었습니다.
(상하이 덕화은행의 고종 내탕금을 위임받았다는 증명 [호머 헐버트 내탕금과 헤이그 특사 한글 띄어쓰기] / ⓒ chosun.com)
고종 황제는 중국 상하이 은행에 내탕금을 맡겼었습니다. 그는 이 돈이 나중에 독립자금으로 쓰이리라 생각하고 호머 헐버트를 불러서 미국 은행으로 옮겨 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현재 가치로는 약 2조 원 정도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이 아직 엄연한 독립국가인 대한제국의 왕실 재산을 이미 1908년에 몰래 인출해간 뒤였습니다. (이 돈은 일본의 국제 강도 사건이므로 이자까지 쳐서 다시 받아내야 한다는 주장이 지금도 제기되는 중입니다)
우리가 나라를 빼앗긴 뒤, 일제의 박해로 인해 미국으로 쫓겨난 호머 헐버트는 미국에서도 조선독립을 위해서 도와주었다고 합니다. 출판과 연설을 통해서 일본의 잔악함을 알렸으며, 한편으로는 우리 독립운동가들에게 도움을 주며 끝까지 광복을 응원하였습니다. 그리고 1945년 대한민국이 광복을 맞는 해에 그는 진정으로 기뻐하며 조용히 잊혔습니다.
그가 다시 한국인에게 기억된 것은 1949년 광복절 기념식 때였습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그를 한국으로 초대했던 것입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이승만의 초대로 한국에 왔다가 그대로 한국에 묻혔다 [호머 헐버트 내탕금과 헤이그 특사 한글 띄어쓰기] / ⓒ Unknown)
1863년생인 그의 나이는 벌써 86세가 된 때였습니다. 이미 병약한 상태에서도 한국을 그리던 그는 기쁘게 배를 탔지만, 이것은 잘못된 선택이었습니다. 한 달이나 걸려서 배를 타고 온다는 것은 그의 체력에서 이미 큰 무리였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한국 도착 1주일 만에 죽고 맙니다.
생전에 그는 미국의 국립묘지보다는 한국 땅에 묻히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하던 그였기에, 그의 시신은 양화진의 외국인묘지에 묻혔습니다. 그리고 1999년, 김대중 대통령의 친필로 묘비명도 새겨 넣었습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말했습니다. 한국의 통일과 내탕금을 찾는 것이 소원이라고...
[헤이그 특사 공로자 2 - 호머 헐버트, 내탕금과 외국인 독립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