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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포로 장무환과 대사관녀 사건 - 국군포로 탈북과 송환 문제

키스세븐지식 2021. 5. 13.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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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관녀 사건과 장무환 국군 포로 ⓒ SBS

 

장무환

​국군포로와 대사관녀 사건

2006년 대사관녀 사건으로 전 국민이 분노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8년 전인 1998년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해 국군포로 장무환이 탈북해서 송환하였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도움을 받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죽을 고생을 하고 온 것입니다.

 

이 문제를 통해서 우리는 잊었던 국군 포로 문제를 다시 생각해야 할 시점입니다. 국가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사람들을 잊지 않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또한 국민을 포기하지 않는 정부의 역할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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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포로 장무환과 대사관녀 사건 - 국군포로 탈북과 송환 문제]

북한 국군포로 장무환

[생전의 장무환] 국군포로 장무환과 대사관녀 사건 - 국군포로 탈북과 송환 문제 / ⓒ SBS

전쟁 이후의 포로들은 되돌려 주어야 하고, 또한 되돌려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국가가 그 일을 제대로 못 해서 수십 년이나 강제 노역에 시달리며 억류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6.25 때의 국군 포로가 바로 그들입니다.

 

국군 포로 중 한국으로 살아 돌아온 수는 극히 적고, 그 과정도 매우 험난합니다. 그중에서, 45년이나 북한에 억류되어 모진 고생을 하다가 탈출한 '장무환' 사건은 "대사관녀 사건"으로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금화전투(금성전투) 위치 지도] 국군포로 탈출, 탈북 - 대사관녀 사건과 장무환 국군 포로 / ⓒ kakao.com

한국전쟁(6.25 전쟁) 당시 장무환은 20대 후반이었습니다. 휴전 협정을 마무리 짓기 위해 치열한 막판 전투를 하고 있던 그때, 5개월 된 아기와 아내까지 둔 그는 ​3사단 22연대에서 복무 중이었습니다.

 

1953년 7월 13일, 강원도 금화전투에서 중공군과 전투를 벌이던 중, 그는 포로로 잡히고 말았습니다. 휴전일이 7월 27일이었으니, 운이 없어도 너무 없었던 것입니다. 부상으로 병원에 실려 갔는데, 거기에서 전쟁이 끝났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국군 포로의 비참한 삶

[포로교환 당시] 국군포로 장무환과 대사관녀 사건 - 국군포로 탈북과 송환 문제 / ⓒ 국방부

비극의 시작은 남측 포로 귀환에 포함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기록으로 볼 때, 당시 한국으로 되돌아온 국군 포로는 8천여 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 외의 약 6만 명이 북한에 억류되었습니다. 그중 2만 7천여 명은 북한군에 배치 당했습니다.

 

휴전 협정 자체가 연합군-북한의 체결이었기에, 한국이 끼어들 틈이 없었습니다. 거기다가 전체 교환을 주장하던 북한에 대해, 이승만이 자의적으로 남쪽의 반공포로를 석방하는 바람에 일이 복잡해졌습니다. 그러자 김일성도 되돌려 보낼 생각이 없었습니다.

[북한의 강제 노역] 국군포로 탈출, 탈북 - 대사관녀 사건과 장무환 국군 포로 / ⓒ Unknown

국군 포로들이 북한군에 배치되었다지만 사실상 강제 군역이었습니다. 제대한 후에는 함경북도 상하탄광, 아오지탄광 등에 보내져서 강제 노역을 당했습니다. 이곳은 인권 유린의 만행이 있는 곳입니다.

 

허구한 날 갱도가 무너지고 폭발사고가 나다 보니 죽어 나가기 일수였습니다. 증언에 의하면 은퇴 나이인 60살도 채우지 못하고 죽는 사람의 수가 20%나 된다는 곳입니다. 북한은 출신성분 사회이기 때문에 자식들도 같은 처지가 되었습니다. 평생 괴뢰군의 자식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습니다.

 

 


국가에게 버려진 사람들

[사망 처리] 국군포로 장무환과 대사관녀 사건 - 국군포로 탈북과 송환 문제 / ⓒ KTV

​남한에서도 그들은 버려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남북이 대치된 상황에서 이산가족 상봉도 어렵다 보니, 그들까지 챙겨 주는 정부는 없었습니다. 끝까지 생포된 자국 국민을 데리고 가는 다른 나라에 비해서 노력이 부족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결국 한국은 이들을 해방 불명자로 방치했다가 1998년 모두 전사 처리해버렸습니다. 이들의 위패는 동작동 국립묘지에 모셔졌으며, 장무환 역시 죽은 사람이 되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사망자 조회] 국군포로 탈출, 탈북 - 대사관녀 사건과 장무환 국군 포로 / ⓒ KBS

한편, 이때 북한의 장무환은 탈북을 결심했습니다. 북에서 재혼한 아내가 죽자 1998년 두만강을 건너서 중국으로 탈출했습니다. 그는 경북 울진에 살던 남한의 아내와 자식들에게 연락했습니다. 죽은 줄 알았던 그의 소식에 모두들 놀랐습니다.

 

공식적으로 귀환할 수는 없는 일이라, 한동안 중국에서 머물러야 했습니다. 여기에 SBS 방송사와 연락이 되어, 국군 포로의 탈북과 귀환 과정을 기록으로 담으려던 방송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장무환과 대사관녀 사건​

[대사관녀 사건 당시 방송] 국군포로 장무환과 대사관녀 사건 - 국군포로 탈북과 송환 문제 / ⓒ SBS

1998년, 남북한의 정부 모두에게 버려졌던 장무환은 자력으로 북한을 탈출한 후 중국 주재 대사관에 전화를 걸어서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온 국민이 분노했던 국군포로 장무환과 대사관녀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아래는 당시 통화내용입니다.

 

대사관녀: 말씀하세요.
장무환: 난, 국군 포로 장무환인데..
대사관녀: 네.. 그런데요.
장무환: 장무환인데…. 거기서 좀 도와줬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게 아니라..
대사관녀: 여보세요. 무슨일로 전화하셨죠?
장무관: 한국대사관 아닙니까?
대사관녀: 맞는데요.
장무환: 맞는데, 다른게 아니라 내가 중국에 지금 와 있는데 좀 도와줄 수 없는가 이래서 묻습니다.
대사관녀: (한숨을 내쉬며) 없죠.
장무환: 북한사람인데…. 내가..
대사관녀: 아, 없어요! (전화를 끊는다)
장무환: 국군포론데....​

[대사관녀 사건 방송] 국군포로 탈출, 탈북 - 대사관녀 사건과 장무환 국군 포로 / ⓒ SBS

이 일은 1998년에 방송이 되었으나 그때는 크게 이슈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 후 2006년 특집 방송으로 다시 공개되면서 온 국민이 큰 충격을 받은 발언 내용입니다. 장무환 국군포로와 대사관녀 사건은 외교부에 대한 비난으로 빗발쳤습니다.

 

돌아오겠다던 우리 국민에 대해 차가운 냉대를 보내고 냉정하게 전화를 끊은 대사관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무 제재가 없었습니다. 당시 그녀는 본부에서 파견된 직원이었으며, 2006년 방송 때는 8년이나 지난 후여서 이미 퇴사했다고 합니다.

 

 


국군 포로 배상

[국군포로 장무환 방송] 국군포로 장무환과 대사관녀 사건 - 국군포로 탈북과 송환 문제 / ⓒ KBS

방송국의 도움 속에 장무환은 중국 대련발 대인호편으로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무려 45년 만에 돌아온 것입니다. 북한에 억류되었던 국군포로가 귀환한 것은 1994년 조창호, 1997년 양순용 이후 세 번째였습니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그해 말, 소속되어 있던 부대에서 면역식을 치렀습니다. 무려 45년 만에 전역식을 하고 군대를 제대한 것입니다. 이후 그는 고향인 경북 울진군 매화면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신고센터가 있다] 국군포로 탈출, 탈북 - 대사관녀 사건과 장무환 국군 포로 / ⓒ KTV

당시 장무환은 그동안 밀린 급여와 정착금 등으로 6400여만 원을 지원받았습니다. 45년 3개월의 군대 월급 2백 17만 원과 주거지원비 6천2백만 원을 받은 것입니다. 이 수치를 보면 그동안 우리 군대의 남성들이 얼마나 저급의 대우를 받으며 군 생활을 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45년인데 겨우 2백만 원이었으니...

 

장무환과 대사관녀 사건으로 정신을 차린 정부는 "국군포로 대우 등에 관한 법률"을 시행하여 월급 1억5천만 원과 아파트 및 특별지원금 2억5천만 원을 받을 수 있게 법을 마련했습니다. 이 법은 2020년 6월부터 시행되었습니다.

 

 


45년 만에 돌아온 장무환​

[북한 탄광] 국군포로 장무환과 대사관녀 사건 - 국군포로 탈북과 송환 문제 / ⓒ voakorea.com

장무환의 증언에 의하면, 북한에서 70여 명의 국군 포로를 만난 것이 있으며, 이들 가운데 40명은 이미 숨졌고 30명 정도가 살아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의 행적이 확인되면 국가유공자 지위를 가질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국 기록으로는 1998년 사망 처리되었기 때문에, 기록상 죽은 후 태어난 북한의 가족들은 자식으로 인정받지 못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비극이 계속 비극을 낳을 뿐입니다.

[장무환 별세] 국군포로 탈출, 탈북 - 대사관녀 사건과 장무환 국군 포로 / ⓒ KBS

이후 2015년 장무환은 사망했습니다. 생존하여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대사관녀 사건 등 국가의 문제점이 고스란히 드러났습니다. 한국은 북한에 대해 국군 포로 귀환에 적극적이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보수 정부든 진보 정부든 마찬가지였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북한은 이승만이 전향 포로를 석방했듯이, 그들도 전향했으므로 그럴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북한에 남겨진 국군포로와 그 가족은 괴뢰군이라는 딱지를 붙인 채, 현대판 신분 제도로 인간 이하의 삶을 살고 있으니 한탄스러운 일입니다. 아직도 500명 정도는 살아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는 것도 알아 둡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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