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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한 지식 칼럼/역사&사건

광복과 우키시마호 침몰사건 - 일본 대학살 만행 1

2019. 8. 15.

[광복과 우키시마호 침몰사건 - 일본 대학살 만행 1] 

한국과 일본의 갈등에는 진정한 사죄가 있었냐는 것이 있습니다. '고노 담화' 등에서 잘못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문제는 일본에 보수주의가 득세할 때마다 손바닥 뒤집듯이 반성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한국인들은 진정성을 못 느끼고, 일본인들은 또 사과하냐는 반응을 보입니다. 

그러나 진짜 피해자인 일제의 강제징용자들에 대한 역사는 기억에서 지워지고 있습니다. 광복이 왔어도 우키시마호 침몰사건으로 죽어간 이들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반성하지 않는 일본이 대학살의 만행을 저지른 역사를 되짚어 봅니다. 





우키시마호 침몰사건의 미스터리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하고 나서 9일 후인 24일, 수천 명의 한국인이 탄 배 '우키시마호' 침몰사건이 있었습니다. 눈으로도 '마이즈루' 항을 볼 수 있는 거리인 500미터 거리의 해상에서 지옥 같은 대학살이 벌어진 것입니다. 

사실 이 배는 부산으로 갈 예정이었습니다. 일본 해군의 수송선 우끼시마호는 갑자기 항로를 바꾸고 멈춰 서더니 폭발 소리와 함께 두 동강이 나버렸습니다. 그 후 일본은 미군의 기뢰 때문이라는 발표를 했습니다. 


사진: 1945년 5천 명의 한국인이 피해를 당한 우키시마호(1945년 5천 명의 한국인이 피해를 당한 우키시마호 [광복 우키시마호 침몰 사건 일본 대학살 만행 폭침 폭발] / ⓒ Ogiyoshisan)



그렇게 27년 동안 잊혔던 우키시마호 폭침사건은 양심 있는 시민단체의 도움으로 겨우 세상에 공개됩니다. 어린이 56명을 포함하여 524명이 죽었다는 명단이지만, 실제로는 승선 명단을 적지도 않던 무책임한 귀국선이었습니다. 오백여 명의 명단도 징용 명부에 있는 것을 보고 베낀 것이 많았습니다. 

일본인의 피해는 25명... 실제 일본 승무원인 250명은 사고 전에 미리 대피한 것으로 보입니다. 패전 후, 갑자기 부산으로 출발하는 명령을 받은 이 배에는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요? 




배에 탄 많은 수의 한국인들은 일본 해군기지와 인근 작업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었습니다. 일부는 돈을 벌려고 간 사람도 있었지만 강제 징용으로 끌려온 노동자가 더 많았습니다. 

일본의 대학살 만행은 왜 일어났을까요? 해군기지의 기밀유지를 위해서? 일본 만행을 숨기려고? 아니면 한국인의 폭동이 우려되어서? 실제로 8월 18일 사할린에서 퇴각하던 일본 해군이 한국인을 무차별 학살하는 조선인섬멸 작전이 있었으니, 우키시마호 침몰사건은 의심이 가는 부분입니다. 


사진: 우키시마호의 실제 항로와 예정 항로(우키시마호의 실제 항로와 예정 항로 [광복 우키시마호 침몰사건 일본 대학살 만행 폭침 폭발] / ⓒ Valentim, www.kiss7.kr)




광복과 우키시마호 일본 대학살 만행 


그들이 일한 시모키타반도의 '오미나토'항은 북방 방어용 일본 해군사령부가 있던 곳입니다. 3천여 명의 자유노동자와 4천여 명의 강제징용자는 광복을 맞아 만세를 부르며 일본인 감독관에게 저항을 했습니다. 그들은 해군기지에서 조선인들이 불온한 조짐을 보인다는 보고를 올렸습니다. 

그렇게 8월 22일 출항한 우끼시마호는 4730톤에 길이가 108미터도 넘는 대형 화물선이었습니다. 탑승한 일본 병사는 부산에 가면 포로가 된다며 항명 소동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사진: 우키시마호 폭침폭발 사건의 KBS 자료화면(우키시마호 폭침폭발 사건의 KBS 자료화면 [광복 우키시마호 침몰사건 일본 대학살 만행 폭침 폭발] / ⓒ KBS)



일본이 축소 기록한 인원은 3700여 명, 한국의 추산 인원은 약 7천 명이나 됩니다. 당시 증언자에 의하면 비좁게 꽉꽉 채워졌으므로 8천 명이 탔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국 측에서는 우키시마호 침몰사건의 희생자가 5천 명은 됐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들 강제 징용자, 자유노동자들은 부산으로 귀국을 시켜준다는 말에 배를 탔습니다. 한편으로는 귀국하는 마지막 배라면서 억지로 태웠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이 배를 안 타면 귀국할 기회가 없는 말도 했다고 합니다. 이상하다는 소문이 돌아서 배를 안 타려는 한국인도 있었습니다. 




광복 후 우키시마호가 마이즈루 항에 간 이유는 운항금지 명령 때문이었습니다. 8월 24일 연합군은 100톤 이상의 배는 인근 항구로 이동하도록 명령했습니다. 배는 마이즈루 항이 보이는 몇 백 미터 앞에서 천천히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폭발음이 크게 들린 후 배가 둘로 갈라지며 우키시마호 침몰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폭발에 튕겨 나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살기 위해 바다로 뛰어내렸습니다. 바다는 배의 기름 탱크가 파손되어 기름으로 덮여 있었습니다. 


사진: 실제 모습과 모형 비교(실제 모습과 모형 비교 [광복과 우키시마호 침몰사건 일본 대학살 만행 폭침 폭발] / ⓒ enha.xyz)



10cm 정도의 중유가 덮인 바다는 아비귀환이 되었습니다. 물속의 사람들이 물 위로 올라와도 기름에 덮여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눈도 못 뜨고 엉켜서 서로 잡아당기느라고 물에 빠져 죽는 사람이 속출했습니다. 

해변에는 사람들의 시체가 쌓이고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들은 가족을 찾느라고 시체를 뒤지며 목 놓아 울었습니다. 일본 때문에 강제 노동 속에서 힘들게 살던 사람들은 광복이 왔어도 우키시마호 폭침사건으로 바다에 수장되었던 것입니다. 


(우키시마호 폭침사건 실화에 대한 2편에 연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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