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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한 지식 칼럼/역사&사건

최운산 장군 -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의 숨겨진 영웅

2019. 7. 28.

[최운산 장군 -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의 숨겨진 영웅] 

약 100년 전, 우리는 일본과 항일전투를 벌이고 있었고, 아직도 일본과의 총성 없는 전쟁은 계속되는 중입니다. 1920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는 한국 독립군에게 값진 승리였습니다. 우리는 봉오동 전투라면 홍범도 장군, 청산리 전투라면 김좌진 장군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최운산은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를 가능하게 한 숨은 영웅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아직도 친일자들이 판을 치는 현재의 대한민국에서 최운산 장군의 의미를 살펴봅니다.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의 최운산 


1920년 6월 4일, '삼둔자 전투'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한국 독립군이 국내 침공을 위해 준비하던 중 일본군을 선제공격한 사건입니다. 중국 분간도에서 출발한 '홍범도', '최진동'의 1개 소대와 신민단 소속 독립군 1개 소대가 함경북도 종성군의 일본군을 습격했습니다. 

이에 일본군 추격대대가 중국 땅까지 침범하였지만 독립군을 발견하지 못하자 양민을 학살했고, 일본군은 제19사단의 병력을 동원하여 추격전에 나섰습니다. 


사진: 현지 중국에 남아 있는 봉오동전투 유적지(현지 중국에 남아 있는 봉오동전투 유적지 [최운산 장군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영웅 독립군] / ⓒ 독립기념관)


6월 7일, 이 전투는 '봉오동 전투'로 연결됩니다. '대한군북로독군부'의 홍범도 장군, 최진동 장군 안무 장군 등은 '신민단'의 이흥수 장군 등과 연합하여 중국 지린성 허룽현에 있는 '봉오동'에서 매복했습니다. 그리고 포위했던 일본군을 유인하여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봉오동 전투 당시 병력은 일본군 500여 명, 독립군 1000여 명이었습니다. 

결국 일본군은 157명 사망, 300여 명 부상을 당했지만, 독립군은 4명 전사, 2명 중상으로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10월 21일, 그리고 이 부대가 '김좌진' 장군, '이범석' 장군의 '북로군정서군'과 연합해서 '청산리 전투'로 연결됩니다. 봉오동 전투에서 패한 일본군이 복수를 하려고 '훈춘 사건'을 날조한 후 대규모 부대를 투입해서 추격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최운산 장군입니다. 그는 참모장의 역할을 했고 군사정보와 행정 및 재정을 맡았지만, 그가 있었기에 이런 전투들이 가능했습니다. 


사진: 왼쪽부터 김좌진, 최운산, 홍범도 장군(왼쪽부터 김좌진, 최운산, 홍범도 장군 [독립군 최운산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영웅] / ⓒ 국가보훈처)


최운산 장군은 한 명이지만 8명이었습니다. 그가 최명길, 최풍, 최만익, 최문무, 최빈, 최고려, 최복이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무장투쟁을 할 때, 러시아의 무기를 밀매할 때, 첩보활동을 할 때 그는 다른 사람으로 위장해서 활동했습니다. 

최진동, 최운산, 최치흥 삼 형제는 무장 독립투쟁을 하기 위해 중국군에 입대했었는데, 그 후 동삼성 일대의 지적 정리 과정에서 엄청난 황무지를 헐값에 받게 되면서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최운산 장군, 최고 갑부에서 비참한 죽음으로 


최운산이 봉오동 전투와 관련이 생긴 것은 '경술국치' 이후 온 가족이 봉오동으로 이주해서 한인촌을 건설하면서부터입니다. 그는 1915년 봉오동의 뒷산을 개간해서 연병장과 막사를 지어 독립군부대의 모체가 될 자위대를 창설했습니다. 

그 후 정식으로 '군무도독부'를 창설하고 형인 최진동이 사령관을 맡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1920년, 만주에 흩어져 있던 독립군을 통합하여 '북로독군부'를 만들고 모든 재정적 지원을 맡기로 합니다.

사진: 전 재산을 바치고도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전 재산을 바치고도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 [최운산 장군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영웅 독립군] / ⓒ 편집 www.kiss7.kr)


최운산이 이렇듯 매우 많은 자금을 투입할 수 있었던 것은 간도에서 최고의 부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축산, 쌀, 성냥, 비누 공장까지 운영했는데, 그의 손녀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그가 가진 땅이 부산 면적의 6배에 달했다고 합니다. 

북간도에도 '최재형'이라는 갑부가 독립군을 지원한 큰 공을 세웠는데, 최운산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3.1 운동에 자극받은 그는 국내 침공으로 나라를 되찾고 싶었다고 합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봉오동 전투도 최운산의 첩보활동을 통한 작전계획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이전부터 그의 땅은 독립군의 무장훈련 장소로 제공되었으며 전투에 필요한 무기, 식량, 군복 등은 모두 그의 자금이었습니다. 

지금 가치로 따지만 150억 원에 이르는 군자금을 지원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 후에도 전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쓰고 형편이 어려워진 뒤 쓸쓸히 죽었으며 그의 자손들도 어렵게 산다고 합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사진: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지도(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지도 [독립군 최운산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영웅] / ⓒ baidu map / 편집 www.kiss7.kr)


그는 일본 경찰서 습격과 군자금 모금, 창씨개명 거부 등으로 여섯 번이나 옥고를 치렀고, 우수리강 전투, 나자구 전투, 대황구 전투, 도문대 전투, 안산리 전투 등에 참전했습니다. 그리고 1945년 광복을 불과 40여 일 앞두고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는데, 중국 공산당은 거대 지주였다며 핍박을 했고 친일파가 살아남은 한국은 광복 후 30여 년 동안 모른 척하고 있었습니다.. 

친일파의 후손은 떵떵거리고 독립운동가의 자손은 비참하게 산다는 말처럼, 봉오동 전투의 최운산의 후손들도 조선족으로 살다가 귀환하여 연금으로 겨우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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