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 방화 사건
복원 비용과 방화범 채종기 근황
2008년 숭례문 방화 사건은 국보 1호인 숭례문이 방화로 인해 소실된 사건으로, 범인인 채종기는 토지 보상 문제에 불만을 품고 범행을 저질렀습니다. 무리하게 토지보상 돈을 요구하다가 이게 안 되자 문화재에 화풀이한 것입니다.
이후 숭례문 방화범 채종기의 근황은 나이 80이 넘어서 현재 출소한 상태입니다. 숭례문 화재 사건의 과정과 범행 원인, 채종기라는 인물은 누구인가, 그 과정과 배경, 그리고 문제점에 대해서 정리하고 설명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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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 방화 사건 - 숭례문 방화범 채종기 범행과 근황, 복원 비용
610년의 역사가 사라진 사건
2008년 2월 10일 저녁 8시 50분경 대한민국 국보 1호 숭례문에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택시 기사의 신고로 소방관들이 출동했지만, 숭례문은 5시간 만에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방화범 채종기는 토지 보상금에 불만을 품고 숭례문에 불을 질렀다고 자백했습니다. 채종기는 2006년에도 같은 이유로 창경궁에 불을 지른 전과가 있었습니다.
경찰은 사건 발생 후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방화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수사를 시작했습니다. 2008년 2월 10일 저녁 숭례문에 불이 난 직후, 택시 기사 이 씨는 한 남성이 숭례문 계단을 오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1층과 2층 사이에서 연기가 나는 것을 목격했다고 진술했습니다.
또 다른 목격자들은 5~60대로 보이는 흰머리 남성이 흰색 항공 점퍼를 입고 가방을 메고 휴대용 철제 사다리를 이용해 숭례문에 침입하는 것을 봤다고 진술했습니다. 경찰은 숭례문 1층에서 발견된 일회용 라이터 2개와 불에 탄 나뭇조각 등을 단서로 방화 가능성을 더욱 강하게 의심했습니다.
숭례문 방화 사건
이후 경찰은 2006년 창경궁 문정전 방화 사건과 동일한 수법으로 숭례문에 불을 지른 혐의로 용의자 채 씨를 체포했습니다. 범인 채종기는 2008년 당시 68세 남성으로, 점을 치는 일을 하는 철학관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 있는 땅이 재개발에 포함될 때, 지나친 돈을 요구하다가 사업 대상에서 제외됐다고 합니다.
건설 회사는 토지와 건물 가격에 대한 감정 평가를 기준으로 9,680만 원을 제시했지만 채 씨는 4~5억 원을 요구하며 항의했습니다. 결국 소송에서 패소하여 1억 5천만 원으로 합의를 했지만, 채 씨는 이에 불복하고 다시 항의하다가 건물이 강제 철거되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사회에 대한 불만과 분노가 극에 달해 숭례문을 방화 대상으로 삼은 것입니다. 채 씨는 이미 2006년 4월에도 토지 보상 문제로 창경궁 문정전에 불을 질러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 유예 2년, 추징금 1,300만 원을 선고받았습니다. 숭례문 방화 당시 그는 집행 유예 기간 중이었습니다.
숭례문 방화 사건 범인 채종기
채종기는 2008년 2월 10일, 숭례문 방화 사건 당일 전처가 살고 있는 강화도에서 출발하여 고양시청과 서울시청을 거쳐 오후 8시 45분경 숭례문에 도착했습니다. 채 씨는 경복궁을 방화 대상으로 고려했지만 사람이 많아 불을 지르기 어려울 것 같아 숭례문으로 목표를 변경했습니다.
그는 숭례문 좌측(서쪽)으로 올라가서 미리 준비해 온 접이식 알루미늄 사다리를 이용하여 숭례문 내부로 침입했습니다. 채 씨는 숭례문 2층 누각으로 올라가 1.5리터 페트병 3통에 담아 온 시너 중 1통을 바닥에 뿌리고 일회용 라이터로 불을 질렀습니다. 범행 후에는 접이식 사다리와 라이터, 배낭을 현장에 그대로 두고 숭례문을 빠져나왔습니다.
숭례문에서 나온 후, 채 씨는 택시를 타고 서울역으로 이동하여 지하철을 타고 아들이 거주하는 일산으로 갔습니다. 다음 날 아들 집에서 나와 버스를 타고 강화도에 있는 전처 집으로 갔으며, 그곳에서 경찰에 검거되었습니다. 체포된 그는 "뉘우치고 있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숭례문 복원 비용
숭례문의 역사적 가치는 조선 시대 서울 도성의 정문이자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1398년 태조 7년에 처음 완성된 숭례문은 세종 30년인 1448년에 다시 지어졌고, 이후 1961년에서 1963년 사이에 해체 및 수리를 거치면서 성종 10년(1479년)에도 큰 공사가 있었음이 밝혀졌습니다.
숭례문은 일제강점기 시대에는 '남대문'으로 불리며 일본 제국에 의해 숭례문과 연결된 성곽이 헐리고 주변에 도로와 전차길이 생기는 등 훼손을 겪었습니다. 2008년 방화로 큰 피해를 입었지만, 5년 2개월에 걸친 복원 공사 끝에 2013년 5월 4일 다시 공개되었습니다.
숭례문 복원에는 국민 혈세 225억 원이 투입되었습니다. 단 한 명의 다혈질 이기주의자가 벌인 일입니다. 주변의 다혈질 성격은 이처럼 위험합니다. 그런데, 복구 과정에서 복구자가 부당하게 돈을 빼돌린 혐의가 드러나서, 정부에 14억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이 있기도 했습니다. 역사의 비극은 다혈질과 이기심에서 시작됩니다.
숭례문 방화범 채종기 근황
체포된 채종기는 “창경궁 문정전 방화는 내가 한 게 아니다”라며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 강제로 처벌을 내린다는 것이 가장 억울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채 씨는 “나도 마음이 아프다. (숭례문이) 그렇게 다 타버릴 줄은 몰랐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인명피해는 없었다. 복원하면 되지 않냐"고 해서 공분을 샀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열차 전복 등 대중교통수단을 대상으로 한 테러도 고려했던 사실도 드러났습니다. 결국 채 씨는 문화재보호법 위반으로 징역 12년형이 구형되었으며 1심 판결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는 형이 과중하다며 항소했지만, 2009년 8월 31일 서울고등법원은 항소를 기각했습니다.
결국 징역 10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하여 복역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채종기는 2018년 2월에 만기 출소했습니다. 채종기는 2010년 2월, 숭례문 방화 사건으로 복역 중 처음으로 가진 인터뷰에서 2년 전 사건에 대해 "내가 그때 바보짓을 했다"며 후회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 이후의 소식은 더 이상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문화재 보호와 방재 시스템
숭례문 화재 이후 대한민국은 문화재 보호에 대한 관리가 강화되었습니다. 숭례문 화재가 발생한 2월 10일을 '문화재 방재의 날'로 지정하여 문화재 보호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화재 예방 및 대응 훈련을 강화했습니다. 화재 이전에는 숭례문의 방재 시스템은 겨우 소화기밖에 없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진압 당시 전통 목조 건축물의 구조적 특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초기 진화에 실패했다는 지적이 제기되면서 목조 문화재 방재 시스템을 구축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16억 원의 예산을 투입하여 MAN TGS 차대 무인 파괴 방수탑차를 도입하게 됩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2023년 12월 경복궁 낙서 테러 사건이 발생하면서 문화재 범죄에 해대 더욱 엄한 처벌이 요구되었습니다. 수백 년의 역사를 단 몇 분의 나쁜 짓으로, 그것도 5천만 명의 재산을 단 한 두 사람이 망치는 일이 계속되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610년의 역사를 가진 숭례문이 단 5시간 만에 역사상에서 사라진 사건은 꼭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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