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방해 작전
북한과 서울 올림픽 게임
냉전이 무너지기 직전의 1980년대, 서울에서는 올림픽이 열릴 예정이었습니다. 이것은 북한에게 굴욕적인 패배였습니다. 그래서 북한은 88서울올림픽 게임을 방해하기 위해 온갖 방해작전을 해댔습니다.
이 글에서는 당시 북한의 불안감과 각종 방해작전, 그리고 서울올림픽이 어떤 성공을 했는지와 KAL기 테러사건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설명합니다. 잘 몰랐던 역사의 뒷이야기와 그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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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서울 올림픽 게임 북한의 방해 공작의 전말
북한의 불안감과 공동개최 요구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북한은 행사를 무산시키기 위해 다양한 외교적 방해 공작을 펼쳤습니다. 서울에서의 올림픽 개최에 대해 북한은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올림픽 개최를 막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특히 김정일은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가 국제 사회에서 남한의 위상을 높이고 북한 체제의 우월성을 훼손할 것을 우려했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공동개최였습니다.
북한은 서울 올림픽의 여러 종목을 북한에서 개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국제 사회에 분산 개최를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요구는 국제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북한은 특히 김정일이 이에 대해 크게 분노했습니다. 북한은 올림픽을 공동 개최하거나, 최소한 몇몇 종목을 북한에서 개최할 것을 요구하며 국제적인 압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는 국제 올림픽 위원회 (IOC) 와 국제 사회의 지지를 얻지 못했습니다. 북한의 요구가 거부되자, 김정일은 극심한 분노를 표출하며 올림픽 방해 공작을 지시했습니다.
북한의 서울올림픽 방해 작전
북한은 서울 올림픽 개최를 막지 못하면 스포츠를 넘어서, 공산국가들이 대한민국을 인정하는 정치적인 상호 인정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했고, 이를 막기 위해 엄청난 외교전을 펼쳤습니다.
이것은 서울 올림픽이 공산주의 진영의 분열을 가속화하고 남한과의 정치적, 외교적 격차를 더욱 벌릴 수 있다는 걱정을 가지게 하는 결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남한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는 진보주의화 된 국민들이 민주화 요구를 하며 군부 보수주의 정부에 대항하던 시기였습니다. 군부에서는 계엄령 등으로 국민을 무력 진압하려던 움직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그러지 못한 것은 곧 있을 86 서울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게임 때문이었습니다. 전 세계가 한국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소련과 중국은 이미 개혁개방 정책으로 변화하고 있었고, 올림픽을 통해 공산주의 국가들이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려 했습니다. 그래서 북한의 노력은 성과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굴욕적인 북한 외교
북한은 올림픽 개최를 방해하기 위해 여러 나라를 방문하여 서울 올림픽 참가를 거부하도록 설득했습니다. 특히, 당시 IOC 위원장이었던 사마란치와 친분이 두터웠던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에게 올림픽 불참을 설득하려 했습니다. 북한은 또한 사회주의 국가들을 설득하는 데 주력했지만, 이들 국가들은 소련의 눈치를 보며 북한의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결국 북한은 아프리카 국가들을 대상으로 경제적 지원을 약속하며 올림픽 불참을 설득했습니다. 마다가스카르는 북한의 요청대로 88서울올림픽에 참가하지 않는 대신, 대통령궁 건설을 지원해 달라고 사적은 요구를 했습니다. 결국 김일성은 그 요구를 들어주고 돈까지 보내줬습니다.
세이셸도 1988 올림픽 불참을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해군과 공군 지원을 조건으로 했고, 결국 김일성은 그들의 요구대로 어뢰정 등 해군 자산과 미그기 등 공군 자산을 보내야 했습니다. 이에 따라 쿠바, 니카라과, 알바니아, 에티오피아, 마다가스카르, 세이셸 등 6개국이 서울 올림픽에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성공한 88서울올림픽
그러나 대부분의 국가들은 서울 올림픽에 참가했으며, 북한의 외교적 방해 공작은 궁극적으로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한국은 80년대 후반 경제 성장을 이루면서 북한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고, 국제 사회에서 북한의 영향력은 약해지고 있었습니다.
북한은 올림픽 개최를 막기 위한 외교적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자,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한 테러를 시도했습니다.
결국 1987년 11월 29일, 북한은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을 일으키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물론 북한은 이 테러에 대해 모르는 일이라고 부인했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그럼에도 불구하고 86서울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게임은 동서양, 자본진영과 공산진영이 모두 참가하는 사상 최대규모의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결국 북한은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고, 올림픽을 방해하려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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