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형무소 학살 사건
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 사건
6.25 전쟁이 터진 직후,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이 있었습니다. 국가에 의해 학살당한 사건인데, 알고 보니 아무것도 모르는 민간인이 최대 희생자였습니다. 수천 명이나 학살이 이 사건은 국가가 저지른 단일 규모 최대 살인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 사건의 배경을 알려면 제주 4.3 사건, 여순 반란 사건, 보도연맹 사건까지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역사적 연결고리를 최대한 쉽게 설명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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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 사건 -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 보도연맹 사건
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 사건
대전 산내 골령골 사건은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17일까지 세 차례에 걸쳐 국민보도연맹원과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정치범들을 대상으로 4,000명에서 7,000명을 대량 학살한 것으로 추정되는 민간인 희생 사건입니다. 정부가 자행한 민간인 학살 중 가장 큰 규모였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45년간이나 은폐되었던 사건입니다.
한국 전쟁 이전에 이미 정부는 대대적으로 반대파를 잡아들였었는데,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모조리 죽여버린 사건입니다.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이란 북한군이 6월 25일 남침을 한 후, 7월 20일 대전을 빼앗기기 직전에 갇혀 있던 재소자를 골령골로 끌고 가서 죽인 사건이니까 같은 사건이기도 합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부는 "폭동을 일으키고 적을 도울 우려가 있다"면서 재소자들을 학살하기 시작했습니다. 6월 27일 대전이 임시 수도가 되면서 대전형무소 재소자와 예비 검속된 보도연맹원들이 희생 대상이 되었으며, 학살은 7월 16일 대구로 임시 수도를 이전할 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이란
대전 산내 골령골 사건의 희생자들은 크게 대전형무소 재소자와 예비 검속된 보도연맹원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학살은 6월 28일부터 30일까지 보도연맹원과 요시찰인, 여순사건 관련 재소자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헌병대와 경찰은 1,400명으로 추정되는 이들을 나무에 묶어 눈을 가리고 총살한 뒤, 50~60구씩 불태웠습니다.
그 후, 7월 1일 정부는 처단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군은 정치범과 10년 이상의 형을 받은 강력범 위주로 재소자들을 죽이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전쟁통에 급하게 처리하느라고, 결론적으로는 아무나 죽이게 됩니다. 이미 8년 이상 복역해서 얼마 후 출소를 앞둔 사람부터, 단순 정치범과 잡범까지 마구 분류돼서 끌려갔습니다.
이렇게 대전형무소에서 끌려나온 사람들은 대전 산내 골령골로 끌려갔습니다. 경찰은 이미 산내 주민들과 청년방위대에게 시켜서 구덩이 파놓은 상태였습니다. 끌려온 사람들은 굴비 엮듯 묶인 채 구덩이 앞에 꿇어앉혀졌고, 헌병과 경찰이 이들의 뒷머리에 총을 쏘았습니다. 욕설과 총성이 난무하고, 고통의 소리와 피가 덮였습니다.
정부에 의한 최대의 민간인 학살 사건
학살은 매우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부하들에게는 실탄이 한 발씩만 지급되었고, 헌병 장교는 권총을 들고 뒤에서 지휘했습니다. 청년단원들이 죽이기 좋게 엎드려 놓으면, 총을 든 무리들이 등을 밟고 뒤통수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자신이 죽을 순서가 될 때까지 희생자들은 끔찍한 공포에 떨었습니다.
사격 후에는 헌병 장교와 경찰이 확인 사살을 했고, 청년단원들이 시신을 구덩이에 밀어 넣었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죽지 못한 사람도 꽤 많았습니다. 구덩이 속에서도 다시 한번 확인 사살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옆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구덩이를 파는 작업에 동원되었습니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밤낮으로 파도록 강요받았습니다.
골짜기에 피가 너무 흘러서 흙은 반죽되어 마치 장마철 진흙길처럼 질퍽거렸고, 아무리 흙을 덮어도 시신의 팔다리가 튀어나왔습니다. 심지어 파묻은 후에도 살아있는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렸습니다. 당시 목격자는 가죽 장화를 신은 경찰이 구덩이에 들어가 시체 더미를 발로 꽉꽉 누르며 총을 쏴대서, 마치 새우젓을 담그는 것 같았다고 증언합니다.
제주 4.3 사건이란? 여순 반란 사건이란?
물론 당시 죽은 자들 중에는 공산 혁명분자가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외 절대 다수가 왜 죽는지도 모르는 민간인이었습니다. 대전 산내 골령골 사건의 희생자들은 크게 대전형무소 재소자와 예비 검속된 보도연맹원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재소자는 제주 4.3 사건, 여순 사건 관려자였고, 보도연맹원은 대부분 억울한 민간인이었습니다.
제주 4.3 사건은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일어난 민간인 시위 사건입니다. 무자비한 시위 진압에 시민들이 분노하여 사건이 더 커졌는데, 군경은 이에 보복하며 어린아이들까지 마구 학살했습니다. 이승만 정부는 더욱 무자비한 진압을 하라고 국군 제14연대를 파견했는데, 이들은 동포를 학살할 수 없다며 반기를 들었습니다.
여순 반란 사건이란, 이때의 국군 제14연대 반란 사건을 말합니다. 그러자 정부는 또 군대를 보내서 제14연대를 진압했습니다. 그 후 군 내부에서는 공산 남로당 숙청 작업을 대대적으로 벌였고, 이때 박정희가 빨갱이로 잡혀서 사형 선고를 받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동료들을 팔아넘기고 감형을 받아서 결국 살아남았습니다.
희생자들 : 보도연맹 사건이란?
보도연맹 사건은 한국전쟁 이전에 사상 전향자를 관리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때도 검사들이 문제를 일으키는데, 오제도 검사 등이 법률 근거도 없이 이를 추진했습니다. 그러나 껍데기는 민간 관변 단체로 운영되었습니다. 이들은 실제 공산주의자뿐 아니라, 수많은 일반 민간인을 공산 혁명분자로 조작했습니다.
정부 주도하에 운영되던 이 단체는 경찰도 동원되었습니다. 이들에게는 마치 다단계처럼 할당이 있었고, 가입하면 비료도 주겠다며 마구 등록시켰습니다. 교육 수준이 낮았던 당시, 공산주의가 뭔지도 모르던 사람들도 정부 보조 받아보려고 가입을 했고, 이들의 정보는 그대로 정부에게 넘어가서 관리 대상으로 둔갑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제주 4.3 사건 관련자, 여순 반란 사건 관련자, 보도연맹 사건 관련자들은 빨갱이들이라는 누명을 쓰고 갇혔다가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을 맞게 됩니다. 그러나 뉴라이트 등의 보수주의자들은 아무튼 빨갱이를 죽인 사건이라고 우기고 있고, 역사를 잘 모르는 무식한 사람들을 현혹시켜서 이승만 정부는 잘했다고 여론 몰이를 하는 중입니다.
역사적 국가의 폭력
제주 4.3 사건으로 어린이, 노약자 포함 약 3만 명의 희생자가 있었고, 그때 잡힌 사람들 일부는 대전형무소로 잡혀 와서 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 사건으로 또 죽었습니다. 이 사건은 보수 독재 정권 때문에 45년 간 말도 꺼내지 못하다가, 1995년 이후부터 겨우 파악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거의 1km나 이어진 온갖 구덩이에서 사체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추산하기로,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의 희생자는 최소 1800명 이상, 최대 7천 명까지 되는 것으로 집계됩니다. 그 중엔 공산 혁명 주의자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일부 때문에 최대 7천 명의 민간인을 죽였는데도 빨갱이 학살 사건이라고 우기는 자들이 있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완전히 묻힐 뻔할 이 사건은, 1950년대 영국의 종군기자가 신문에 기사를 냈었던 기록, 1999년 재미사학자 이도영 박사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찾아낸 당시 보고서 등을 통해서 사실로 확인되었습니다. 이후 노무현 정부 때 진실화해위원회가 조사하면서 마침내 역사적 사실임이 확인되고 희생자 명예 회복과 국가 책임이 인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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