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대통령 선거와 당선 대통령 지지율 - 2. 박정희]
1961년 군사쿠데타 이후 한국은 약 30년간 군사정권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동안 대선에서의 지지율은 지금은 상상하기도 힘든 높은 퍼센트를 보입니다.
박정희 집권기간 동안 한국은 높은 경제성장을 이룩했지만, 집권말기에는 지나친 중화학공업 투자로 물가상승률이 18.3%에 이르는 등 국민의 고난이 가중되었습니다. 더구나 노동자, 농민에게 계속된 희생을 강요하는 정책으로 민심도 악화되는 시기였습니다.
제5대 대통령 박정희 46.6% / 윤보선 45.1%
1960년 제2공화국이 열렸으나 1961년 군사쿠데타가 일어나고 1962년 제2공화국의 내각책임제를 다시 대통령 직접선거제로 바꾼 제3공화국이 시작되었습니다. 1963년 제5대 대선에서는 박정희가 46.6%를 얻어서 45.1%의 윤보선을 15만 표 차로 겨우 이겼습니다. 다시 직접선거로 치러진 선거는 85%의 투표율을 보였습니다. 당시의 한국을 보면 강력한 군사정권이 필요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결론적으로는 자생적 민주주의의 생성이 30년 동안 후퇴하게 되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의 박정희와 윤보선)
표의 양상은 전라도, 경상도가 박정희를 더 많이 지지했고 서울, 경기, 충청, 강원이 윤보선을 더 지지하였습니다. 한국의 지역감정이 박정희 후반 - 전두환 - 노태우를 거치면서 정치적으로 조장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선거 기간 동안 윤보선은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을 공격했습니다. 현재는 박정희 지지자들이 경쟁 정당 대표들을 종북이라고 하지만, 1963년에는 오히려 박정희가 종북, 빨갱이로 의혹을 받는 처지였습니다.
제6대 대통령 박정희 51.4% / 윤보선 40.9%
1967년 제6대 대선에서 박정희는 51.4%의 대통령 지지율을 얻어 40.9%의 윤보선을 116만 표 차로 이겼습니다. 제5대 대선에서는 남북으로 갈린 표심이 제6대 대선에서는 동서로 갈리는 양상이 생겼습니다. 아주 근소하지만 전라도, 서울, 경기가 윤보선에게, 경상, 강원이 박정희에게 지지율이 보냈습니다. 박정희는 경상권에서만도 119만 표 앞서서 서울에서의 윤보선 승리를 뒤집었습니다.
(윤보선은 박정희를 빨갱이라고 의심했다)
전라도와 경상도 인구비율을 보면, 당시 전라도가 230여만 명, 경상도가 340여만 명이었습니다. 이후에도 경상도에서의 인구는 전라도 보다 계속 압도적이었으므로, 경상도에서 60%만 지지율이 생기면 전라도에서 90%가 지지하더라도 승리가 가능한 상황이 지금까지 계속 됩니다.
박정희 정부는 일제강점기의 모든 피해를 돈을 받고 눈감아 주기로 한 한일협정으로 비난을 받고 있었습니다. 대신 박정희의 여당은 일본으로부터 당 운영비까지 지원받았습니다.
제7대 대통령 박정희 53.2% / 김대중 45.2%
제7대 대선은 1971년에 있었습니다. 야권에서는 40대 기수론으로 김영삼과 김대중이 경합을 벌여 김대중이 출마하였습니다. 대선에서는 김대중이 45.2%의 지지율을 얻었으나 박정희가 53.2% 대통령 지지율로 당선되었습니다. 원래 헌법에서 대통령 재임은 2회로 제한되어 있었으나, 박정희는 계속 대통령이 되기 위해 헌법까지 고쳐서 삼선개헌으로 출마하여 94만 표의 차이로 승리했습니다.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의 박정희와 김대중)
서울 등 지식층에서 김대중을 지지하였고, 농촌지역에서는 박정희를 지지하였습니다. 박정희는 전라도가 경상도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는 날조된 전단을 경상도에 뿌리며 신라대통령론을 퍼트렸고, 김대중은 박정희 정권 이후 전라도의 발전이 느려진 것에 대한 호남 소외론으로 맞붙었습니다. 결과는 전라도에 대한 반감으로 경상도의 박정희 지지율이 김대중 지지율보다 더 거셌기 때문에 박정희에게 유리하게 되었습니다.
제8대 대통령 박정희 100% / 단독 후보
1971년 제7대 대선에서 당선된 다음해인 1972년 박정희는 유신헌법을 만들고 제8대 대통령 선거를 다시 실시합니다. 제7대 대선에서 대통령 3번 역임을 위해 헌법을 바꾼 것에 대한 반발이 전국적으로 있었고, 선거결과에서 김대중이 위협적이라고 느낀 박정희는, 아예 헌법을 고친 후 간접선거를 치릅니다. 전국에서 2천3백여 명의 대의원을 장충체육관으로 불러들여 치룬 제8대 대선은 박정희 단독출마에 100% 참석, 무효 2표를 제외한 100% 대통령 지지율을 기록했습니다.
(제8대 대통령 선거는 장충체육관에서 단독 후보로 치뤄졌다)
박정희 정권이 장기집권을 위해 변경한 대의원 간접선거는, 당시 지방대표가 모두 정부의 입김 아래에 있었던 점을 생각하면 사실상 다른 후보는 뽑지 말라는 것입니다. 더구나 유신헌법으로 6년 임기의 대통령 선거에 무제한 재출마가 가능했고, 국회의원마저도 1/3은 대통령이 임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통령은 필요에 따라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해도 되었고 국회해산과 법관임명 독점까지 가능해져서 제8대 대통령부터는 종신 1인 대통령제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제4공화국입니다. 박정희 제4공화국은 김대중을 죽이려고 1973년 납치사건도 벌였습니다.
제9대 대통령 박정희 100% / 단독 후보
제9대 대선도 역시 대의원에 의한 간접선거로 1978년 치러졌습니다. 전국에서 2500여명의 대의원을 형식적으로 뽑아서 100%의 대통령 지지율로 박정희가 선정되었습니다. 이로써 민주주의와 반공을 표방하던 남한도 북한의 폐쇄적 공산주의와 똑같은 체제가 된 것입니다.
박정희는 단독 후보로 나서서 다시금 1인 1당 독재체제의 제9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대선은 형식적일 뿐이었습니다.
(단독으로 출마하여 제9대 대통령에 오른 박정희)
대통령 선거 대의원인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전국의 예비군 지휘관, 한국반공연맹 지부장 등 관변단체나 그 성향의 인사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므로 야당과 국민을 제외시킨 간접선거였습니다. 심지어,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의장도 박정희 자신입니다.
월남파병, 독일 광부/간호사 수출과 월 2회 휴일, 14시간 노동 등 국민들의 희생으로 경제는 발전하고 있었지만, 위법적 탄압으로 결국 1979년 10.26 사태를 맞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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