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대통령 선거와 당선 대통령 지지율 - 3.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오랜 군사독제에서 벗어날 희망을 흔히 "서울의 봄"으로 표현합니다. 1979년 대통령 시해사건으로 암울한 시기를 맞았지만, 한국은 민주화의 다시 맞을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1979년 전두환 등 군부는 또 다시 쿠데타로 정권을 빼앗았습니다.
이에 대한 민중의 저항으로 민주주의를 되찾기까지 많은 희생이 있었습니다. 보수권에서는 민주화집회를 아직도 빨갱이시위라고 부르지만, 이런 시위를 통해서 한국은 아시아 최초로 국민이 직접 민주화를 이루어낸 첫 국가가 되었습니다.
제10대 대통령 최규하 100% / 단독 후보
1979년 민주화를 요구하는 부마사태 등 민심이 떠나가는 가운데, 결국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를 시해하는 10.26사태가 벌어졌습니다. 당시 국무총리였던 최규하는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고,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두환과 노태우 등은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상관인 정승화를 체포하고 정권을 가로챘습니다.
(최규하는 제10 대통령 단독 후보로 선출된 후 임기 8개월을 재임했다)
일단 1979년 12월 6일 간접선거에서 최규하가 100% 대통령 지지율로 제10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지만, 12월 12일 군사반란으로 군부가 권력을 장악하여 실질적인 대통령의 권한은 행사하지 못했습니다. 1980년 5.18 민주화항쟁도 최규하 재임 때의 일이지만 신군부의 책임입니다. 그리고 1980년 8월, 신군부의 압박으로 최규하는 대통령직을 사임하기에 이릅니다.
제11대 대통령 전두환 100% / 단독 후보
8개월 만에 최규하를 물러나게 한 신군부는 박정희가 하던 대로 1980년 장충체육관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소집하여 제11대 대통령을 선출하였습니다. 이 방식은 역시 100%의 대통령 지지율을 전두환에게 주었습니다. 전두환은 박정희가 하던 것을 그대로 따라 했습니다. 일단 군부가 정권의 실권을 잡은 다음 군복을 벗고 민간인으로서 대통령 선거를 치르는 방법입니다. 또한 전두환은 모든 야당을 강제 해산해버리고 야당 정치인들의 정치활동도 금지했습니다. 이른바 정치쇄신을 위한 특별금지법입니다.
(박정희 이후 다시 정치 금지를 시킨 상태에서 대통령이 된 전두환)
일단 무소속으로 선출된 전두환은 북한 공산당처럼 1당 독주체제를 만든 뒤 민정당을 창당합니다. 군사반란에 비협조적인 박정희 정권의 인사들은 내쳤지만, 보수인사들을 영입하여 군인출신 정치인들이 대거 등장했습니다. 1980년에는 아직 죄를 짓지 않았더라도 혐의가 의심되는 국민들을 강제로 잡아들여 군대교육을 시키는 삼청교육대도 실시되었습니다.
그 해 재임을 못하게 하는 임기 7년의 대통령제를 핵심으로 하는 제5공화국 헌법 개정에 들어가서 1년 후 제12대 대선을 치르도록 하였습니다.
제12대 대통령 전두환 90.2% / 유치송 7.7%
제5공화국 헌법에 의해 1년 만에 다시 치러진 대선은 그동안의 체육관 대통령에서 벗어나 5200여명의 선거인단이 각 지역구에서 투표를 하는 간접선거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전과 다른 점이라면 민한당, 한국당 등의 다른 정당 소속 선거인단도 참여할 수 있었다는 것인데, 이미 정치구금이 시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야당들은 그저 민정당의 어용 야당에 불과했습니다. 전두환, 유치송, 김종철, 김의택이 출마하여 전두환이 90.2%라는 압도적인 대통령 지지율로 당선되었습니다.
(제12대 대통령 선거에서 형식적인 선거를 치른 전두환과 유치송)
1985년부터는 정치활동 금지가 해제되어 신민당 등 야당 창당이 있었습니다. 민정당은 야당창당 한 달 만에 총선을 치르도록 한 겨울에 선거 일자를 잡았습니다. 야당이 제대로 선거운동을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신민당은 돌풍을 일으키며 총선에서 승리했습니다. 국민들이 지나치게 오래 지속되는 군부정치에 환멸을 느꼈던 것입니다.
이어 1987년에는 6.10 민주항쟁이 일어나서 전국적으로 민주화항쟁이 있었습니다.
제13대 대통령 노태우 36.6% / 김영삼 28%
6월 항쟁으로 국민은 민주주의를 되찾는데 성공하였고 직선제로 대통령을 뽑는 제6공화국이 열렸습니다. 1987년 실시된 제13대 대선에서는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 출마하여 노태우가 36.6%의 대통령 지지율로 당선되었습니다. 김영삼은 경상남도, 김대중은 서울과 전라남북도, 김종필은 충청도의 지지를 받는 지역주의 양상을 보였습니다. 경상북도와 강원도는 군사정부의 밑거름이 되어 왔고 노태우를 지지했습니다.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4파전에서 승리한 노태우)
노태우는 전두환의 친구로, 같이 12.12 군사반란을 했던 인물입니다. 국민의 민주주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야당이 단결하지 못하여 민정당은 계속 집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총선에서는 계속 야권이 지배적이었으므로 여소야대의 정국이 계속되었습니다. 결국 노태우는 3당 합당을 제의합니다. 야당을 배신한 김영삼과 박정희 정권의 김종필은 노태우와 손잡고 민자당을 창당하게 됩니다.
제14대 대통령 김영삼 42% / 김대중 33.8%
제14대 대선은 1992년에 있었습니다. 1961년 이후 처음으로 민간인끼리 선거를 치른 대선이었습니다. 군사독재에게 투쟁했던 두 정치인 김영삼, 김대중과 현대그룹 회장 정주영, 변호사 박찬종이 출마한 대선에서 김영삼은 42%의 대통령 지지율로 당선되었습니다. 영호남의 대결로 관심을 모우기도 했으나 김영삼이 여당으로 돌아서며 야당지역이었던 부산, 경남마저 보수화되어 인구수에서 압도적인 영남의 지지가 호남보다 유리한 대선이었습니다.
(제14대 대통령에서 보수로 변신한 김영삼과 맞선 김대중)
김영삼은 대통령 당선 후 김종필과의 불화 끝에 출당시키고 신한국당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경상남도를 보수화시킨 이후 공화당-민정당-민자당-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의 뿌리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김영삼 정부는 문민정부를 내세우며 군사문화 걷어내기에 일조하기도 했지만 준비 안 된 OECD가입 등 IMF를 촉발시키는 문제도 낳았습니다.
하지만 IMF는 박정희 말기부터 곪아 온 보수화된 경제체제가 낳은 문제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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