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사건
노태우 전두환 징역과 사면, 사망
전두환과 노태우는 군부를 이용해 정권을 빼앗고, 박정희 집권을 그대로 따라 하며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1993년 이후 수천억 원의 비자금이 폭로되고, 쿠데타 내란(반란)을 처벌해야 한다는 국민들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재판을 받게 되는데, 이것이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사건입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이 사건은 국민의 요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흐지부지 덮어진 사건입니다. 그 배경과 판결, 그리고 노태우와 전두환의 사망과 태도 등에 대해서 이해하기 쉽도록 정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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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사건 - 노태우 전두환 징역과 사면, 사망
비자금 사건과 내란 반란 범죄
김영삼은 원래 진보 성향이었지만 대통령이 되기 위해 보수 우파 세력과 손을 잡았고, 그것이 1990년의 삼당합당 사건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부산과 경남 지역 국민들이 보수 지역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는 노태우의 뒤를 이어서 대통령이 되었는데, 1979년 전두환, 노태우가 집권한 12.12 군사반란을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러자 검찰은 수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검찰도 보수 우파 집단의 편을 드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때도 그랬습니다. 1994년 수사를 마치고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며 기소유예 처분을 내려버렸습니다. 이에 대해 6월 항쟁을 통해 자력으로 민주주의를 획득했던 국민들은 엄청난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보수 우파 지지자들은 전두환 - 노태우 - 김영삼으로 이어지는 정권을 지지하며, 오히려 반대파들을 빨갱이라고 몰아세우며 비난해 댔습니다. 사회 지도층급과 민주당은 검찰의 기소유예 철회를 요구했지만 김영삼은 이에 대해 침묵하였고, 독재정권의 모든 죄는 그대로 묻히는 쪽으로 분위기가 기울었습니다.
대신 김영삼은 5·18 민주화운동의 명예 회복을 약속하며 국민화합을 하자고 했습니다. 그로 인해 국회에서는 독재정권의 5·18 광주학살 사건에 대한 특별법이 추진되었지만, 전두환 - 노태우의 민정당에 뿌리를 둔 보수 우파 정치권은 반대했습니다. 이것을 인정하면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는 상황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사건
국민들은 그래도 과거에 진보 인사였던 김영삼의 과거사 회복을 기대했지만, 김영삼은 가장 중요한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에 대해서는 역사에 맡기자는 말로 넘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로 인해 1995년 지방선거에서 김영삼의 민자당은 참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서석재가 전직 대통령의 4천억 비자금설을 흘리며 사퇴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마침내 1995년 민주당의 박계동이 노태우의 비자금 내역을 공개해 버렸습니다. 결국 노태우가 사과를 하고 헌정 사상 처음으로 전직 대통령이 구속되는 사건으로 번지게 됩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김영삼은 5.17 비상계엄과 5·18 민주화운동 관련 특별법을 제정하기로 하고, 보수 우파 편을 들었던 검찰은 매우 당황하게 됩니다.
전두환도 자신에게 수사의 방향이 잡히자 강력히 반발했습니다. 그는 조사 소환에 불응했지만 군형법상 반란수괴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됐습니다. 마침내 1995년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사건은 두 사람의 구속으로 현실화되었습니다. 그들은 공소시효가 지났다고 주장했지만, 특별법이 합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판결로 인해 무력화되어 버렸습니다.
노태우 전두환 징역과 당시 상황
이승만, 박정희 정권을 지나며 우리나라는 좌파를 빨갱이라고 하는 프레임이 생겼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반대하면 반국가세력이라고 매도했습니다. 전두환, 노태우도 이를 그대로 써먹으며 반대파에게 빨갱이라는 누명을 씌웠었고 지금도 사회는 똑 같습니다. 당시 전두환과 노태우를 지지했던 45%의 보수 우파들은 5.18 특별법에 반대하며 5.18 사건도 좌파 짓이라고 덮어 씌웠습니다.
그러나 이미 1980년 전두환이 광주를 방문해서 사실상 자신이 관여된 것을 인정했었고,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는 자신의 편이 아니며 빨갱이라는 보수적 발언을 그대로 했습니다. 더구나 노태우도 동창회에 갔다가 광주 학살은 중국 문화혁명 때 수천만 명이 희생당한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발언을 했습니다.
전두환과 노태우의 발언이 국민들에게 알려지자 중도층마저 진보 쪽으로 완전히 돌아섰고, 그로 인해 구속을 원하는 국민이 다수가 되면서 전두환과 노태우는 법의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고, 김영삼도 과거 세력과 완전히 선을 그었습니다. 견제는 하되 완전히 처벌하지는 않으려던 초기 태도에서 변화된 것입니다.
국민들은 수사 기록 공개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검찰은 국가기밀이라며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뒤로는 이미 조선일보 계열 언론에 수사기록을 넘겼었다는 사실이 발견되며 큰 반발을 샀습니다. 전두환, 노태우 구속 사건의 재판뿐 아니라 이들에게 뇌물을 준 기업인들에 대한 수사도 이어졌습니다. 뇌물을 받은 이현우, 금진호뿐만 아니라, 동아그룹 최원석, 대우그룹 김우중, 한보그룹 정태수, 삼성그룹 이건희 등도 징역형을 받았습니다.
노태우 전두환, 2년만의 사면과 사망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사건의 판결에서, 전두환은 내란 및 반란 혐의로 사형 판결을 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받았습니다. 노태우는 징역 22년을 받았다가 17년으로 감형받았습니다. 하지만 역사의 심판은 뻔합니다. 권력자와 부자는 아무리 잘못해도 풀려납니다. 1997년, 김영삼은 두 사람을 특별사면을 결정했고, 기업인들도 일찍 사면되었습니다.
사실 이들의 사면은 표면상의 이유는 국민화합의 의미였습니다. 2000년대 직전에도 대구경북 지역에서 전두환 선호도가 5%를 넘었다는 점에서 이루어진 결과입니다. 마침내 김대중 취임 이후, 1998년과 1999년에 그들은 교도소를 나서게 됩니다. 하지만 출소 이후 전두환과 노태우의 태도는 극명하게 차이가 났습니다.
전두환은 전재산이 29만 원밖에 없다며 미운 짓을 계속했고, 노태우는 추징금을 분할해서 완납했습니다. 전두환은 죽는 순간까지도 5.18 민주화운동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노태우는 변호사를 통해서 여러 차례 사죄를 표명했습니다. 돈 없다는 전두환은 세금도 안 내고 골프나 치러 다녔고, 노태우는 건강이 안 좋아져서 병고에 시달렸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이후 노태우는 2021년 10월 88살로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한 달 후, 전두환이 2021년 89살로 사망했습니다. 노태우는 파주시 통일동산의 동화경모공원에 봉분 없이 안장되었고, 전두환은 파주 장산리에 안장하려 했으나 시민들이 반대해서 자택에 유골이 있습니다. 이렇듯 두 사람이 죽은 후 국민의 평가는 크게 달랐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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