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르스크 전투 1
독소전쟁 최대의 전차전
독소전쟁 중인 1943년 7월 4일부터 1943년 8월 23일까지 역사상 최대 규모의 기갑전이 벌어졌습니다. 그것은 쿠르스크 전투였습니다. 지상 최대의 전차전으로 알려진 프로호로프카 전투는 이 쿠르스크 전투의 일부입니다.
이 전투에서 병력 4백만 명과 13,000대의 전차, 12,000기의 항공기가 뒤엉켜 싸웠습니다. 그 배경과 과정, 전투의 승리까지 설명합니다. (내용이 길어서 2부로 진행합니다. 2편은 아래 링크에서 계속 읽을 수 있습니다)
독소전쟁 최대의 전차전 쿠르스크 전투와 프로호로프카 전투 - 1편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의 독소 전쟁
1943년 2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군은 치욕적인 패배를 맛보았습니다. 이는 무적이었던 나치 독일군이 처음으로 완패를 당한 충격이었습니다. 한편 소비에트 연방의 붉은 군대는 독일군을 소련 영토 안쪽으로 유인하였습니다. 소련이 자신 있던 근접 전투로 독일군을 제압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후 독일은 반전을 당했습니다. 20만 명의 병사를 잃은 독일군은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일단 퇴각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최전선은 1500km 후퇴하였고, 양측의 전선은 독일 쪽으로 소련이 불룩하고 치고 나온 형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독일은 이 부분을 제거해야 했는데, 지상 최대의 전차전 쿠르스크 전투는 레닌그라드와 흑해 중간 지점에서 벌어지게 됩니다.
만슈타인과 주코프
두 장군은 출신부터 성격까지 정반대였고, 전투 방식 또한 대조적이었습니다.
히틀러가 복수를 위해 선택한 독일 장군은 만슈타인 원수였고, 그는 두뇌파 지휘관으로 불리는 뛰어난 전략가였습니다. 만슈타인은 국가에 대한 충성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충실하고 이상적인 군인 정신을 보여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에 맞서는 소련군 지휘관 주코프는 목적에 충실하며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뚝심을 가졌습니다. 주코프는 밑바닥부터 올라온 자수성가형 인물로, 임무 달성을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결단력을 지녔습니다.
타이거 탱크의 등장
독소전쟁에 나선 그들은 불룩하게 돌출된 모양의 전선을 이루고 있는 곳에서 대치했는데, 이곳은 한국의 남한 면적과 맞먹을 만큼 광활한 지역이었습니다.
이때 신기술의 무기를 선호하는 독일은 최강의 무기를 만들어 냅니다. 88mm 대포는 강력한 비행기 격추 무기로 개발되었으나, 포신을 낮춰서 쏘면 장갑판이 두꺼운 탱크도 파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너무 컸기 때문에 기동성과 발사 속도에 제약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88mm 대포를 응용한 무기가 마크6이었습니다. 마크6은 초대형 대포에서 타이거 전차로 변신한 모델이며, 소련군 전차를 압도하고 강력한 장갑을 자랑했습니다. 그래서 독일군은 이 마크6을 타이거 전차라고 불렀습니다.
주코프는 평범한 삽을 활용한 전략으로 독일군의 첨단 타이거 전차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여러 곳에 참호를 파고 탱크가 거기에 빠져서 움직일 수 없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쿠르스크 전투의 배경
결국 이 싸움은 소련군이 참호를 완성하기 전에 전격전을 해야 하는 전투였습니다. 그러나 신기술에 집착하던 히틀러는 타이커 탱크가 충분히 보급될 때까지 기다리라고 명령했습니다. 이것은 히틀러와 만슈타인의 충돌을 만들게 됩니다.
소련 지도부도 충돌은 있었습니다. 스탈린은 빠른 공격을 선호했지만, 주코프는 상대방을 기다리는 전략으로 의견 충돌이 있었습니다.
1943년 봄, 스탈린은 소련이 독일군을 출발하기 전에 공격하라고 했지만, 주코프는 독일군이 공격한 뒤 힘이 빠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반격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곧장 공격에 들어가기보다는 독일군의 전격전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장애물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주코프의 생각이었습니다.
독일군이 고전한 이유
수적 우세를 가진 소련은 소모적 전쟁을 유도했습니다. 스탈린을 설득하는 데에 성공한 그는 방어 공사에 착수하였습니다. 30만명의 민간인을 동원해서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방어 공사를 벌였습니다.
주코프는 전차를 막기 위해서, 땅을 움푹 파서 전차를 박게 한 다음 다시 올라오지 못하도록 반대편에 흙을 높이 쌓는 전술을 사용했습니다. 전차를 막는 참호가 있고, 그 안에 보병이 숨어 있고 전방 사방에 장애물이 있는 상황을 만들어냈습니다. 이것은 탱크에게는 악몽이 될 것입니다.
벽처럼 쌓인 대전차 방어대의 두께는 6km 두께로, 200km나 이어져서 거대한 방어진지가 되었습니다. 주코프의 계략은 적의 전차가 참호에 빠질까 봐 멈추면 그때를 놓치지 않고 포병대가 집중포화를 퍼붓는 것이었습니다.
독일도 나름의 방지책은 있었습니다. 적의 방어대를 제거할 목적으로 슈투카를 출격시켜 폭격을 가했습니다. 그러나 방지책에 방지책이 다시 펼쳐집니다. 주코프는 진짜와 똑같이 포신을 설치해서 가짜 포병대 진지를 엄청나게 만들어 놓고, 진짜처럼 연출했습니다.
본격적인 쿠르스크 전투
소련의 주코프는 인해전술을 이용한 근접 전투를 선호했습니다. 그러나 만슈타인은 탁 트인 평야에서 전격전 전투를 선호하는 스타일이었습니다. 마침내 만슈타인은 30만 명의 집단군에게 진격을 명령할 수 있는 기회가 생깁니다.
7월 5일 새벽, 히틀러는 마침내 만슈타인에게 공격을 허락했습니다. 독일군은 이제까지 어떤 전투에서 보다도 많은 수의 전차와 대포를 이끌고 진격했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중부 집단군은 북쪽에서, 남부 집단군은 남쪽에서 진격했지만, 주코프가 만들어 놓은 장애물 구간에서 막혔습니다. 소련군이 독일군이 진격해 오는 길을 따라 4만 개의 지뢰를 설치했습니다. 지뢰가 폭발했을 때 차체가 산산조각이 날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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