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대첩
1954년 독도의용수비대와 홍순칠 대장
1954년에 있었던 독도대첩은 독도의용수비대와 홍순칠 대장이 독도 실효적 지배의 발판을 마련한 전투입니다.
알려진 바로는, 1953~1956년 3년 동안 일본 해상보안청 함정과 세 차례 이상의 총격전이 있었다고 합니다. 독도수비대는 국가의 지원도 없이 의병처럼 일어나서 상대가 안 되는 전력으로 우리 영토를 지켜냈습니다.
그 과정과 독도 전쟁의 결과를 정리했습니다. 이런 것에 관심이 없다면, 언젠가는 우리 영토를 잃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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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대첩 - 1954년 독도의용수비대의 독도 전쟁과 홍순칠 대장
반성이라곤 없는 일본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전한 지 몇 년 안 되고,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이 계속되던 때였습니다. 1952년, '홍순칠'이라는 사람이 전쟁에서 큰 부상을 입고 고향 울릉도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울릉도 경찰서에서 일본의 말뚝을 보게 됩니다.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적힌 팻말이었습니다.
원래는 독도를 한국이 관리한다는 팻말이 있었는데, 일본인이 와서 그것을 뽑고 일본 관리라고 적힌 말뚝을 꽂아 놓고 갔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발견한 울릉도 주민이 뽑아 와서 경찰서에 준 것인데... 당시에 한국과 일본은 서로 상대의 팻말을 뽑아버리고 다시 꽂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홍재현과 홍순칠 대장
홍순칠의 할아버지 홍재현은 1883년 독도를 방문해서 나무를 심은 후, 우리 땅이라는 애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1948년 미군이 폭격 연습 중에 울릉도에 출어 나간 한국인 어부들을 30명도 넘게 죽게 만든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 장례식에서 조사를 읽은 사람도 홍재현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의 독도 이야기를 듣고 자란 그였기에, 일본의 팻말을 보고 분노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홍순칠은 독도의용수비대를 만들게 됩니다. 울릉도 주민 30~40명을 모았습니다. 이때 참가한 독도의용수비대의 인물 중 일부의 명단은 이렇습니다.
조상달, 서기종, 황영문, 정원도, 김경호, 김영호, 김채두, 유원식, 김병열, 고성달, 최부업, 한상용, 홍순철, 정원도, 오일한 등...
이들이 바로 독도대첩의 영웅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들의 이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독도의용수비대의 탄생
못 살고 전쟁 중이라 국가가 지키지 못하는 독도를 지키고자 일어났으니, 이들은 의병인 것입니다. 그러나 무기가 없었습니다. 홍 씨는 부산에 있는 양키시장에 갔습니다. 할아버지 홍재현이 군자금으로 쓰라고 300만 원을 주었고, 울릉도민들도 오징어를 판 돈 200만 원을 주었습니다.
개인이 무기를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전쟁 중인 데다가 미군을 상대로 먹고살던 양공주들이 그를 도왔습니다. 덕분에 식량과 군수품, 그리고 무기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독도수비대는 경기관총 2정, M2 칼빈소총 3정, M1 소총 10정, 권총 2정, 수류탄 50발 등의 무기로 무장했습니다.
1차 독도대첩
독도의용수비대는 1953년 4월에 독도에 상륙했습니다. 한국전쟁이 휴전되기 3개월 전입니다. 이들은 2개 조로 나누어 전투대를 구성하고 15명씩 교대하며 독도를 방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한국전쟁이 끝나기 4일 전, 일본 해군이 대한민국의 영토를 침범해서 독도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전쟁을 일으키고도, 한국을 식민지로 삼고도 반성이라곤 전혀 모르는 일본은 전쟁 중인 한국의 동쪽 영해를 마구 휘젓고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독도 전방 200m 앞으로 순시선이 접근하게 됩니다. 이를 발견한 독도수비대는 보트에 경기관총을 싣고 급히 방어에 나섰습니다.
순시선에 맞서는 형편없는 보트... 누가 봐도 싸움이 될 리 없는 상대입니다. 일본 해군도 그래서 방심했을 것입니다. 다른 대원들이 엄호사격을 해 주는 가운데, 홍순칠과 대원들이 보트를 다고 순시선의 20m 앞까지 돌진했습니다. 그리고 2백발의 집중 사격을 해댔습니다.
함정의 철판이 두꺼워서 먼 거리의 사격으로는 구멍도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의외의 공격을 당한 일본 순시선은 매우 당황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첫 번째 전투에서 적을 물리치게 됩니다. 의용수비대가 밝힌 바에 의하면, 약 3년 동안 이런 식으로 여러 차례의 전투가 있었다고 합니다.
양심 없는 일본군에 대응하라
당시 일본은 팻말만 꽂는 것이 아니라, 어떤 때는 미역을 따던 한국 어민들을 쫓아내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수비대가 생기면서 일본은 더 이상 못된 짓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어민들도 마음 놓고 독도 근처 바다까지 나가서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수비대에게는 걱정이 있었습니다. 일본 해군함은 경기관총으로도 뚫지 못하는 상태이니 항상 불안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마침내 소련제 직사포 한 문과 조준대가 없는 박격포 1대를 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너무 열악한 전력차를 줄이기 위해서 눈속임도 시도했습니다. 독도 정상 가까이에 큰 통나무를 검게 칠해서 설치했습니다. 멀리서 보면 대포처럼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소총부대라고 얕보고 침략하는 것을 미리 방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2차 독도대첩
1954년 11월 21일.. 이날은 독도대첩이 있던 날입니다. 이번엔 일본군이 작정을 하고 접근해 왔습니다. 1천톤급 일본 함정 3척과 군항공기가 영토를 침략한 것입니다. 함정에다가 항공기까지 구성해서 독도로 오기는 처음이라 의용수비대는 잔뜩 긴장하게 되었습니다.
전방 1km 앞에서 발견된 일본군을 보며 급하기 전투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이 600m 안으로 들어오자 사정거리가 얼핏 맞아 들어갔습니다. 박격포 등을 준비하고 포격을 시작했습니다. 마치 포위하듯 일본 군함 9함, 10함, 16함이 오고 있었으나, 일단 PS 9함에 집중적인 포격이 가해졌습니다.
준비한 보람이 있었습니다. 홍순칠과 독도의용수비대 대원들이 쏜 포탄은 9함에 명중됐고, 배 앞쪽에서 군인이 떨어지는 장면도 보였습니다. 이후 PS 10함도 치명상을 입었습니다. 이렇게 헤쿠라호와 오키호가 부서지자 PS 16함이 이 배들을 예인하기 시작했고, 결국 모두 도망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안심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늘에서는 일본 항공기가 독도를 돌며 공격의 틈새를 찾고 있었습니다. 독도수비대는 대공방어에 들어갔습니다. 거대 폭격기가 아니라서 개인 대공방어를 뚫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항공기도 독도를 포기하고 돌아갔게 됩니다.
홍순칠과 독도수비대 대원들
이때 일본은 한국의 독도 우표가 붙은 우편물을 반송해 버리는 짓을 하고 있었고, 한국 국민들은 화가 나서 독도 우표를 붙여서 월평균 3만 통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때 일본 방송인 NHK에서 독도대첩에 대한 방송이 나왔습니다. 함선이 부서지고 16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보도였습니다.
독일이 전쟁을 반성하며 진심을 보이는 반면, 일본이 전쟁 직후부터 이렇게 한국을 깔본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광복을 맞은 후에도 친일파들이 그대로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일본 편을 드는 사회 고위층, 정치, 경제 상류층들이 그들의 뿌리입니다.
홍순칠 대장과 독도의용수비대는 국가의 지원도 없이 무려 3년 8개월 동안 독도를 지켰습니다. 1956년 12월, 어느 정도 전쟁의 후유증을 수습한 경찰이 독도를 지키기로 약속하자 마침내 울릉도로 돌아갔습니다. 이후 실질적인 한국의 실효 지배가 이어져서 오늘날에 이릅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현재, 우리가 독도를 우리땅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독도수비대의 독도대첩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국가는 이들에게 어떤 보상도 따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2005년, 마침내 정부는 독도의용수비대 지원법을 만들어서 이들은 예우하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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