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빚
프랑스가 스위스 생피에르 마을에 진 빚을 갚은 미테랑 대통령
나폴레옹이 스위스의 시골 마을 생피에르에 진 빚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가 빚진 후 183년이 지난 어느 날, 생피에르가 빚을 갚으라고 나섰습니다.
그때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은 나폴레옹의 빚을 갚도록 결정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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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빚 - 프랑스가 스위스 생피에르 마을에 진 빚을 갚은 미테랑 대통령
알프스를 넘은 나폴레옹
1800년, 나폴레옹이 이탈리아를 정복하기 위해 군대를 출동했습니다. 나폴레옹이 알프스 산맥을 넘었다고 알고 있는 그 유명한 전쟁이 바로 이것입니다. 무려 4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눈 덮이고 험난한 알프스 산맥을 넘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빚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나폴레옹이 병사를 이끌고 알프스의 브르생피에르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높은 산맥은 그냥 올라가서 될 일이 아니라 말과 대포를 밀고 올라갈 수 있도록 바닥을 다져야 했습니다. 이런 작업뿐 아니라 각종 짐을 운반하기 위한 인력도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스위스의 생피에르 마을 주민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됩니다. 각종 부역과 공출을 해주면 그에 대한 대가를 충분히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전쟁이 끝난 후의 일이지만 말입니다. 그러면서 차용증까지 써주게 됩니다.
생피에르 마을에 준 차용증
차용증에는 마을 사람들을 하루 3프랑으로 징용한다는 것과 노새와 주전자를 빌리고 소나무를 잘라 나르는 것까지 자세하게 적혔습니다. 그렇게 해서 작성된 총비용은 약 5만 스위스 프랑이나 되었습니다. 생피에르 마을 주민은 열심히 나폴레옹을 도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원정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숙적 오스트리아 군대를 물리치고, 전통 깊은 베네치아 공국마저 멸망시켜버렸습니다. 그리고는 평탄한 길을 이용해서 프랑스로 돌아갔습니다. 돌아갈 때는 그 마을을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나폴레옹의 빚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고 나서는 나폴레옹이 진 빚을 갚을 기회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1813년부터 기나긴 유럽 전쟁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결말은 나폴레옹의 몰락이었습니다. 돈을 갚아야 할 사람이 프랑스에서 쫓겨나면서 곤란한 일이 발생합니다.
스위스의 생피에르 마을 주민들은 나폴레옹이 진 빚을 갚으라고 프랑스에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이후에 들어선 프랑스 정부는 나폴레옹과 사이가 안 좋은 반대파였으니 갚을 리가 만무했습니다. 약속 문서를 무시하고 무대응으로 시간만 보냈습니다.
183년 만의 빚을 갚다
그렇게 해서 183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1969년, 프랑스는 나폴레옹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며 축제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생피에르 주민들이 프랑스의 퐁피두 대통령을 찾아왔습니다. 나폴레옹이 진 1억5천만 프랑의 빚을 갚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세월이 지났으니 돈 비용은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다 줄 리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2천억 원이면 엄청난 돈이니 말입니다. 그리고 다시 세월이 흘렀습니다.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이 스위스를 방문했습니다. 이번에도 그들은 찾아갔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사실 프랑스의 입장도 참 난감했습니다. 독일 나치가 프랑스에서 괴뢰 정부를 세우고 저지른 만행을 철저히 청산하며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하던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미테랑 대통령은 나폴레옹의 생피에르 마을에 대한 빚을 갚기로 합니다. 200년의 빚이 마무리되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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