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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장군 - 사망과 유해 봉환 / 공산주의, 자유시 참변 오해 정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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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장군 - 사망과 유해 봉환 / 공산주의, 자유시 참변 오해 정리​

키스세븐 2022. 8. 15.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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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년 만에야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이 이루어졌다.

홍범도 장군

사망과 유해 봉환 / 공산주의, 자유시 참변 오해 정리

2021년,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봉환되었습니다. 그동안 조국에 묻히지도 못하고, 한편으론 공산주의라고, 또 한편으론 자유시 참변에 책임이 있다며 누명을 썼던 독립운동가입니다.
이 글은 홍범도 장군의 사망과 일화, 유해 송환 추진 등 말년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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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장군 - 사망과 유해 봉환 / 공산주의, 자유시 참변 오해 정리

홍범도 공산주의자론과 자유시 참변

홍범도 장군 - 공산주의자, 자유시 참변 오해 정리

홍범도는 1927년,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습니다. 당시 나이 59살... 지금과 달리 나이 60이면 원로 대우를 받던 때였습니다. 일제의 탄압에 연해주로 밀려난 독립군은 보급에서 엄청난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가 볼셰비키에 입당한 것은 소련의 지원 없이는 일본에 대항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1921년 일어난 자유시 참변입니다. 독립군들이 자유시(알렉세예프스크)에 집결해서 러시아의 보호를 받으려고 하자, 일본은 간악한 흉계로 무장해제 시킬 것을 요구했습니다. '자유시 참변'이란, 이때 독립군이 거부하고 저항하면서 희생이 발생한 사건입니다.

이런 점을 들어서 보수주의 측에서는 홍범도가 공산주의자라니, 자유시 참변의 변절자니 하는 주장이 일었습니다. 하지만 공산당 가입은 보급이 목마른 독립군의 숨통을 터주려던 것이었고, 자유시 참변은 주도적이었다는 기록은 전혀 없고 오히려 통곡했다는 증언만 있으니 누명에 가깝습니다.



독립군의 쇠락과 서러움

카자흐스탄 등에 강제 이주당하는 우리 동포들

광복 이전, 홍범도 장군은 어린아이도 다 안다고 할 만큼 유명한 독립전쟁의 영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업적에 비하면 보상과 예우 등이 형편없었습니다. 살아서는 머슴 출신이라고 주류에게서 외면당하고, 죽어서는 쓸쓸하게 머나먼 카자흐스탄에 묻혀야 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소련은 서쪽에서 독일과 싸우는 동안 동쪽의 일본과의 충돌이 일어날까봐 두려워했습니다. 그러자 강요한 것이 1937년, 스탈린의 한인 강제 이주 정책입니다. 그로 인해 17만 명이나 되는 조선인이 8000km나 떨어진 중앙아시아로 강제로 이주당하게 됩니다.

혹독한 강제 이주 때문에 동포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반사막지대의 막막한 카자흐스탄으로 옮겨진 홍범도는 움막 생활로 삶을 시작했습니다. 동포들의 정신적 지주로 활동했지만, 나이 70에 더 이상 활동이 힘든 그는 1938년 크질오르다로 이주하게 됩니다.



극장 수위가 된 홍범도 장군

홍범도의 사망과 최후

그의 말년은 민족의 희망을 이끌던 장군이라고는 믿기기 힘들 정도가 됩니다. 병원 경비 등을 하며 겨우 살아가던 그를 발견한 것은 고려극장의 '태장춘'이었습니다. 그는 홍범도를 알아보고는 극장 관리인으로 모셨습니다. 덕분에 말년의 경제생활은 넉넉하게 되었습니다.

머나먼 타국에서 독립운동의 영웅인 홍범도는 동포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의 일대기를 그린 연극 《홍범도》가 1942년 극장에 올려졌습니다. 그러나 고려극장은 다른 곳으로 이전해야 할 상황이 생깁니다. 이전 바로 전날, 극장에 강도가 들었습니다. 그는 강도와 맞서 싸우다가 크게 다치게 됩니다..

그 후로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고, 결국 1943년 76살의 나이로 홍범도가 사망하게 됩니다. 일본이 패망한 것은 1945년입니다. 단 2년만 더 버텼어도 평생 소원인 민족의 광복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늘이 내려 준 영웅의 역할은 그저 거기까지였나 봅니다.



홍범도 유해와 이념갈등

홍범도 거리의 기념패 / 홍범도 장군 - 사망과 유해 봉환

그는 1951년 공동묘지에 묻혔습니다. 고국에서는 관심도 보이지 않는 쓸쓸한 죽음이었지만, 현지의 동포들은 지도자를 잃은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그가 살던 집터에는 홍범도의 집터라는 기념패가 붙어 있고, 그가 살던 집 앞은 "홍범도 거리"로 불리고 있다고 합니다.

한편 일제 부역자들이 정권을 거머쥔 대한민국에서는 그에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공산당에 가입했었다는 이유만으로, 한동안은 역사에서도 지워졌었습니다. 그나마 독립운동가 보훈 사업을 통해 1963년에 건국훈장에 추서된 것이 다였습니다.

오히려 홍범도의 유해를 봉환하려는 움직임은 북한이 먼저였습니다. 고향이 자강도였으니 고향으로 모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유해 봉환은 뒤늦게 남북 정부의 이념 경쟁으로 이어졌습니다. 이것은 국가 정통성의 문제로 번지고, 남북 대사관 간에 외교전이 뜨거워졌습니다.



홍범도 유해 봉환의 어려움

[홍범도는 고려극장 수위로 있었다] 이전한 현재의 고려극장 / ⓒ MBC

이때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남한의 대통령 '문재인'이었습니다. 반드시 '봉오동 전투' 100주년에 맞춰 남한으로 모셔야 한다는 의지가 확고했기 때문입니다. 북한도 동포들에게 접근했지만 동포들의 호감은 남쪽 정부에 있었고, 2019년 대통령 국빈 방문을 통해 정식으로 추진되게 됩니다.

하지만 한국 보수주의는 이에 비판을 해댔습니다. 보수당 국회의원은, 동포들 영주권은 챙기지 못하고 영웅만 챙기니 이게 무슨 민주주의냐고 질타했고, 보수 커뮤니티에서도 홍범도가 공산주의자니, 자유시 참변의 배신자이니 하며 공격의 농도가 높았습니다.

[전투기가 호위하는 장면] 홍범도 장군 - 사망과 유해 봉환 / ⓒ KBS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재인은 카자흐스탄 대통령과 외교부 장관에게 서한까지 보내며 그때마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을 요청했습니다. 결국, 남한의 진정성이 북한의 정치적 목적을 이기고 민족의 영웅을 모셔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2021년, 전투기의 경호 등 최고의 예우를 받으며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송환되었습니다. 조국을 떠난 지 78년 만의 일입니다. 조국이 버렸던 독립운동의 영웅은 이제 국립대전현충원에 묻혔습니다. 이제야 조국에서 광복의 기쁨을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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