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전 대통령
노태우 서거(사망)와 전두환 평가
노태우 전 대통령이 2021년 사망했습니다. 과거, 전두환과 함께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키고, 제13대 대통령까지 올랐던 인물입니다. 한편으로는 보수 정치계열로 정치 비리와 민주 인사 탄압도 있었기 때문에 욕도 많이 먹었었습니다.
이를 통해, 노태우 서거(사망) 시점에서 그의 공, 과를 평가하고, 전두환과의 평가 비교를 하려고 합니다. 여기에는 범죄와의 전쟁, 남북합의서, 북방외교, 광주 민주화 운동 등의 역사적 평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래 링크에 전두환 사망 정리도 이어지니, 링크를 찾아 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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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서거(사망) - 전두환과 노태우 전 대통령 평가 비교
노태우 삶 요약
1988년 제13대 대통령이 된 '노태우'는 1932년 대구광역시 동구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느 정도 수준이 되는 가정 형편 덕에 어려움 없이 자랐고, 경북고등학교를 거쳐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이때 '전두환'을 만나서 친구가 되고, 군 내부 사조직인 '하나회'를 함께 합니다.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독재를 노리다가 시해당한 후, 전두환과 '12.12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군대를 동원해서 정권을 빼앗고 전두환이 제11대, 제12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이때 국민의 항거가 계속되어 '6월 항쟁'에 이른 후, 그는 "6.29 선언"을 통해서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제13대 대통령에 오른 후에는 범죄와의 전쟁, 북방외교, 88 서울올림픽 등을 추진했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 퇴임 후에는 쿠데타 내란과 정치 비자금 범죄로 징역 17년을 선고받았습니다. 2002년 전립선암 수술로 오랜 기간 병상에 있다가, 소뇌위축증 끝에 2021년 사망했습니다.
제13대 대통령 노태우가 되기까지
학창 시절에 공부를 잘했다고 합니다. 전두환이 인문계 편입시험, 갑종장교 시험 등에서 떨어졌던 것과 비교되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육사 시절부터 한 살 더 많은 전두환은 나서는 것을 좋아했고, 노태우는 영어 교사를 하는 등의 성격적 차이 때문에, 친구 관계지만 전두환이 주도하는 사이였습니다.
제9공수여단장-제9보병사단장을 거친 그는 12.12 군사반란 때 친구 전두환과 정권을 빼앗았습니다. 그 후 보수 독재 정권의 이인자로 활동합니다. 하지만, 전두환은 은근히 그를 견제했다고 합니다. 정권의 실세는 허화평, 허삼수, 허문도였기에 그는 슬슬 밀려났습니다.
1981년, 전두환의 권유에 의해 군복을 벗고 민간 정치인의 길에 올랐습니다. 그 후 체육부 장관, 내무부 장관, 올림픽조직위원회 위원장을 거쳤습니다. 정권 이인자였음에도 권력이 약한 직책으로 떠돌았던 것입니다. 내무 장관이 된 것도 정권의 욕을 대신 먹게 하려는 흉계 때문이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그러나 3허 씨들이 이런 저런 문제로 인해 나가떨어지고, 우여곡절 끝에 민정당 대통령 후보가 되었습니다. 국민의 민주화 열망이 거세자, 6.29선언으로 직선제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이것이 자신의 결단이라고 했는데, 한편으로는 전두환과의 기획으로 합의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의 공과 과
당시 대선에서 김대중과 김영삼이 선두에 섰었지만, "보통사람"이라는 구호를 내세워서 드디어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36%의 득표율은 최저 득표율이었습니다. 그의 임기는 여당의 힘이 약했기에 5공 청산의 국민적 압력에 의해 친구 전두환을 백담사로 보냈고, 이로 인해 두 사람의 사이가 벌어졌습니다.
임기 중 범죄와의 전쟁, 정치인에 대한 풍자의 자유, 남북기본합의서, 북방외교, 1988 서울 올림픽 등의 성과가 있었습니다. 특히 북방외교는 88 서울 올림픽의 대성공으로 이어졌고, 남북기본합의서는 무조건 북한과 싸우려는 보수 성격과 다른 정책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인기는 계속 최저였기에 김대중에게 정치 연합을 제의합니다. 그러나 김대중은 야합할 수 없다며 이를 거절했고, 정치적 야합은 김영삼, 김종필이 참여한 상태로 '3당합당'이 이루어져, 민자당 탄생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전두환과 노태우 비교
그러나 자신의 뒤를 봐달라는 정치 후계도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김영삼 임기 중 5공청산 재판이 열리고, 12.12 군사쿠데타 내란죄로 유죄를 받습니다. 또한 4,513억 원의 비자금 사건까지 터지며 추징금 2,628억 원과 징역 17년의 선고를 받았습니다. 다만, 곧바로 김영삼이 사면해 주었다는 한계는 있습니다.
전두환은 상대방과는 적대적인 대신 후임들을 잘 챙겨줘서 충성도가 높았습니다. 그러나 노태우는 주변인을 잘 챙기지 못하는 대신, 상대방과 협상, 회의를 통해 해결하는 방식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래선지 전두환이 경제 부분에서 자신감을 보인데 비해, 노태우는 외교 등에서 자신감을 보였습니다.
보수주의 전두환은 사람들에게 강압적, 권위적 자세를 보였습니다. 그러나 노태우는 임기 중 회의를 자주하고 참모들의 토론을 통해 결정했다고 합니다. 또한 김대중 등과의 만남을 통해서 상대의 의견을 들었습니다. 둘 다 보수정권에서 민주주의를 억압했으나, 그나마 노태우는 소통이라도 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노태우 사망(서거)
죄에 대한 반성의 차이도 큽니다. 전두환이 재산을 빼돌리고 돈이 없다며 추징금을 안 내는 것과 달리, 노태우는 2,628억 원의 추징금을 끝까지 다 냈습니다. 또한 광주 민주화운동의 학살책임도 전두환과 달리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전두환이 더욱 국민 밉상이 된 것입니다.
물론 노태우도 초기에는 책임을 회피했었습니다. 그러나 말년에는 아들이 대신 사죄하게 하는 등 반성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학살 책임자 중 대신이라도 헌화하고 사죄한 사람은 노태우 단 한 명뿐이었습니다. 노태우는 사망(서거) 때 "과오들에 깊은 용서를 바란다"고 했다고 합니다. 사망 때 노태우의 나이는 만 88살입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그가 사망한 10월 26은 박정희가 암살당한 날이기도 합니다. 전두환, 노태우가 군사반란을 하게 된 역사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그는 내란반란죄로 대통령 대우를 박탈당한 상태지만, 진보 정부는 국가장을 결정했습니다. 이것은 그를 인정해서가 아니라 보수 측에게 화해의 차원에서, 국민 통합의 차원에서 하는 것입니다.
(아래 링크에 전두환 정리 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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