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사태 요약정리 - 12.12 쿠데타 군사반란 요약정리]
국가가 위태로운 상황에 더 위험한 행동으로 군 내부 하극상을 벌였던 1979년 12월 12일의 군사반란을 12.12 사태라고 부릅니다. 전두환의 12.12 쿠데타는 6월 항쟁 등으로 이어지며 대한민국 현대사의 커다란 구분점이 됩니다. 그 배경부터 12.12 사태의 원인과 결과까지 전체적인 흐름을 정리했습니다.
12.12 사태 요약정리
1960년, 제1공화국의 '이승만' 전 대통령은 부정부패와 반민주로 인해 국민의 저항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4.19 의거'입니다. 국민들은 이제 독재를 몰아내고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에 찼습니다. 그러나 1961년, '박정희' 소장은 서울을 방어하는 군부대를 빼돌려서 정권을 차지합니다. 이것이 '5.16 쿠데타'입니다.
(서울을 점령한 반란군 부대. 북한이 오판을 했다면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12.12 사태 요약 군사반란 12.12 쿠데타 정리] / ⓒ joins.com)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은 20년에 가까운 장기 독재를 하다가 '김재규'에게 암살당했습니다. 이것이 '10.26 사태'입니다. 국가적으로는 위기였지만 국민들은 이제는 제대로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나 하고 기대했습니다. 이때를 흔히 "서울의 봄"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1979년 '전두환' 소장은 전방을 지키던 부대까지 빼돌려서 정권을 차지합니다. 이것이 '12.12 사태'입니다.
(당시 보안사령관이며 합동수사본부장이었던 전두환의 기자회견 [12.12 쿠데타 정리 군사반란 12.12 사태 요약] / ⓒ hani.co.kr)
12.12 사태는 12.12 쿠데타, 또는 12.12 군사반란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러나 1979년 12월 12일의 반란은 당시 대통령이었던 "최규하"까지 몰아낸 것은 아니었기에 "사태"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왜냐면, 1980년 5월 17일에 전두환, 노태우, 박희도, 최세창, 장세동 등이 "계엄령"을 확대하고 실제로 정권을 가로채니, 이때를 "5.17 쿠데타"라고 부르기 때문입니다.
(5.17 쿠데타는 군인이 정부와 국민의 정치를 금지하는 행위였다. [12.12 사태 요약 군사반란 12.12 쿠데타 정리] / ⓒ khan.co.kr)
1979년 12월 12일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의 군인들은 군 최고사령관인 "정승화" 참모총장을 잡아넣고 군의 모든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당시 전두환은 10.26 사태를 수사하던 보안사령관이었으며 12.12 사태를 이끌었습니다. 이후, 12.12 군사반란을 반대하던 "장태완", "정병주", "윤흥기" 등은 고문을 받고 쫓겨나거나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12.12 군사반란 원인 요약정리
박정희는 군인 신분으로 정권을 빼앗았기 때문에 군 내부의 지지세력을 중요시했습니다. 자신이 아끼던 부하들을 중요 보직에 앉혔는데, 이들이 모여서 만든 사조직이 하나회입니다. 이들은 특전사를 중심으로 군의 중요한 자리에 앉아서 최대의 실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 상관을 잡아넣은 하극상 사건이 12.12 사태입니다.
(박정희 때부터 키워진 하나회 멤버들 [12.12 쿠데타 정리 군사반란 12.12 사태 요약] / ⓒ 국군보안사령부)
전두환은 당시 10.26 사태를 수사하던 보안사령관이었습니다. 박정희를 시해한 김재규와 참모총장 정승화는 친분이 있는 관계였지만, 정승화가 사건에 관여한 것은 아니었기에 수사결과를 발표할 때까지만 해도 전두환은 그가 무관하다고 말했었습니다. 하지만 정승화는 하나회 조직을 수상하게 여기고 멀리 발령시켜서 떼어놓으려고 했습니다.
(군사 반란으로 참모총장이었던 정승화 대장이 잡혀가고 있다 [12.12 사태 요약 군사반란 12.12 쿠데타 정리] / ⓒ heraldcorp.com)
정승화의 인사 정보가 국가정보권을 차지한 전두환에게 들어갔고, 하나회 군인들은 정승화를 제거하기로 했습니다.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서 정승화가 김재규의 암살에 관여했다고 뒤집어 씌우기로 한 것입니다. 정승화는 상관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반란이므로 전두환이 최규화를 찾아가서 체포 동의를 받아오기로 하고, 반항할지도 모르는 장태완, 정병주 등에게는 파티를 하자고 속여서 따로 초대했습니다.
(제10대 최규하 대통령. 결국은 반란군에 강압으로 하야를 하게 된다 [12.12 쿠데타 정리 군사반란 12.12 사태 요약] / ⓒ imbc.com)
전두환 휘하의 합동수사본부원들은 정승화의 공관으로 가서 그를 체포했습니다. 물론 반항이 있었지만 권총으로 위협하며 끌고 갔고, 그 와중에 총에 맞은 부하들도 있었습니다. 갑작스러운 불법체포 사건의 영문을 몰랐지만 양쪽에서 부대가 출동하여 대치했습니다. 하마터면 시내 전투가 벌어질 뻔했지만 국방부가 중재하여 각자 본부로 돌아가면서 현장은 일단 마무리됩니다.
12.12 쿠데타 이후 요약정리
12.12 사태 자체가 하극상 반란이므로 정승화 체포가 핵심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후 상황은 긴박하게 돌아갔습니다. 총소리에 놀란 국방장관은 어디론가 도망가서 군의 최고 관리자 자리가 비어버렸습니다. 파티에 속아서 전두환을 기다리던 장태완, 정병주 등은 급히 본대로 돌아가서 상황을 파악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정보를 전두환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안개 속이었을 뿐입니다.
(반란군에게 저항했던 정병주, 장태완, 윤흥기 [12.12 사태 요약 군사반란 12.12 쿠데타 정리] / ⓒ Unknown)
나중에야 사태를 파악한 장태완과 정병주, '김진기' 등은 다른 부대를 움직여 막아보려고 노력했습니다. 한편 최규화는 국방장관이 없으니 체포 동의를 못하겠다고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즈음, 노태우는 전방을 지켜야 할 부대를 빼돌려서 서울로 진군했습니다. 하지만 인천에서 윤흥기가 반란을 막기 위해 더 빨리 오고 있었습니다. 시간 상 반란군이 일망타진될 상황으로 역전이 되었습니다.
(반란군은 진압군에게 서로 공격을 금지하자고 속여 놓고는 뒤통수를 쳤다 [12.12 쿠데타 정리 군사반란 12.12 사태 요약] / ⓒ TV영상)
이때 12.12 사태의 반란군은 시간을 벌기 위해서, 북한 남침을 고려하여 서로 공격하지 말자고 제의합니다. 그로 인해 교착상태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도망갔던 국방장관이 하필이면 육군본부에 갔다가 반란군이 시키는 대로 해주기 시작합니다. 그는 각 부대에 저항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리고 최규하에게 체포 동의도 건의합니다. 반란군에 대항하는 상관을 지키려다 목숨을 잃은 '김오랑' 같은 이들의 죽음이 헛되게 되었습니다.
(정병주가 끌려가는 것을 막으려다가 반란군에게 사살된 김오랑의 생전 모습 [12.12 사태 요약 군사반란 12.12 쿠데타 정리] / ⓒ 김태랑)
군 내부의 12.12 쿠데타 결과 강직하게 직무에 충실했던 장태완은 끌려가서 고문을 받고 군에서 쫓겨났습니다. 정병주는 총을 맞고 잡힌 후 역시 쫓겨났고, 김진기도 혹독한 고문 후 예편당했습니다. 대장 직급의 정승화는 고문을 받은 후 이등병으로 계급이 깎였습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이들이 억울하게 죽고 고문당했습니다. 이렇게 12.12 사태 요약정리가 마무리됐습니다.
(박정희 시해의 원인 제공자 차지철과 전두환, 노태우 하나회 군인들 [12.12 쿠데타 정리 군사반란 12.12 사태 요약] / ⓒ imbc.com)
물론 12.12 쿠데타로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국민입니다. 입만 열면 빨갱이라고 뒤집어 씌우던 자들이 국가를 방어하는 병력을 빼돌려서 큰 위기에 빠질 뻔했으며, 그 후 19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가 될 때까지 7년을 군사정권 하에서 더 살아야 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자기편이 아니면 무조건 빨갱이라고 욕하면서 오히려 국가를 좀 먹는 사람들이 아직도 활개 치고 있는 중입니다. 정당 이름만 바꿔가며 그들의 뿌리는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