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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한 지식 칼럼

안병하 경무관 -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바른 경찰

2017. 1. 19.

[안병하 경무관 -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바른 경찰]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피해자 중에는 시위 희생자 외에도 안병하 경무관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동안 경찰은 "정권의 시녀"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안병하 전남도경국장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바른 경찰이 무엇인가를 보여 준 경찰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정권에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 충성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본보기인 것입니다. 





안병하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안병하 경무관은 1979년 호남에 부임했습니다. 안병하 전남도경국장은 부임한지 1년 만에 5.18 광주 민주화운동에 직면합니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5월 16일까지만 해도 일반적인 시위 수준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쿠데타 신군부 세력은 경찰만으로는 치안 유지가 어려우니 군부대 투입을 요청하라고 압력을 넣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안병하 경찰국장은 민간인 시위에 군인이 끼어들면 오히려 시민을 자극시켜서 사태를 악화시킬 것이라고 생각하여 거부했습니다. 1960년 4.19혁명에서 경찰이 학생을 죽게 하여 결국 이승만 정권의 붕괴까지 이어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망록에 의하면 경찰의 명예를 지키고 싶었다고 합니다. 


사진: 5.18 민주화 운동 당시 계엄군이 몽둥이로 시민을 폭행하고 있는 사진. [안병하 경찰국장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사진: 5.18 민주화 운동 당시 계엄군이 몽둥이로 시민을 폭행하고 있는 사진. [안병하 경찰국장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 / ⓒ 광주시청)


하지만 정부에서는 강력한 진압을 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병하 경무관은 정부의 발포 명령을 거부하고 오히려 휘하 경찰들의 총기를 회수했습니다. 이것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우발적인 총격을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상대는 우리가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하는 시민인데 어떻게 총을 들 수 있냐"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5월 18일 이전에는 시민과 큰 충돌도 없었습니다. 5월 18일에 공수부대가 광주에 투입되어 적군이 아닌 시민을 상대로 총을 발포하는 중에도, 부상당한 시민을 치료하고 식당에 데려가서 밥을 사 주거나 새 옷을 제공하는 활동을 했습니다. 


사진: 안병하 경무감의 생전 모습. 바른 경찰이 무엇인지 모범을 보여준 경찰이었다. [안병하 경찰국장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사진: 안병하 경무감의 생전 모습. 바른 경찰이 무엇인지 모범을 보여준 경찰이었다. [안병하 경찰국장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 ⓒ 미상)


국방부에서 발행한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결과 보고서에 의하면, 군부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공수부대 투입에 대하여 "주모자 체포에 단호한 조치"를 취할 것과 "가용수단을 동원한 엄중 처리", "최후의 1인까지 타격해서 체포"할 것을 명했습니다. 이 가용수단이란 말은 매우 무서운 단어입니다. 군대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이란 말이므로, 폭행하든 죽이든 모두 허용하겠다는 얘기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안병하 경무관은 "시위 학생을 철저히 검거"할 것을 명령하면서도 "흩어지는 자는 너무 추격하지 말 것", "부상자가 발생치 않도록 할 것", "연행과정에서 학생의 피해가 없도록 유의"할 것을 경찰 원칙으로 전달했습니다. 


사진: 신군부의 계엄군은 공수부대가 북한군이 아닌 시민과 싸우게 하였다. 민주화 운동 중 구타를 당하는 장면. [안병하 경찰국장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사진: 신군부의 계엄군은 공수부대가 북한군이 아닌 시민과 싸우게 하였다. 민주화 운동 중 구타를 당하는 장면. [안병하 경찰국장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 / ⓒ 518.org)


안병하 전남도경국장은 생전에 기록한 비망록에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현장 경찰들에게 "데모 저지가 경찰의 의무"이지만 "희생자, 시민의 피해가 없도록"할 것이며 "시위자는 주동자만 검거"해야 하고 "경찰봉을 위험하게 휘두르지 말 것"과 "욕설하지 말 것" 등을 주문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안병하 경무관은 "경찰의 국가에 대한 충성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생각이 짧은 사람은 시위를 보호하는 것이 어떻게 국가 충성이냐고 묻겠지만, 큰 의미에서의 충성은 질서정연한 시위를 유지하여 더 큰 문제로 확대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진: 경찰교육원의 안병하 홀에 전시된 설명 전시물. [안병하 경무관 -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바른 경찰](사진: 경찰교육원의 안병하 홀에 전시된 설명 전시물. [안병하 경무관 -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바른 경찰] / ⓒ 안병하 홀)





안병하, 혹독한 고문 끝에 쫓겨나다


1979년은 대한민국에 있어서 큰 변혁이 있던 해입니다. 그해 10월 26일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시해하는 10.26사태가 일어났습니다. 독재정치가 끝나는 줄 알았던 그 해 말, 당시 군인이었던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은 12.12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10.26사태로 인해 잠시 민주화 요구를 중단했던 시민들은 다시 민주화 요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있었습니다. 안병하 경무관은 격변의 시기인 1979년에 전남도경국장에 임명되었으며, 1년 만에 민주화 운동을 맞았습니다. 1980년 5월 18일 ~ 27일 광주에서는 계엄군에 의해 사망, 부상 등으로 4000여명의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사진: 김재규의 박정희 시해 현장 검증 장면. 18년간의 독재가 끝났는 10.26사태. [안병하 전남도경국장, 혹독한 고문 끝에 쫓겨나다](사진: 김재규의 박정희 시해 현장 검증 장면. 18년간의 독재가 끝났는 10.26사태. [안병하 전남도경국장, 혹독한 고문 끝에 쫓겨나다] / ⓒ joins.com)


반독재 학생운동은 갑자기 광주에서 터진 것이 아닙니다. 1975년과 1976년 탄압으로 인해 민주화 요구가 소강상태에 빠졌다가 1977년에 다시 시작되어 1979년에는 전국적으로 번진 상태였습니다. 이미 부마사태에서 박정희 정권이 부산을 대상으로 본보기를 보여주려던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10.26사태로 멈췄다가 1980년 신군부가 정권을 잡은 후 광주를 대상으로 삼은 것입니다. 이때 안병하 전 전남도경국장은 신군부가 강제진압의 빌미로 잡으려던 군부대 투입 요청을 거부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강제 폭력진압과 총기 발포를 요구하는 것도 반대하였습니다. 


사진: 군대가 보유한 총기의 개머리판은 전투시 살인용으로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것이 시민진압에도 사용되었다. [안병하 전남도경국장, 혹독한 고문 끝에 쫓겨나다](사진: 군대가 보유한 총기의 개머리판은 전투시 살인용으로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것이 시민진압에도 사용되었다. [안병하 전남도경국장, 혹독한 고문 끝에 쫓겨나다] / ⓒ 518.org)


하지만 신군부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공수부대 투입을 강행하였고, 안병하 경무관은 휘하 경찰들에게 공수부대와의 협동작전을 펴게 되었으나 인명피해가 생기지 않도록 하라는 당부를 계속 전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부에게 아부해야만 승진할 수 있는 현실에서 안병하에게 큰 짐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5월 22일,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에 대해 항의하던 도경간부들이 계엄군에게 폭행당하는 등 모욕적인 상황이 계속되었습니다. 안병하 경찰국장은 신군부에게 완전히 미운털이 박히는 상황을 맞이합니다. 결국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끝난 후 그는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사진: 당시 안병하의 체포 뉴스화면과 공수부대 투입 후 5.18이 더 혼란스러워졌음을 증언하는 뉴스화면. [안병하 전남도경국장, 혹독한 고문 끝에 쫓겨나다](사진: 당시 안병하의 체포 뉴스화면과 공수부대 투입 후 5.18이 더 혼란스러워졌음을 증언하는 뉴스화면. [안병하 전남도경국장, 혹독한 고문 끝에 쫓겨나다] / ⓒ KBS, MBC)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끝난 후 안병하 전남도경국장은 보안사의 한 건물에 끌려가 있게 됩니다. 그가 체포된 혐의는 '직무유기 및 지휘포기 혐의'였습니다. 안병하 경무관은 보안사의 동빙고 분실에서 10일간 혹독한 고문을 받아야 했습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과 빨갱이 뒤집어씌우기가 시도될 법했지만, 자진사퇴라는 형식으로 전남도경국장을 그만 두며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이때의 가혹한 고문 때문에 안병하 경찰국장은 후유증을 앓게 되었습니다. 거기다가 생활고까지 겹쳐서 힘든 인생을 살다가, 1988년 심부전증으로 사망하였습니다. 그해 광주청문회가 열려서 신군부의 만행이 고발되었지만, 보지 못하고 눈을 감은 것입니다. 


사진: 독재정부 시절 반대자들을 가혹하게 고문했던 건물. 수많은 민주화 운동가들이 여기서 생지옥을 겪었다. [안병하 경무관 -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바른 경찰](사진: 독재정부 시절 반대자들을 가혹하게 고문했던 건물. 수많은 민주화 운동가들이 여기서 생지옥을 겪었다. [안병하 경무관 -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바른 경찰] / ⓒ kdemo.or.kr)






안병하 전남도경국장이라는 사람


보수 극우주의들은 안병하 경무관처럼 정부의 독재적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빨갱이라고 뒤집어 씌우기를 수십 년째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병하 전 전남도경국장은 빨갱이도, 전라도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라는 역사적 변혁에 휘말리고만 공무원이었을 뿐입니다. 

그는 강원도 출신이고 육사 8기생입니다. 군대에 있을 때는 포병장교로 활약하였으며 6.25 전쟁이 일어나자 북한과 맞서 싸운 군인이기도 합니다. 강원도의 북한군 진격을 막아내는 춘천대첩에서, 위험한 정찰임무를 완수한 공으로 화랑무공훈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6.25 전쟁 이후에도 공비 소탕작전 등에서 활약하였습니다. 


사진: 6.28 당시 춘천대첩 지도. 북한의 2군단은 춘천대첩에서 대패하고, 북한군은 전체 전쟁 계획에서도 큰 차질을 겪어야 했다. [안병하 전남도경국장이라는 사람](사진: 6.28 당시 춘천대첩 지도. 북한의 2군단은 춘천대첩에서 대패하고, 북한군은 전체 전쟁 계획에서도 큰 차질을 겪어야 했다. [안병하 전남도경국장이라는 사람] / ⓒ www.kiss7.kr)


군에서 예편한 안병하 경찰국장은 경찰에 들어가서 여러 곳에서 근무하다가 1979년 전라남도 경찰국장이 되었습니다. 이때부터가 그의 운명이 고난에 처해지는 순간입니다. 신군부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시민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싶어 했지만, 안병하 전남 경찰국장은 강제진압 명령을 거부하였습니다. 오히려 시민 안전을 주장하다가 보안사에 끌려가 고문을 받고, 고문 후유증에 의해 괴로운 삶을 살다가 죽어갔습니다. 

안병하 경무관은 유언으로 "자신 판단이 옳았으며 언젠가는 역사가 알아줄 날이 꼭 올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인생의 한을 마지막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안병하 전남도경국장은 국립묘지가 아닌 장호원 공동묘지에 쓸쓸하게 묻혔습니다. 


사진: 경찰 마크는 방패 위에 그려져 있다. 이 방패는 정권을 감싸라는 뜻이 아니라 국민을 보호하라는 뜻이다. [안병하 전남도경국장이라는 사람](사진: 경찰 마크는 방패 위에 그려져 있다. 이 방패는 정권을 감싸라는 뜻이 아니라 국민을 보호하라는 뜻이다. [안병하 전남도경국장이라는 사람] / ⓒ 편집 www.kiss7.kr)


1980년으로부터 7년 후, 대한민국은 6월항쟁이 시작되었습니다. 27년간 지속됐던 군부독재를 종식시키는 역사적 순간이었고, 아시아 최초로 스스로 민주주의를 완성시킨 나라로 기록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도 보수진영은 항쟁했던 사람들을 빨갱이라고 뒤집어 씌웠었습니다. 지금과 다를 바가 없는 현실입니다. 

6월항쟁의 성공 덕분에 과거의 항쟁들도 재조명되었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도 다시 평가 받았습니다. 드디어 안병하 경찰국장도 피해자로 인정되어 그간의 한을 풀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병하 경무관은 후유증으로 병과 투병하다가 이미 운명을 다한 후였습니다. 그 후에도 국립묘지가 아니라 일반 공동묘지에서 보상받지 못하는 '잊혀진 존재'로 남아 있었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사진: 충남 아산의 경찰교육원에 있는 안병하 홀의 건물. 모범경찰, 바른경찰로 기념되고 있다. [안병하 경무관 -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바른 경찰](사진: 충남 아산의 경찰교육원에 있는 안병하 홀의 건물. 모범경찰, 바른경찰로 기념되고 있다. [안병하 경무관 -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바른 경찰] / ⓒ Mapio.net)


2005년, 노무현 참여정부 때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열렸습니다. 그동안 한 서렸던 안병하 경무관의 죽음이 순직으로 인정되었고, 국립현충원에 묻힐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80년 이후의 혼란한 역사가 마무리되는 순간입니다. 이후 안병하 경찰국장의 평가가 새로워졌습니다. 경찰에서도 본받을만한 바른 경찰의 상징이 되어, 충남 아산의 경찰교육원에 '안병하 홀'이 만들어졌습니다. 안병하 홀은 "경찰이 국가에 충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국가에 충성하는 것과 정권에 충성하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를 느낄 수 있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21세기인 지금에도 국가와 정부가 어떻게 다른지도 모르면서 자유민주주의를 외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안병하 경찰국장의 역사에서 교훈을 찾을 수 있는 진짜 민주주의 시대가 정착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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