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길 교수 의문사 사건 2
조작된 죽음, 의문사 사건 1호
서슬 퍼런 정권에서 영영 묻힐 뻔한 진실이 어떻게 드러났을까요? 최종길 의문사 사건의 피해자 동생 최종선의 이야기와 재판 과정, 그리고 국가 판결까지의 사연을 소개합니다.
최종길 교수 의문사 사건은 국가가 아니라 정부에 충성한 자들로 인해 사망에 이른 비극입니다. 이 글에서는 무려 33년 동안 억울하게 살았던 최종길 교수 사건의 가족들과 의문사 1호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내용이 길어서 2부로 연재했습니다. 아래 링크에서 그는 왜 죽게 되었는가와, 그 후에도 권력이 얼마나 치졸했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래 링크는 1부로 이어지며, 원인과 사건의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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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길 교수 의문사 사건 2 - 동생 최종선, 부인 백경자, 아들 최광준의 한]
최종길 동생 최종선의 한
최종길의 동생 최종선의 고통도 심했습니다. 중앙정보부는 그를 불러서 형이 조국을 배반한 것이라는 각서를 쓰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들로 인해 동생의 한은 더욱 깊어졌고, 결국 어떻게든 이 사실을 알려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습니다.
당시 그는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라는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비밀리에 형의 억울함을 남길 수 있는 아이디어를 발견했습니다. 바로 정신병원입니다. 그렇게 해서 입원한 연세대 세브란스 정신병동... 위장 입원은 정말이지 절박했습니다.
1974년, 그는 그렇게 완성된 수기를 진보주의 민주화의 거두인 '함세웅' 신부에게 보관해 달라고 맡겼습니다. 함세웅 신부님은 다시 '김아멜리아' 수녀에게 보관을 부탁하고, 나중에 이 수기가 카톨릭 평화신문 편집국장 '김정남'에 의해 세상으로 나오게 됩니다.
최종선이 억울함을 숨긴 채 다시 중정에 들어가서 일하다가 결국 그만둔 후, 1988년 이 수기가 드디어 세상에 공개되었습니다.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을 넘어, 최종길 교수 의문사 사건의 공소시효가 거의 끝나갈 시점이었습니다.
끝없이 가혹한 세상
이렇게 다시 수사에 들어갔지만... 또다시 보수주의 정권을 탄생시킨 정부의 당시 수사관들은 성의 없는 수사를 했습니다. 심지어, 동생을 정보부 직원으로 착각한 검찰이 "적당히 덮어버리는 거지요"라며 말실수까지 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었습니다.
결국 보수 정부와 한통속인 검찰은 최 교수가 간첩인지 자살했는지의 증거가 없다는 이상하고도 모호한 결론을 내며 수사를 끝내버렸습니다. 검찰이 사건 범인들에게 면죄부를 주고 오히려 사건을 덮은 것입니다.
결국 1심에서 진 유가족들... 동생은 중정에 임의동행되었다고 신문에 난 기사를 보고 법무법인 담당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어서 따졌습니다. 조사를 도와주려고 자진 출두한 것을 마치 잘못해서 연행된 것처럼 변호사가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담당 변호사는 돈만 받아내면 됐지, 그게 무슨 대수냐고 오히려 마음에 상처를 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당시 세상이 다 이랬습니다. 그때 빨갱이라고 욕을 듣던 진보 세력이 민주화에 나서지 않았다면, 지금도 어떤 국민들은 이렇게 당하고 있을 것입니다.
의문사 사건 1호 - 최종길 의문사 사건
최종길 교수의 부인 백경자, 동생 최종선의 한을 풀어준 것은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열리면서부터입니다. 이들은 최종길 의문사 사건의 범인이 '차철권' 조사관이라는 것을 밝혀내고 고문치사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여기에는 당시 중정 직원이었던 양 씨, 공작과장인 안 씨의 증언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하지만 차철권의 상관이었던 안 씨는 "혼내서 자백을 받아내랬지 노골적으로 때려서 받아내라고 한 적이 없다"는 말을 해서 조사 위원들을 술렁이게 했습니다.
억울한 죽음이라고 판결한 것은 누가 봐도 당연한 판단입니다. 그렇게 온몸이 부서지도록 맞아서 일어서지도 못하는 사람이 화장실 소변기를 밟고 올라가서 창을 넘어 뛰어내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소변기 위에는 발자국도 발견되지 않았었습니다.
최종적으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심한 고문으로 죽었거나 가사 상태에서 누군가 사고 현장으로 그를 옮겨 떨어트린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에 보수 측에서는 빨갱이 정부라며 또 욕을 해댔습니다. 그들이 바로 지금의 보수당 지지자의 근간을 이루는 자들입니다.
한 맺힌 33년의 최종길 교수 사건
당시 중앙정보부 소속의 계장 김 씨도, 당시 중정 직원들이 7층 비상계단으로 끌고 가서 밀었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증언했습니다. "여기서 밀어버렸어"라고... 이런 명백한 증언들이 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발표를 안 믿기로 작정한 사람들은 상처받은 피해자들에게 한 번 더 상처를 주었습니다.
이런 역경 속에서도 결국, 2002년 노무현 정부의 의문사위는 최 교수가 죽은 지 29년 만에 공식적으로 국가 기관에 의한 타살이었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동안 설움 속에 뼈가 사무치며 살았던 유족들은 그제야 국가에 소송을 제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33년이 지난 시점... 법원은 유가족에게 18억 4천여만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최종길의 아들 최광준(경희대 법학 교수로 재직 중)은 어머니 백경자의 유지에 따라, 이 보상금 전체를 서울대학교에 기부했다고 합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우리나라는 광복 이후 50년 동안 보수 정부가 집권했는데, 박정희, 전두환 이후 이명박, 박근혜 정부 때까지도 보수 정부만 들어서면 사찰 논란이 자주 일어나고 블랙리스트니, 국정원 공작 사건이니, 검찰 불법 수사니 하는 사건이 계속 터졌습니다. 최종길 교수 사건은 의문사 사건 1호라지만, 결국은 그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아래의 링크에서 이 글의 1부를 읽으세요. (이 사건의 원인과 내막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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