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길 교수 의문사 사건 1
조작된 죽음, 의문사 사건 1호
최종길 사건은 의문사 사건 1호입니다. 최종길 교수 의문사 사건은 개인을 끌고 가서 참혹한 고문을 하고, 사망 상태에 다다르자 자살로 위장하기 위해 살해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권력 기관이 그가 죽은 후에도 장례식까지 감시했던 정권의 문제였습니다.
최종길 의문사 사건의 또 다른 피해자인 부인 백경자와 그 가족... 그들에게 가해진 억울한 사연도 소개합니다.
내용이 길어져서 2부로 나누어 연재합니다. 2부에는 그의 동생 최종길이 어떻게 이 사건을 세상에 나오게 했는지와 사건의 결과에 대한 정보가 있습니다. 아래 링크를 통해서 2부도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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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길 교수 의문사 사건 - 조작된 죽음 최종길, 의문사 사건 1호]
최종길 교수 의문사 사건이란
'최종길' 교수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의문사 사건 1호 피해자입니다. 그는 1931년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서 서울법대에 들어간 후, 독일 유학을 떠나 쾰른대 법학박사가 되었습니다. 그 후 1962년 서울법대에서 강의를 시작했는데, 여기서 그의 운명이 시련을 맞게 됩니다.
당시는 박정희 정부가 1972년 유신체제를 이루고 평생 독재를 하려던 참이었습니다. 경찰은 강압적으로 학교에 들어가서 시위 대학생들을 폭력적으로 연행해 가곤 했습니다. 이에 대해 한마디 한 것이 순식간에 그를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최 교수는 붙잡혀 가는 학생들을 안타까워하며, 대학 총장을 보내서 대통령의 사과를 받아야 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이 말이 중앙정보부에 들어가고, 그는 곧 의심 인물로 지적되어 내사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최종길의 동생 최종선
1973년 당시, 최 교수의 막내 동생 '최종선'은 중앙정보부 감찰실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담당 수사관을 찾아가서 왜 형이 얽혀들었는지 문의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담당자는 이미 조사가 다 끝났으니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동생은 조사하더라도 인격을 해치지 말라고 부탁하고 나온 후, 형을 만나서 조사가 있을 것이니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최 교수는 국민의 한 사람이니 당연히 협조해야 한다며 기분 좋게 말했다고 합니다.
3일 후, 두 사람은 함께 중앙정보부로 향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최 교수는 그 서슬 퍼런 남산(당시 중앙정보부가 있던 곳)에 다 와본다며 웃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두 형제의 마지막 만남이었습니다. 이후, 형은 시신이 되어 발견되고 맙니다.
참혹한 고문과 사망
당시 최 교수는 엄청난 고문을 받았습니다. 쌍욕은 기본이었는데, 잠을 안 재우고 주먹질과 발길질, 몽둥이질 등의 구타가 계속되었습니다. 교수는 그 나이 먹고도 엎드려 뻗치라는 말 한마디에 엎드려서 각목으로 엉덩이를 맞아야 했습니다.
심지어, 모서리 각진 각목을 무릎 뒤쪽에 끼우고 꿇어앉게 한 후, 발로 허벅지를 밟는 고문까지 받았습니다. 보수주의가 극에 달하던 때에 민주화 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당하던 고문 방법입니다. 그의 비명이 밤늦게까지 계속되었다는 증언도 있었습니다.
조사실에 자진 출두한 지 3일 만인 새벽 1시 30분... 그는 중정 건물의 7층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 피가 흥건히 고인 현장을 달려가 본 동생은 말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중정에서는 그가 조사실 화장실 창문으로 뛰어내렸다고 말했습니다.
유럽 간첩단 사건 조작
거기다가 또다시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습니다. 중정이 그가 간첩 사실을 고백한 후, 조직을 보호할 목적으로 투신자살했다고 공식 발표를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가 유럽 간첩단 소속이라고 말했습니다.
더구나 자진 출두한 사실을 감추고, 간첩을 잡기 위한 연행이 있었다고도 말했습니다. 이것은 결국, 중정 직원인 동생이 연행한 것처럼 되어버렸습니다. 형이 죽은 것도 억울한데, 동생이 형을 죽도록 만들었다고 전해지니 환장할 지경이었을 것입니다.
최종길 교수 의문사 1호 사건은 중앙정보부 국내 담당 차장 '김치열'과 대공수사 국장 '안경상'의 지휘 아래 고문치사가 일어나고 철저하게 조작된 사건입니다. 사건이 커질 것을 우려한 중정은 감찰과장까지 나서서 입막음을 하려고 했습니다.
감찰과장은 교수의 동생에게 연락하여, 3천만 원의 보상금을 줄 뿐만 아니라 자녀 교육도 국가에서 책임질 테니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간첩이라고 뒤집어씌우지도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공식 발표는 유럽 간첩단의 간첩이었다고 나왔습니다. 뒤통수를 친 것입니다.
최종길 부인 백경자의 수모
더욱 기가 찰 노릇은 장례마저도 단출하게 가족장으로 하라고 요구하고, 가족들에게는 시신도 보여주지 못하게 금지시켰다는 것입니다. 고문으로 몸이 만신창이가 됐을 것이니 그것을 숨기기 위함인데, 당시에는 다른 고문 사망자들도 이런 식으로 모욕을 당했습니다.
독재 정부는 인간으로서는 최악의 짓도 저질렀는데, 장례식마저 감시하고 참석한 사람들을 통제했습니다. 나중에 성당에서 추모 미사가 열렸지만, 중정의 방해 공작 때문에 최 교수의 부인은 여기에도 가지 못했었습니다.
부인 '백경자'는 모진 수모를 많이 당했습니다. 마지막 가는 남편 얼굴도 보지 못하게 금지당한 데다가, 빨갱이의 가족이라며 아는 사람들도 연락을 끊고 거리를 두었습니다. 심지어 서울대 동료 교수들도 그가 간첩이라며 조의금을 주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최 교수는 서울대에 10년이나 다녔었습니다. 하지만 간첩으로 낙인찍힌 후 서울대는 정산해야 할 월급도 퇴직금도 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최 교수는 그동안 책을 냈었지만, 출판사에서도 인세를 줄 수 없다는 통고를 해왔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 했기에 부인은 직장을 구했지만, 조금만 지나면 빨갱이 가족이라는 소문이 퍼지는 바람에 몇 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옮겨 다녀야 했다고 합니다. 최종길의 아들 '최광준'도 계속 전학을 다니다가, 결국 못 견디고 독일로 유학을 떠나야 했습니다.
아래 링크에서 이글의 2부를 읽으세요. (사망 이후 가족의 수모, 최종적인 판결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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