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웅산 테러 사건 1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희생자
80년대, 우리나라는 끔찍한 사고를 연속으로 당했었습니다. 그 중, 전두환 당시 아웅산 테러 사건이 일어난 날은 1983년 10월 9일이었습니다. 남의 나라에 가서 정부 중요 인물들이 폭탄 테러에 의해 죽은 참혹한 사건입니다.
이 글은 2개의 시리즈로 만들어졌으며, 여기서는 아웅산 폭탄 테러 사건의 배경과 희생자(사망자), 폭발 사건 과정 등에 대해 정리했습니다.
(제2편은 아래 링크를 통해서 마저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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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아웅산 테러 사건 정리 1 - 전두환과 희생자(사망자)]
아웅산 사건의 배경
먼저, 아웅산 테러 사건의 배경을 정리합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83년, 5개국 순방길에 올랐습니다. 원래는 인도, 스시랑카, 호주, 뉴질랜드를 다녀올 예정이었는데, 갑자기 '미얀마'가 포함되었습니다. 당시 미얀마는 '버마'라는 이름으로, 북한과 가까운 나라였습니다.
어느 날 전두환은 미얀마를 방문을 추가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갑자기 사회주의 국가를 방문하겠다는 지시에 청와대에서는 당혹해했지만, 당시는 워낙 보수 독재의 힘이 강했던 한국이었기 때문에 대통령 한 마디에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전두환이 버마를 방문하겠다고 한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당시 한국과 북한이 치열한 외교전을 벌이며 자기 편을 더 많이 확보하려고 혈안이던 때였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퇴임 뒤에도 강력한 권력을 유지하려던 전두환의 사욕도 있었다고 분석됩니다.
한국은 냉전시대였던 1981년 '88 서울 올림픽'을 유치했습니다. 북한은 이를 저지하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소련과 중국마저 올림픽 참가를 결정했습니다. 그러자 북한은 제3세계 비동맹 국가들을 모아서 '세계 청소년 학생축전'을 개최하며, 자신들의 편을 늘리려고 했습니다.
전두환은 왜 미얀마에 갔나
그런데, 당시 미얀마는 한국과 함께 대통령 7년 단임제와 국정자문회의 규정이 있는 유일한 나라였습니다. 실권자인 '네 윈' 장군은 친위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후, 7년 대통령이 되었고, 퇴임 후에도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한국과 똑 닮은 나라였습니다.
전두환의 7년 단임제 대통령 헌법 추진은 네 윈을 모델로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전두환은 사관생도 시절부터 네 윈을 존경했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전두환은 네 윈을 만나고 장기 집권을 위한 벤치마킹을 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드디어 '아웅산 테러 사건'의 날인 1983년에 대한 설명을 할 차례입니다. 첫 방문 국가인 버마에서, 대통령 일행은 미얀마의 독립영웅인 '아웅산'의 묘지를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때 아웅산 사건의 범인인 신기철, 김진수, 강민철이 등장합니다.
공식 자료에 의하면, 이 세 명은 약 보름 전에 미리 미얀마에 간 뒤, 아웅산 테러 사건 3일 전에 몰래 폭탄을 장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기는 의문은 왜 미리 폭탄 검색이 되지 못했냐는 것입니다.
나중에 한국 언론들은 그곳이 성역이라 버마 당국이 검색을 막았다고 보도했지만, '최병효'의 증언에 의하면 그게 아니라고 합니다. 당시 버마 외상에게서 직접 들은 바로는, 막지 않았다고 하며, 실제로 막았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아웅산 테러 사건 - 폭발 사건
그리고 운명의 날인 1983년 10월 9일이 되었습니다. 대통령 참배를 준비하기 위해 우리 측 부총리와 외무장관, 비서관들은 아침 일찍 미리 도착해서 행사 준비인 예행 연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전두환은 영빈관에서 버마 장관의 안내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을 안내해야 할 버마 외무부 장관은 개인 자동차가 고장나서 지각을 하고 말았습니다. 택시라도 타고 오려고 했으나, 워낙 후진국인 탓에 택시도 흔하지 않아서 늦은 것입니다. 그로 인해, 10시 20분에 출발하기로 했던 일정이 4분이나 늦어지게 됩니다.
한편, 대통령이 오기 전인 10시 26분이 되자 버마 대사와 '이계철' 대사도 현장에 도착했습니다. 고급 차의 양쪽에 태극기를 달고 왔는데, 당시 이계철도 대머리에 안경까지 써서 전두환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대통령의 도착이 늦어진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어떤 기사에 의하면, 이때 당시 행사 담당자가 오인해서 대통령도 오기 전에 행사 음악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최병효의 증언에 의하면, 늦는다고 하니 한 번 더 예행 연습을 하자고 해서 진혼곡 같은 것이 시작되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정식 기록에 의하면, 이때 풀밭 은신처 또는 차량정비소에서 테러범이 지켜보고 있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한편 영빈관과 아웅산 묘소까지의 거리는 약 4.5km입니다. 그리고 일정이 4분 늦어진 전두환 일행의 차량은 도착 1km정도를 남기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희생자
마침내 10시 28분, 아웅산 테러 사건이 벌어지고 맙니다. 엄청난 폭발과 함께 건물이 내려앉고, 행사 예행 연습을 하던 장관, 비서실장, 대사, 차관, 경호관 등이 즉사했습니다. 대통령이 10시 30분에 도착할 것이라는 정확한 첩보를 알고 있던 범인 강민철, 김진수, 신기철의 범죄가 이루어진 순간입니다.
이 과정에서 서석준, 이범석, 김동휘, 서상철, 함병춘, 이계철, 김재익 등 17명이 죽었고, 최소 14명 이상이 중경상을 입었습니다. 여기에는 부총리, 장관, 비서실장, 대사 등 주요 관직의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 중, '심상우'는 개그맨 '심현섭'이 아버지라고 합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살아난 것은 천운이었습니다. 버마 외무부 장관이 4분을 지각하지 않았다면 국가적 최고 비상사태가 될 뻔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왜 아웅산 테러 범인들이 폭탄을 일찍 터트렸는지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분명, 오인으로 인한 천운의 실수는 맞는데, 행사 진혼곡이 울렸기 때문에 대통령이 온 줄 알았다거나, 전두환과 닮은 이계철을 대통령으로 잘못 알았다거나 하는 의견이 분분할 뿐입니다. 만약 대통령이 죽었다면 그야말로 전쟁의 위기였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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