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열 열사
1987년 마지막 장면
[이한열 - 박종철 사건 이후 1987 이한열 열사의 죽음 (연세대 시위와 6.10항쟁)]
대한민국은 국민이 자력으로 민주주의를 되찾은 나라입니다. 세계적으로 이런 일은 흔치 않으며, 각 나라에 모범적인 선례가 되었습니다. 한국 현대사 민주화에서 5.18 광주항쟁이 뿌리라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기폭제가 되었고, 이한열 열사의 죽음이 방아쇠가 되었습니다.
이글에서는 1987년 이한열의 죽음을 다루지만, 맨 아래 링크를 보면 박종철 사건의 글도 있으니 꼭 읽어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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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987의 이한열
영화 1987의 마지막 장면에 보면 이한열과 연세대 시위 장면이 나옵니다. 박종철 고문사건을 다룬 영화 1987... 이 영화의 마지막에 이한열이 나오는 것은 그해 6월 29일, 대통령 직선제를 관철시킨 대한민국 민주화에 매우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전체적인 요약을 하자면, 1987년 1월 4일 박종철이 경찰의 고문을 받다가 숨졌고, 6월 9일 이한열이 최루탄에 혼수상태가 되었으며, 이에 국민적인 민주화 요구 시위가 전국을 뒤덮고 6월 29일 정부의 민주화 수용을 받아낸 것이 현대사의 줄거리입니다.
다음 날 6.10 민주항쟁이 열릴 예정이었기에 학생회에서는 "6·10 대회 출정을 위한 범연세인 총궐기 대회"가 열렸습니다. 전투경찰들은 곤봉 등의 폭행으로 강압 진압을 했고, 학생들은 교문 안으로 밀리고 있었습니다. 곳곳에는 최루탄이 터지는데...
전투경찰을 피해 교문 안으로 뛰어가던 이한열의 뒤통수에 최루탄이 정통으로 맞았습니다. 원래 최루탄은 공중으로 쏘는 진압 무기였으나, 학생들을 향해 직선을 발사한 것입니다. 즉, 총을 쏘듯이 살해를 목적으로 발사된 것이기에 국민의 분노가 폭발했습니다.
이한열은 누구?
이한열의 고향은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였습니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재수를 한 뒤 1986년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했습니다. 지금의 대학생이 학업과 취업을 동시에 노력한다면, 당시의 대학생들은 학업과 사회 문제 해결 투쟁을 동시에 노력했었습니다. 그 역시도 시위와 투쟁에 나서게 됩니다.
그가 활동하던 동아리는 만화사랑이라는 동아리였습니다. 영화 1987에서 후에 연희에게 만화동아리에 들어오라고 하던 장면이 그 부분입니다. 정부의 탄압이 너무 심했기 때문에 학생들은 미술이나 음악 동아리에서 학생운동을 하던 시절입니다.
여기에는 그가 큰 충격을 받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있었던 민주화운동의 진실이 담긴 비디오테이프가 해외 교민을 통해 몰래 국내에 들어온 것입니다. 너무나 철저하게 언론의 입을 막아서 당시 대부분의 국민들은 빨갱이 세력이라고 알고 있었고, 지금도 모르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비디오 영상을 본 한열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북한을 방어하라는 군대를 빼돌려서 국민을 죽이는 실화를 보면서 분노를 느끼게 됩니다. 그 외에도 많은 학생들이 이렇게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게 되었고, 그것이 한국 민주화의 시작이었습니다.
이한열 열사 죽음의 의미
박종철 열사와 이한열 열사의 죽음이 왜 중요한지는 역사의 흐름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보수는 변하기 어렵습니다. 심각한 사회 문제는 언제나 중도와 일반 시민이 진보의 편에 섰을 때만 바꿀 수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이 중도의 진보 참여를 이끌어낸 사람입니다.
그들이 희생되기 이전의 민주화운동은 군부가 성공적으로 막아내고 있었습니다. 전국의 학생운동권들은 구속되거나 도망 다니고 있었고,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보수적인 국민들은 빨갱이들이 사회를 어지럽힌다고 그들을 공격했습니다.
그런데, 이한열 열사가 연세대 정문에서 혼수상태에 빠지면서 이런 흐름이 완전히 역전되어버렸습니다. 직장인들이 퇴근 후 민주화 시위를 하기 시작했고, 상인과 일반인들도 시위에 동참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록 영상 등에는 최루탄이 터지고 화염병이 날아다니는 장면들이 주로 나오지만, 그 외의 시위는 평화적이었습니다. 외국에서처럼 폭도들이 상점을 약탈하고 시민을 살해하는 일 따위는, 광주 민주화운동에서도 6.10 민주화운동에서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군대의 총칼 앞에서의 국민들은 용감했습니다.
이한열 민주화운동 이후
그렇게 해서 6.29선언으로 한국의 진정한 민주화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그러나 이한열 열사는 27일의 혼수상태로 지내다가 끝내 이것을 보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가 마지막 남긴 유언은 9일 날 남긴 "내일 시청에 나가야 하는데..."였습니다. (6.10 시위를 말함)
그리고 그해 7월 9일, 민주국민장으로 장례식이 거행되었고 전국적으로 160만 명의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영화 1987에서 이한열이 쓰러진 후 시민들이 모여서 다시 전진하는 것도 이런 현대사의 과정을 상징하는 장면입니다.
여담으로, 배우 신현준은 한열의 1년 후배로, 그가 쓰러지자 친구들과 그 곁을 지켰다고 합니다. 또한 더불어민주당 우상호가 장례식에서 영정사진을 들었고, 배우 우현이 옆에서 태극기를 들었었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그런데 세상은 참으로 참혹한 것 같습니다. 그때 진보 세력을 욕하던 보수 세력은 덕분에 민주화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 지금도 그때와 똑같이 진보를 빨갱이라고 욕하고 좌파라고 몰아붙이니 말입니다. 희생하는 사람과 덕을 보는 사람이 달라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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