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군(중국군) 인해전술 뜻 - 6.25 한국전쟁 인해전술이란]
6.25전쟁(한국전쟁)에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한국군과 UN군은 공포에 질렸습니다. 중공군이 '인해전술'을 하며 밀려왔기 때문입니다. 인해전술 뜻은 "수적 우세를 이용한 전술"을 말합니다.
죽여도 죽여도 좀비처럼 또 밀려드는 적군... 우리 군대가 가진 총알 수보다 적군이 많다면? 전투 중에 이런 적군을 만난다면 정말이지 끔찍한 공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중공군의 인해전술이란 것은 사실일까요? 사실이라면 어디까지 사실일까요? 당시 중국군의 참전과 6.25 한국전쟁의 '1.4 후퇴'의 진실에 대해 다시 살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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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엮인 글]
인해전술이란? - 인해전술 뜻
먼저, 전체적인 상황을 살펴봅시다. 1950년 북한이 6.25 전쟁을 일으킨 뒤, 한국군은 상대가 되지 못하고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났습니다. 그해 9월 15일, UN군은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전세를 역전시켰습니다. 이번엔 우리 측이 파죽지세로 북진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10월 25일, 갑작스럽게 중국 인민군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미 10월 19일부터 26만 명이나 압록강을 넘어와서 숨어 있었습니다. 결국 UN군은 후퇴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유명한 것은 6.25 한국전쟁에서 중공군이 '인해전술'을 했다는 것입니다. 인해전술이란 人(인. 사람) 海(해. 바다) 戰術(전술. 작전 기술)을 의미합니다. 인해전술은 영어로 "Human wave" 또는 "Human sea"라고 부릅니다.
중국군은 정말 사람을 총알받이 삼아서 공격했을까요? 일부는 사실이고, 일부는 아닙니다. 직접 전장에서 싸우는 동안에는 사실이지만, 전쟁 전체를 통해서 본다면 사실이 아니란 이야기입니다.
먼저 6.25전쟁에서의 UN군과 중국인민지원군의 병력 규모를 보면 우리가 아는 것과는 다릅니다. 당시 한국전쟁의 병력 비교를 해보면, 한국군과 유엔군의 병력은 약 53만 명이었고 북한군과 중공군의 병력은 46만 명이었습니다. 이 자료는 중국군이 개입하던 1950년 10월을 기준으로 하는데, 중공군의 병력이 더 적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체 전쟁 상황으로 볼 때는 인해전술이 모든 것을 좌우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중국군의 인해전술은 과장된 부분이 많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인해전술은 사실일까? - 전술 원리
하지만, 실제로 전투를 했던 참전용사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밀 듯이 밀려드는 중국인민군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니 말입니다. 어떤 주장에 의하면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이 2백30만 명이나 참전했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몇 년 동안 참전한 수가 135만 명일 뿐, 중공군의 공격 당시 병력은 30개 사단의 약 33만 명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 병력으로 모든 한국군 + UN군에게 인해전술을 쓴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쯤에서 중간 결론을 내 보자면, 6.25전쟁 전체에서의 인해전술은 사실이 아니지만 일부 제한된 지역에서의 인해전술은 사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 이런 차이는 어디에서 날까요? 그 해답은 행군의 전격전에 있습니다.
중공군은 빠른 행군 속도를 이용해서 많은 병력을 한곳에 모아서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각각의 작전 지역에 분산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우리 측보다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그러니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적군이 더 많아 보였던 것입니다.
1.4후퇴가 벌어지기 전, 1950년 11월에 있었던 '장진호 전투'는 미국 제10군단 병력이 3만 명이었고, 중국군 병력이 12만 명이었습니다. 이들은 미군이 예상하지 못할 정도의 빠른 속도로 부대를 집결시켜서 미군을 포위해버렸습니다.
우리 측은 10월에도 여름 군복을 입고 있을 정도로 북한의 맹추위에 대비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방한용 누비옷 군복을 입고 참전한 중공군은 우리 군 행군 속도의 3배에 가까운 속력을 냈습니다. 추위로 빨리 움직이지 못하는 부대와 추위에도 고속 행군을 할 수 있는 부대와의 차이입니다.
인해전술의 진실 - 구대전법
우리는 이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중공군은 무기가 모자라서 세 명에 한 명씩만 총을 가지고 있었고, 나머지는 꽹과리를 치며 뒤쫓아 오다가 앞 사람이 죽으면 총을 들고 뛰어들었다고 말입니다.
목격자에 의하면 일부는 사실로 보입니다. 무기가 열세인 것도 사실이고 꽹과리로 공포를 준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모든 중국군이 인해전술로 자기 병사들을 죽이면서 전투를 벌인 것은 아닙니다. 베트남 전에서도 공산군은 이렇게 병력집중을 통한 전투를 자주 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국전쟁의 중국군은 그렇게 막무가내 군대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일본과 싸웠고 중국 내전으로 단련된 자들이었습니다. 6.25전쟁의 인해전술은 이렇게 전쟁으로 단련된 군대가 산에서도 무서운 속도로 이동했기 때문에 생긴 인식입니다.
70%가 산악인 한국 지형, 거기다가 매서운 추위... 그런데 중공군은 우리 측이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그들은 하루에 무려 20km의 속도로 행군을 했다고 합니다. 사람 수보다 무서운 것은 이 행군 속도입니다.
강추위 속의 행군 속도가 무서운 이유는, 중국군의 '구대전법' 때문입니다. 그들은 격파할 부대를 미리 정해놓고 갑자기 주변 중국군을 집결시켜서 U자 형태의 매복을 합니다. 그 안으로 상대 부대가 들어오면 엄청난 속도로 우회해서 뒤쪽을 차단하고 포위합니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갑자기 예상하지 못하던 엄청난 병력이 나타나서 사망을 포위하니, 상대 병력이 더 많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전선을 대치한 상태에서 벌어지는 인해전술과 다른 의미입니다. 나폴레옹이 구사했던 기동 각개격파라고 보는 것이 더 맞습니다.
6.25전쟁(한국전쟁)의 상황
이들을 막을 방법은 엄청난 화력으로 집중 공격을 가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미국과 달리 무기가 강하지 못한 한국군은 중국군만 보면 맥을 못 추었습니다. 현리-한계 전투 등을 통해서 중공군에 의해 한국군은 2개 군단이 무너지는 참패를 당했습니다.
인해전술 뜻은 사람으로 바다처럼 채워서 공격하는 전술이라지만, 공식적으로는 중국군이 이 작전을 수행한 적은 없습니다. 이 상황은 한국전쟁 후반에 미군의 공군력 등이 한국군까지 커버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UN군은 중국군의 9.1배나 되는 포탄 소모량으로 이를 극복했습니다.
6.25전쟁(한국전쟁) 동안 중국군 사상자는 약 59만 명입니다. 미군 사상자가 13만 명이니 정말로 인해전술로 중공군이 죽은 것 같은 오해가 듭니다.
그러나 이는 당시의 소련, 중공의 공통적인 물량작전 때문이었습니다. 즉, 불리하다고 해서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증원 부대를 더 모아서 보내는 전술입니다. 독소전쟁 초기의 독일과 소련의 병력 손실비는 1대 20이나 됐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곧 인해전술이라는 오해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국전쟁의 인해전술은 국지적으로 당하는 입장에서는 사실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으로 결론을 낼 수 있겠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한국전쟁 인해전술의 핵심만 다시 정리하자면...
- 동부 전선에서는 아니었지만, 서부 전선에서는 사실이었다.
- 미군에게는 일부만 사실이지만, 한국군에게는 모두 사실이었다.
- 그 이유는 중공군이 약체인 한국군 방어지역에 더 많은 부대를 배치해서 더 집중적으로 공격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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