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 반 호이엔
튤립 파동(버블)이 만든 풍경화 화가
[얀 반 호이엔과 튤립파동(버블) - 네덜란드 풍경화의 거장이 된 화가의 일화]
'데보라 모가츠(Moggach Deborah)'가 쓴 소설 《튤립 피버》는 네덜란드의 튤립 버블(파동)을 배경으로 하는데, 그 모티브가 된 사람이 '얀 반 호이엔'입니다. Jan van Goyen(얀 반 호이엔)은 네덜란드의 대표적인 풍경화 화가입니다.
그런데 그가 네덜란드의 유명 화가가 된 배경에는 엉뚱하게도 투기 열풍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1630년대를 뜨겁게 달궜던 튤립파동(버블)이었습니다. 이때 화가의 일화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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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얀 반 호이엔의 일화
'얀 반 호이엔'이 유명한 화가가 된 것에는 그의 화풍에 가장 큰 이유가 있습니다. 남들은 비싼 캔버스에 화려한 물감 색상으로 그림을 그릴 때, 그는 저렴한 나무 패널에 회색에 가까운 풍경을 그렸기 때문입니다.
한편 그가 살던 시대의 네덜란드에는 엄청난 쇼크가 있었습니다. 튤립 가격이 폭락하면서 여기에 투자했던 사람들의 엄청난 돈이 공중에서 증발한 것입니다. 그의 그림은 당시의 이런 사회의 분위기가 잘 느껴지므로 더욱 유명합니다.
얀은 가난한 가정에 태어났으나, 재능을 알아본 부모의 헌신 속에 화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서른다섯에 네덜란드의 중심도시 헤이그에서 화랑을 내고 제자를 가르치는 위치까지 오르게 됩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서서히 줄어들더니, 겨우 1년 만에 화랑을 닫아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술에 관심이 없고, 온통 다른 것에 정산이 팔린 것 같았습니다. 물론 얀만 모를 뿐 다른 사람들은 다 아는 것이 있기는 했습니다만...
튤립버블, 거품의 시대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얀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뜬금없게도 그것은 튤립이었습니다. 튤립의 수요가 계속 늘었지만, 씨앗을 심은 후 3년에서 7년 정도가 지나야 꽃을 피우기 때문에 공급이 쫓아가지 못했습니다.
튤립의 원산지는 터키였고, 당시 유럽의 경제대국은 네덜란드였기에, 경제적 여유가 있는 네덜란드의 식물 애호가들은 튤립을 고가에 사고팔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유럽의 다른 지역에 원예 식물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독일에서 종교 전쟁(30년 전쟁)이 벌어지면서 튤립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게 되었습니다.
당시 유럽은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가 전쟁을 벌였습니다. 보헤미아 왕국과 신성 로마제국이 전쟁을 하면서 작물 농사가 큰 피해를 보았습니다. 작물이 흉작이란 것은 가난한 자들에게 큰 고통이었지만, 돈 많은 자들에게도 난감한 것이었습니다. 투자해서 돈을 벌 대상이 줄어들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눈을 돌린 것이 바로 튤립이었습니다.
튤립 파동의 원인
투자를 할 곳이 한정되자 튤립의 가격이 마구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튤립버블의 심상찮은 역사가 시작됩니다. 이 튤립파동 사건은 역사상에 기록된 첫 번째 투기 폭락의 역사로 기록되는 사건입니다.
투자자들의 돈이 한 곳에 몰리자 당연히 튤립의 공급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투자할 곳이 마땅치 않자 그들은 "선물거래"라는 것을 시작했습니다. 선물거래란 물품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예상 생산량을 가지고 미리 거래하는 것입니다.
튤립을 구할 수 없게 되자, 사람들은 튤립을 키우는 농장과 계약을 한 계약서를 큰돈을 주고 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계약서는 또 금액이 부풀려져서 다른 투자자에게 팔렸습니다. 당시 튤립의 금액은 장인 수입의 열 배나 될 정도였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얀 반 호이엔도 화랑을 판 돈을 긁어모아서 튤립 선물을 사기 시작했습니다. 약간의 돈을 만지자, 얀은 그림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투기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는 있는 돈을 더 긁어모아서 몽땅 투자에 쏟아부었습니다.
투기로 망한 얀 반 호이엔
튤립 버블이 최고의 거품으로 커진 것은 1637년 2월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사람들이 정신을 차려버렸습니다. 갑자기 튤립 선물 거래가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주가가 등락하는 가장 큰 요인은 사람의 심리입니다. 이것은 곧장 구매심리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남들이 안 사기 시작하자 사람들도 투자 흥미를 잃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너무 급속도로 이루어지면서 튤립 폭락이 시작되었습니다. 단 몇 개월 만에 90% 이상으로 가격이 떨어져 버렸습니다.
어찌 보면 얀 반 호이엔은 참 운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헤이크 공무원에게서 엄청난 돈을 주고 계약서를 만든 후에 튤립 파동이 일어났으니 말입니다. 그로 인해 그는 천문학적인 돈을 빚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가 돈을 갚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그림을 그리는 것뿐... 미친 듯이 그림을 팔아야 할 상황을 맞은 얀 반 호이엔은 죽을 때까지 무려 2천 점이 넘는 그림을 그려댔습니다. 한편 네덜란드는 이 사건 때문에 영국에게 경제대국의 자리를 내줘야 했습니다.
풍경화의 거장 얀 반 호이엔
네덜란드의 튤립버블이 꺼지게 된 이유는, 투자가 너무 과열되면서 모든 사람들이 채권자인 동시에 채무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돈을 빌려 계약서를 사고, 계약서를 산 사람은 그것을 담보로 다시 돈을 빌리는 악순환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너무나 다툼이 많이 일어나고 각종 로비가 끝도 없자, 시당국이 조사가 끝날 때까지 튤립 거래를 보류한다고 결정하면서 결정타를 날린 것이 튤립파동입니다. 그러나 이런 투자는 어차피 다른 요인에 의해서도 꺼질 수 있는 거품입니다.
네덜란드의 튤립버블 이후, 얀 반 호이엔은 물감을 살 돈도 모자라서 무채색 같은 그림을 그렸습니다. 하지만 미술 애호가들은 옅은 채색이 무채색에 가깝게 그려진 그림을 보고 안개가 낀 듯한 묘한 분위기라며 좋아하기 시작했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투자라기보다는 투기를 했던 화가, 그래서 그 빚을 갚기 위해 그림을 그려야 했던 화가 얀 반 호이엔은 그로 인해 17세기를 대표하는 풍경화 화가로 인정받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의 그림을 헐값에 사들인 사람들은 지금 돈방석에 앉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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