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강공주와 온달장군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실화
[평강공주와 온달장군 - 고구려 평원왕 시대 바보 온달 역사 실화]
고구려 시대, 평원왕 때는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의 역사 실화는 무엇일까를 탐구하려고 합니다. 온달장군은 정말 바보였을까요? 정말로 평강공주와 결혼해서 성공한 것일까요? 이런 의문들은 실제 역사와 비교하며 설명합니다.
당시 실제 역사를 이해하면 이런 궁금증도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장수왕 이후 영양왕까지의 역사 공부도 함께 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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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원왕과 온달 장군
'바보 온달'과 '평강 공주'는 실존 인물입니다. 그들이 죽은 후 약 600년 후인 1145년에 '김부식'이 만든 《삼국사기》의 열전 충신편에는 10여 명의 충신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중에서 제45권 "온달조"에 실제로 온달 장군과 평강공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온달은 고구려 제25대 임금인 '평원왕' 시대에서부터 '영양왕' 시대까지(6세기 후반)의 사람입니다. 그와 같은 시기에 '을지문덕', '연개소문' 같은 쟁쟁한 장군이 있었습니다.
평원왕은 장수왕이 죽은 지 70년 후 쯤의 왕입니다. 6세기 후반부터 신라가 강해지며, 장수왕이 넓힌 영토를 다시 빼앗아 가고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북쪽에서는 북제라는 나라가 압박을 해 오는 시기입니다.
이때 온달 장군이 나타나서 북제의 공격을 막아냈고, 그는 '대형'이라는 벼슬을 받습니다. 그 후 신라가 빼앗아간 땅을 찾아오려고 전투를 벌이다가 590년에 아단성에서 죽었습니다.
실제 인물 바보 온달
그러면 온달 장군은 정말로 바보였을까요? 정확히 어디가 모자란다는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생긴 것이 우습게 생겼고 너무 착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그가 특이하게 생겼다는 기록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어떤 학자들은 이 부분에서 그가 외국인이 아닐까 하는 학설을 내놓고 있습니다. 북방 돌궐족의 갈래인 '키르키스족'이었기 때문에 이상하게 보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처용'이나 '탈해'도 이민족이며 역사에 독특한 외모를 가졌다고 표현됩니다.
그가 받았다고 하는 대형 자리도 고구려 12관등 중에서 높은 직위인 6등급에 해당하니, 그 시대엔 고구려를 대표할만한 장군 중 하나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다만, 일찍 죽었기에 더 높은 자리에 오르거나 엄청난 공을 세우지 못하여 덜 유명할 뿐입니다.
또한 평강공주와 바보 온달 이야기에는 미천한 백성으로 나오지만, 고구려에서 그 정도 자리에 오르려면 적어도 중간 이상의 가문이어야 하기 때문에, 실제 배경은 나름 교육을 잘 받은 귀족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평원왕과 평강공주
평강이란 것이 실제 이름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평원왕을 '평강상호왕'이라고 부르기에 그렇게 부르게 되었습니다. 평원왕의 초기의 고구려는 강력한 왕권이 있던 시대는 아니었습니다. 6세기는 고구려의 귀족이 재편되는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한 후, 북방계와 남방계의 치열한 내분이 있었습니다. 귀족 세력 간에 천도 후유증이 심했던 것입니다. 이에 평원왕은 기존 귀족 세력과 다른 보호 세력을 키워서 왕권을 강화해야 할 입장이었습니다.
온달 장군이 왕의 사위가 되고 파격적인 승진을 한 배경에는 결국 평원왕의 왕권 강화가 있었다고 봅니다. 어느 쪽에 편들어서 귀족 대결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왕권에만 충성하는 것이라면 하급 귀족 계급을 키우는 것이 중요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주와 결혼시켜서 신진 세력을 사위로 두고 키웠을 것이라는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그러므로 설화에서처럼 평강공주가 바보를 인재로 키워낸 것으로는 보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평강공주의 최후는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연개소문의 집권 때 화를 당했을 것을 보고 있습니다.
온달 장군과 평강공주
온달은 평원왕의 다음 왕인 영양왕 때에도 왕권의 뒤를 지켜주는 지지세력으로 존재했었습니다. 그러나 590년의 그가 사망하고, 618년 영양왕이 죽으면서 왕권 약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영양왕 1년인 590년, 온달 장군은 마지막 전투인 죽령 서쪽의 땅 전투에서 쏟아지는 화살에 맞아 죽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곳은 장수왕 때 고구려의 땅이었으나, 신라가 강해지면서 빼앗긴 땅입니다. 장소는 아차산성이거나 온달산성으로 보입니다.
아차산성의 위치는 현재 서울 광진구의 한강 근처입니다. 그리고 온달산성의 위치는 충북 단양군의 남한강 근처입니다. 아차산성은 백제가 고구려를 막기 위해 세운 성이고, 온달산성은 온달이 신라와 싸우기 위해 만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이는 차(且)의 한자와 단(旦)의 한자가 비슷하기 때문에 혼동이 생겨서 의견이 다르게 된 것입니다. 아무튼, 온달산성은 남한에서는 보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적성총이기 때문에 학계의 관심이 높은 곳입니다. 평강공주의 바보 온달이 마지막을 맞은 곳은 아직도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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