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상팔국과 석우로장군을 아시나요? 서기 3세기 가야시대 이야기]
포상팔국은 한반도 남부지방의 해안선을 따라 존재했던 8개의 나라를 말합니다. 삼국시대 초기에 가야국의 남부 지역에 있었습니다.
3세기에 포상팔국은 가야와 대전쟁을 하게 됩니다. 여기에 끼어들은 신라와도 전쟁을 벌였습니다. 이때 승리의 주역이 된 신라의 장군이 석우로입니다.
그러나 가야는 이겼어도 미래가 밝지 않았습니다. 석우로도 유명해졌지만 비극적으로 삶을 끝내게 됩니다.
가야와 포상팔국의 성장
역사에서 배웠듯이 한반도 남부에는 마한, 변한, 진한의 무리가 있었고, 그 중에서 마한이 으뜸이었습니다. 초기엔 변한의 작은 나라들의 왕은 마한에 의해 책봉될 정도로 마한의 위세가 강했으나, 마한이 백제에게 패퇴하면서 변한과 진한 지역에 가야와 신라가 세워지게 됩니다.
가야는 서기 전후로 국가형성이 시작되어 서기 42년에 건국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삼국과는 달리, 여러 작은 나라가 연합한 국가연맹 체제였습니다.
가야는 연맹의 중심국에 따라 2개의 시대로 나눌 수 있는데, 초기의 가야는 금관가야(구야국)를 중심으로 6가야의 나라가 있었다고 합니다. 6가야는 현재 경상도의 김해, 고령, 함안, 고성, 성주, 창녕에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이외에도 작은 나라들이 더 많이 존재했는데, 그 중에 포상팔국도 있습니다. 이들은 지금 경상도의 창원, 칠원, 고성, 사천, 그리고 전라도의 나주 지역 등 입니다.
현재 5개국의 이름이 확인되며 골포국, 칠포국, 고사포국, 사물국, 보라국 등 입니다.
가야의 발달원인은 평야지대의 비옥한 땅과 김해지역의 풍부한 철입니다. 당시 철은 고급무기이며 특히 중요한 광물이었습니다.
가야는 이를 채굴하여 수출하고 신라와 왜에 중계무역을 하여 해상왕국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왜는 철 기술이 전혀 없었기에 가야의 존재는 중요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익을 가야의 중심인 금관가야(구야국)가 독차지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2~3세기의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부여의 관계 지도)
포상팔국과 가야의 전쟁, 신라의 참전
포상팔국의 뜻은 강의 입구에 있는 8개의 나라라는 뜻입니다. 남쪽의 여덟 개 나라인 포상팔국은 금관가야가 독점하다시피 하는 해상무역권을 가져가고 농경지확보를 위해서 가야에 반기를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야에 내전이 일어난 것입니다.
서기 209년, 포상팔국은 연합해서 가야를 공격하기로 합니다. 포상팔국은 해전에 강했기 때문에 해군도 동원하여 육상과 함께 공격에 들어갔습니다. 금관가야는 갑작스런 반란에 다급해졌습니다.
급히 신라에 구원군을 요청했습니다.
10대 신라왕 내해 이사금은 가야의 구원군 요청에 태자 "석우로"와 이벌찬 "이음"을 출병시켰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이견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가야가 신라보다 훨씬 부자나라이고 강국이었는데 왜 신라에게 도움을 청하는 상황이 되었을까하는 의견입니다.
이 주장을 하는 역사학자들은 포상팔국의 난이 실제 일어난 것은 4세기인데, 신라 계통의 김부식이 신라의 역사를 늘리려고 역사를 끌어올려 적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하여튼 현재의 정설로는 3세기 초반으로 되어있는 포상팔국의 난에 신라가 끼어들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석우로는 내해 이사금의 아들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석우로와 이음은 포상팔국 군대를 물리치고 승리의 주역이 되었다고 합니다.
석우로 외에도 신라에는 물계자라는 명장이 있었는데, 왕손에게 밉보여서 공을 인정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물계자는 이를 탓하기 보다는 자신이 부족해서라고 말하며 거문고를 들고 산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이후 국선도에서는 물계자를 대선인이라고 부릅니다.
(6가야(김해, 고령, 함안, 고성, 성주, 창녕)과 포상팔국, 마한, 진한의 관계 지도)
석우로의 끔찍한 죽음과 이상한 신라
석우로의 활약으로 포상팔국은 첫 번째 전쟁에서 졌지만 이후에도 두 차례나 더 공격을 했습니다. 이번에는 직접적으로 신라변경과 울산 인근까지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싸움에서 진 포상팔국은 결국 힘을 잃어서 주변 강국에 흡수되며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이 전쟁으로 가야도 힘을 잃어 신라의 정치 간섭을 받게 됩니다. 가야왕의 아들이 신라에 볼모로 잡혀 있기도 했습니다.
포상팔국은 전쟁으로 사라지는 비극을 맞았는데, 가야도 굴욕을 당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신라의 국력이 가야를 앞지르는 순간입니다.
석우로는 이후에도 왜를 막아내고 백제를 공격하며 반란을 진압하여 승승장구했습니다.
전쟁 중에는 직접 병사들과 함께하며 병사를 돌보았기에 마음이 따뜻한 장군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내해 이사금이 죽고 조분 이사금을 거쳐 신라 12대 왕인 첨해 이사금이 됐을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일본의 사신을 대접하게 되었는데 석우로가 말실수를 하게 되었습니다.
왜의 왕을 쳐부수어 소금장수로 만들겠다고 모욕을 준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왜의 왕이 노하여 3세기 중반에 신라로 쳐들어 왔습니다.
석우로는 전쟁을 무마시키기 위해, 지난 일은 말 실수일 뿐이라며 해명을 하려고 왜군을 찾아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왜는 오히려 석우로를 붙잡아 산채로 불에 태워 죽여 버렸습니다. 이상하게도 신라는 자기 나라의 대장군을 잃고도 왜를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석우로의 아내가 복수를 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왜의 사신이 신라에 오자 스스로 대접하겠다고 하여 불러들인 후 역시 불태워 죽였다고 합니다. 왜는 신라와 달리 쳐들어와서 금성을 공격했으나 싸움에 지고 물러가야 했습니다.
석우로가 죽을 때 태어난 아들이 있었는데, 이 아이가 나중에 신라 16대 왕인 흘해 이사금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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