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나일본부설에서 한반도남부를 통치했다는 신공(진구) 왕후]
역사 왜곡이 심하기로 유명한 일본의 "서기"에 근거해서, 일본은 4~6세기에 한반도의 남부를 일본이 지배했다며 임나일본부설과 삼한정벌설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때 나오는 일본의 지배자가 신공황후입니다.
혹은 진구황후라고도 하는데 19세기에 일본 지폐에 등장하기도 했던 인물입니다. 이 진구황후 또는 신공황후는 일제가 한반도 침략의 당위성으로 활용한 인물이이기도 합니다.
신공왕후는 어떤 인물인가?
국내 사전을 찾아보면 진구황후, 신공황후라고 나오는데, 일본측 사료를 존중한다는 의미는 있겠으나 고쳐져야 할 일입니다. 일본인들은 천황이라고 부르지만 황제의 요건은 되지 못하니 그냥 진구왕후, 신공왕후라고 해야겠습니다.
일본이라는 국호도 겨우 7세기 중반에 생긴 것이니 신공왕후 시대는 이제서야 고대국가로 자리 잡는 시대입니다. 삼한정벌설에 의한 규모 정도의 정권이 있을 시기가 아직 아닙니다.
(임나일본부설과 삼한정벌설의 중심인 신공왕후에 대한 일본측 그림)
신공왕후의 생존연대는 복잡합니다. 처음엔 170년에 태어났다고 했었는데, 일본서기의 기록연대가 다른 사서들과 맞지 않아서 지금은 4세기경에 살았던 인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신공왕후는 100세가 되도록 살았으며, 남편 "주아이왕"이 일찍 죽자 아들 "오진왕"을 대신하여 약 70년간 섭정을 했었다고 합니다. 오진왕은 일본에서 실질적인 최초의 천황이라고 말하는 인물입니다.
오진왕은 사실상 야마토국을 건설한 일왕입니다. 일본 입장에서는 실질적인 국가가 탄생되는 기반을 신공왕후가 마련한 셈이니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다가 가야지역을 정복하고 임나일본부를 두었으며 신라를 정벌한 후 백제와 고구려마저 속국이 되었다고 하니 신공왕후만큼 국가의 탄생을 화려하게 장식할만한 인물을 다시 찾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신공왕후의 삼한정벌설은 조선침략의 정당성을 강조하며 역사적 근거로 홍보되기도 했습니다.
(일본제국주의 시대에 발행된 일본 지폐에 나타난 진구왕후)
삼한정벌설과 신공왕후설이 생기게 된 이유
하지만 신공왕후는 워낙 각색된 역사가 많아서 정확히 누구인지, 실존인물인지 조차도 주장들이 복잡합니다.
어떤 주장에서는 3세기에 중국 삼국지와 한국 삼국사기에 거론된 무녀왕 "히미코"라고도 하고, 또 어떤 주장에서는 히미코의 딸 "미요"라고도 합니다. 또는 "덴노"일 것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그래서 신공왕후는 오진왕과의 관계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120년의 역사를 거꾸로 되돌려 삽입한 역사라는 의혹도 받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나돌고 있는 임나일본부설을 설명하는 고대 상고사 지도)
일본서기는 720년경에 쓰였습니다. 삼한정벌설을 주장한 해와 400년 가까이 차이가 납니다.
백제는 신라와 당나라에 의해 660년에 멸망했고, 663년에는 백제를 다시 일으키고자 복신과 도침, 백제 왕자 부여풍이 왜의 파병군과 함께 백강구전투(백촌강전투)를 벌이다가 참패를 당했습니다. 백제멸망 이전부터 왜에는 백제의 지배층이 건너가 있었고, 멸망 후에도 20만여 명이 건너간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본서기가 쓰여질 당시는 상황적으로 왜가 본국인 백제를 그리워하며 신라를 원수처럼 바라봤을 시점입니다.
에도시대와 일제시대 때까지는 실존인물이라고 믿고 있었으나 2차대전 종전 후에는 일본에서도 실제로 신공왕후가 있었다는 설은 폐기됩니다. 덴노와 역사적 사실이 혼동되었으니 덴노 이야기를 섞어 창작된 것이 아닐까하는 것이 지금의 정설인데, 덴노는 7세기에 백제부흥운동 때 지원병을 보낸 일본의 여왕입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3세기 신라시대에 장군 석우로가 일왕에게 모욕을 주자 왜가 신라를 침입해서 석우로를 죽였다는 자료가 나옵니다. 이 역사도 섞여서 신공왕후 삼한정벌설이 생성되지 않았을까 보입니다.
(19세기 일본교과서에 실린 삼한정벌설 삽화. 신라왕이 신공왕후에게 항복하고 있다)
허황된 일본서기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일본사기를 보면 신공왕후가 신라를 치기위해 바다를 건너오니 신라왕이 겁을 먹고 싸우지도 않고 스스로 결박한 채 신공왕후에게 항복을 해 왔다고 합니다. 4세기에는 있지도 않은 일본이란 국호를 거론하며 일본은 신의 나라이니 당연히 신라가 속국이 되겠다고 했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백제와 고구려도 신공왕후를 찾아와 조공을 바치며 자신들도 일본을 모시겠다고 했다는 것이 일본사기의 기록입니다. 신공왕후의 삼한정벌설은 허황되기 그지없습니다.
(여러가지 형태로 남아있는 일본서기. 신화와 설화가 중심이 된 역사서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한민족의 책임도 있습니다. 우리조상들이 상고사를 소중히 여길 줄 몰라서 가야, 발해 등의 비주류국가들에 대한 역사기록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조선 말~일제 초의 김택영, 장지연 같은 학자들도 일본서기가 아무리 허황되지만 사실 자체까지 꾸며낸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역사를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우리 후손이 또 이렇게 될지 모릅니다.
오직 신채호 같은 민족사학자만이 허구임을 반박할 뿐이었습니다.
다행히 2010년에 한일 학자들이 공동연구를 해서 임나일본부라는 용어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기로 합의한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법적 강제규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삼한정벌설과 임나일본부설을 일본이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또한 임나일본부라는 명칭은 쓰지 않더라도 가야지역에 왜가 활동했을 수도 있다는 단서를 달아둠으로써 문제의 여지는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실제로 일본 교과서들 중에는 임나일본부가 아니라 "임나"라는 단어로 바뀌어 계속 출간되고 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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