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흥숙 사건
[무등산 타잔, 박흥숙 사건 - 영화와 철거 빈민의 비극 정리]
무등산 타잔 박흥숙 사건을 정리하자면, 강압적인 철거 단속반원과 가난한 철거민이 충돌하던 중 4명을 죽이고 1명이 중상을 입은 사건입니다. 그러나 핵심이 살인사건에만 머무른다면 이 사건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본주의 우선의 개발 논리와, 강압성이 강한 보수 정권의 문제에서 보아야 이해가 되는 사건입니다.
극악무도한 살인범에 간첩 소문까지 퍼지며 사회적으로 매장당한 박흥숙, 그가 1980년 공안 정국 속에서 사형을 당할 때까지의 비극을 정리합니다. 사회는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지를 되돌아보는 시간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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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 타잔이라고 불리게 된 사연
20세기 중부반의 한국은 엄청난 경제성장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는 가난한 자들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농촌에서 도시로 몰려들며 농촌은 피폐해졌고 도시에는 빈민들이 넘쳐났습니다. 자본주의는 그들을 싼 임금으로 부려먹기 위해서 이용했지만, 나중에는 도시 계획을 한다며 철거민으로 내쫓기도 했습니다.
자본가들은 돈을 벌고 성장했지만, 그 노동자들은 젊을 때 몸을 학대했기에 말년에는 고질병에 시달리다가 죽어갑니다.
무등산 타잔 박흥숙 사건은 어릴 때부터 찢어지듯 가난한 환경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의 가정은 원래 가난했지만, 아버지가 일찍 죽고 큰형마저 죽자 더 심하게 고생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박흥숙은 소년 가장처럼 살았는데, 주변의 기억에 의하면 홀어머니와 여동생을 보살핀 효자였다고 합니다.
어린 박흥숙은 중학교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했지만 돈이 없어서 중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고, 그의 여동생은 남의 집에서 식모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꿈을 잃지 않는 그는 열쇠수리공으로 일하면서 돈을 모았다고 합니다.
흔히 말하는 주경야독... 그는 학업에 미련이 남아서 일하며 공부했습니다. 그렇게 노력한 끝에 검정고시에 합격했고, 그 후엔 사법고시도 준비하며 성실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그는 공부를 하기 위해 무등산에 움막을 짓고, 가족들도 그곳으로 불러 모았습니다. 그를 무등산 타잔 박흥숙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하지만 굶주림에 허덕이는 것은 마찬가지여서, 이웃의 가난한 서민들마저 음식을 모아서 갖다주기도 했었습니다.
이때 체력적 허약함을 깨달은 그는 '정도술'이라는 책을 읽고 스스로 '와장창'이란 무술을 연마했다고 합니다. 정도술이란 구한말 동학군이 읽던 책인데 그의 집안에 가보로 내려오고 있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와장창이란 그가 붙인 무술 이름입니다.
끔찍한 박흥숙 살인사건
마침내, 무등산 타잔 박흥숙 사건은 1977년 4월 20일에 터지고 맙니다.
무등산이 도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거기에 살고 있는 무허가 집들을 정리하라는 윗선의 지시가 떨어진 것이었습니다. 당시는 군부 독재가 들어서고 사회 전체가 군대처럼 상명하복으로 돌아가던 때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풍토는 진보하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아직도 구석구석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광주시 소속의 건설 반장과 철거반원들이 들이닥쳐서 욕을 하며 거칠게 철거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사정하는 입장이었고, 함께 살림을 옮기면서 철거에 협조하기도 했었습니다.
진짜 문제는 이제부터 벌어집니다. 먹고 살기 위해 박흥숙의 어머니가 무당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30만 원을 모았고, 그 돈을 지붕 위에 숨겨놨었는데 철거반원들이 집에 불을 지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욕설이 이어졌고 첫 번째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그 와중에도 병든 할아버지 할머니가 사는 이웃집만은 좀 봐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철거단은 알았다고 해 놓고 그 집마저 불태워버렸습니다. 그러는 중에 철거반원들의 욕설과 폭언은 계속되고... 우리가 철거민 영화에서 자주 보던 폭력 장면은 거짓이 아닙니다. 당하는 사람이 힘없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사회적 이슈가 못됐을 뿐...
참다못한 무등산 타잔 박흥숙은 사제 총을 꺼내서 그들을 위협했습니다. 당시 신문에서는 그를 폭도로 몰기 위해서 사제 총까지 갖춘 살인마로 기사를 냈지만, 이것은 국민들의 관심을 끌어서 광고를 받기 위한 자본주의 행태입니다. 실제 그가 만든 것은 쇠파이프에 딱총처럼 발사 기능을 넣어 만든 정도였습니다.
어릴 때부터 열쇠공으로 쇠를 깎는 일을 했으니 만들 수 있었을 뿐이며, 산에 살기 때문에 난폭한 산짐승이 오면 쫓아내기 위해서 만든 것일 뿐인 물건입니다.
구명운동이 일어나기까지
당시 언론에서는 그가 마치 무장공비들처럼 땅을 파고 사람을 학살한 것처럼 표현했지만, 사실 그 구덩이도 마땅한 방이 없으니 땅을 파서 공부방처럼 사용하던 곳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박흥숙의 분노는 확실히 도를 넘었습니다. 철거반원들을 그곳에 몰아넣고 위협하며 사과하라고 소리쳤습니다. 하지만 훨씬 다수였던 철거반원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은 당연한 일... 그들도 묶여있던 포박을 풀고 반항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때 의도치 않은 대형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맙니다. 흥분한 그가 쇠망치 둔기로 올라오는 그들을 내리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4명이 살해되고 1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정신 나간 상태로 끔찍한 일을 저질러버린 그는 놀라서 도망쳤습니다. 그의 어머니와 여동생도 어쩔 줄 몰랐지만 광주시청에 가서 시장을 만나 얘기해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시장은 만나주지 않았고, 어머니는 공무집행방해죄로, 동생은 살인방조죄로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일단 기차를 타고 서울로 도망쳤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남자와 이야기하던 중, 그가 북한 간첩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서울로 올라오자마자 중앙정보부로 발길을 돌렸고, 간첩 신고를 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살인을 저질렀다고 자수했습니다.
그러나 경찰 발표와 언론 기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왔습니다. 그가 서울에 있는 이모 집에 숨었다가 시민의 제보로 잡혔다고 하고, 철거반이 그의 집에 불을 지른 것은 쉬쉬 숨긴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자신들의 잘못은 없어지고 박흥숙을 파렴치한으로 몰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재판에서는 그가 자수했다는 것이 사실로 인정되었습니다. 더불어 그는 진심으로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며 어떤 극형이라도 달게 받겠다고 했다고 합니다. 나중에야 사실을 알게 된 시민들은 잘못이 있으나 사정이 있었다며 구명운동으로 도우려고 했습니다.
원인의 대책이 중요한 사건
그러나 당시의 살벌한 재판정은 냉정하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그리고 3년이 흘러, 1980년 크리스마스이브에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무등산 타잔 박흥숙 사건에서 그가 잘못했다느니 어쩔 수 없었다니 하는 논쟁은 부질없는 것입니다. 그도 약자였고 그에게 죽은 자들도 사실은 그저 약자였을 뿐입니다. 이런 사건이 일어날 때 가장 이익을 보는 사람은 권력자와 부유층일 뿐입니다. 철거민을 몰아내는 자리에서 자본가는 투자로 수익을 챙깁니다. 그들은 누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관심 없습니다.
제대로 사건을 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사회가 경직될수록, 자본제일주의로 흐를수록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2005년, 그의 사건을 배경으로 해서 영화 무등산 타잔, 박흥숙이 만들어졌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엉뚱하게도 호남 비하로 자극해서 관객을 모으려고 했다가 개봉하지 못했습니다.
이 사건은 과거의 철거민 이야기로 그냥 넘길 일이 아닙니다. 코로나19로 상인들이 다 죽어가는 데도 상가 임대료를 올리며 쫓아내는 자들이 지금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노동자가 시뻘건 용광로에 떨어져 죽든 말든 돈 벌기에만 급급한 자들도 있습니다. 구조와 형태만 바뀌었을 뿐 이것은 분명히 현재형인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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