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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철, 홍윤애의 사랑 - 정조 암살 사건과 제주도 유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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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철, 홍윤애의 사랑 - 정조 암살 사건과 제주도 유배

키스세븐지식 2019. 2. 19.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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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철, 홍윤애의 사랑 - 정조 암살 사건과 제주도 유배]


역사에서 제주도는 유배지로 사용되곤 했습니다. 조정철, 홍윤애의 사랑이야기는 제주도 유배지를 배경으로 합니다. 조선 정조 암살 사건으로 인해 처참하게 몰락한 조정철과 그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홍윤애의 이야기는 비석으로 남아 아직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글은 제주시 홍랑로에 얽힌 사연을 소개합니다. 






정조 암살 사건 - 정유역변 


조선 후기의 황금기인 영정조 시대, 그러나 '사도세자'의 비극으로 인해 '정조'의 시작은 매우 불안했습니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죽을 때 영조를 부추겼던 가문들이 정조의 등극을 반길 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정조가 보복을 할까 봐 불편해했고, 정조의 즉위를 반대하다가 유배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정조 암살 사건이 벌어졌으니 그것이 '정유역변'입니다. 


사진: 영화 역린의 한 장면. 정조 암살 사건을 그렸다(영화 역린의 한 장면. 정조 암살 사건을 그렸다 [조정철 홍윤애 사랑 제주 유배 정조 역린] / ⓒ 이재규)


정유역변은 정조 1년인 1777년에 일어난 "정조 암살 사건"을 말합니다. '노론'이었던 '홍상범' 등의 홍씨 집안은 궁궐에 자객을 보내 정조 암살 사건을 일으켰는데, 이 정유역변이 바로 영화 <역린>의 배경인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홍씨 집안은 완전히 몰락했고 사위였던 '조정철'은 제주도 유배를 가게 되었으며 부인 홍씨는 그 사이 자결을 해버렸습니다. 



한편 제주도에는 '홍윤애'라는 처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홍윤애의 가문은 고려시대부터 벼슬을 하던 집안이었습니다. 그러나 15세기에 조상이 제주도로 유배를 오게 되었고, 이후 1770년대까지 무려 13대째 제주도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제주에서 향리를 맡고 있었습니다. 비록 몰락한 가문이었으나 홍윤애는 어릴 때부터 총명했고 매력을 지닌 규수로 컸습니다. 


사진: 제주도에 유배된 후 제주도 발전에 큰 공을 세운 사람들을 기념하는 오현단(제주도에 유배된 후 제주도 발전에 큰 공을 세운 사람들을 기념하는 오현단 [제주 유배 정조 역린 조정철 홍윤애 사랑] / ⓒ Thddbwnd)


조정철은 1777년 정유역변 이후 대역죄인 역모죄에 해당하여 제주도 유배길에 올랐습니다. 직접 가담하지 않았기에 목숨을 건졌으나 홍씨 집안사람이라는 이유로 유배를 가야 했습니다. 조선시대의 제주도는 중형 이상의 죄인들을 유배시키는 곳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광해군, 김정희, 박영효 등뿐만 아니라 네 살짜리 소현세자의 아들도 있었습니다. 조정철과 홍윤애의 사랑이야기는 이런 배경으로 시작됩니다.


조정철, 홍윤애 - 사랑과 역경 


제주에 도착한 조정철은 집 한 채를 빌려서 한숨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정유역변으로 가문이 풍지박살 나고 부인은 목을 매어 자결했으니 외롭고 한탄스러웠을 것입니다. 이렇게 3년을 보내니 집주인이 보기에 안쓰러워서 새짝을 찾아보라고 했으나, 조정철은 그럴 수 없다며 마다했습니다. 대신 집안일이나 심부름을 봐줄 사람을 하나 부탁하니, 이 소식을 들은 홍윤애가 자원하였습니다. 


사진: 광해군, 김정희, 박영효 등 제주도는 거물급 정치인의 유배지였다(광해군, 김정희, 박영효 등 제주도는 거물급 정치인의 유배지였다 [조정철 홍윤애 사랑 제주 유배 정조 역린] / ⓒ songsy)


3년의 유배에도 상처가 심했기에 조정철과 홍윤애의 사랑은 그러고도 한참 뒤의 일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한양에서 온 점잖은 선비의 뒷바라지가 할 일이었는데, 아무리 몰락한 집안이라 해도 향리의 딸과의 신분 차이는 큰 것이기에 쉽게 정을 통하진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품 좋은 선비와 총명한 규수의 만남이었으니, 존경과 감사의 마음 위에 정이 쌓이고 멀었던 거리도 점차 가까워졌다고 합니다. 



그렇게 1년을 지낸 뒤 조정철과 홍윤애는 연인관계로 깊어졌고, 귀여운 딸아이도 하나 낳게 되었습니다. 오랜만에 찾아온 행복에 조정철의 상처도 아물어 가는가 싶었습니다. 그러나 시련은 그들을 가만히 놔두지 않았습니다. '김시구'라는 사람이 제주목사로 부임을 온 것입니다. 김시구는 소론파이며 노론인 조정철의 집안과 대대로 원수처럼 지냈던 가문의 사람이었습니다. 


사진: 민족문화백과사전에 기록된 조정철에 대한 정보(민족문화백과사전에 기록된 조정철에 대한 정보 [제주 유배 정조 역린 조정철 홍윤애 사랑] / ⓒ aks.ac.kr)


제주목사로 온 김시구는 살아남은 조정철을 다시 역모로 엮어서 죽여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는 꼬투리를 잡기 위해 부하들을 시켜서 염탐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배 없이는 탈출이 불가능한 유배지이니 조정철이 무슨 일을 한들 죄가 될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김시구는 홍윤애가 조정철의 역모 심부름을 했을 것이라며 그녀를 잡아들여 고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제주도 유배지의 홍윤애 비석 


김시구는 보복에 눈이 멀어서 죄 없는 홍윤애를 문초하였습니다. 그러나 홍윤애는 조정철을 감싸기 위해 끝까지 고문을 참아냈습니다. 큰 곤장으로 70대나 맞고 뼈가 부러지는 중에도 참아내던 홍윤애는 그 독으로 인하여 마침내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김시구는 제주에서 역모가 있었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증거도 없이 사람을 죽인 것을 덮어버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조정에서는 즉시 새 목사와 암행어사를 파견했습니다. 


사진: 문화일보에 소개된 홍윤애의 묘과 비석(문화일보에 소개된 홍윤애의 묘과 비석 [조정철 홍윤애 사랑 제주 유배 정조 역린] / ⓒ munhwa.com)


조정철은 홍윤애의 죽음에 절망하면서도 고문을 견뎠습니다. 새 목사는 집주인까지 취조했으나 아무런 자백을 얻지 못하자 조정철과 내통했다는 상인을 잡아왔습니다. 결국 김시구의 조정을 받아서 거짓말을 했다는 상인의 자백이 터지면서 상황이 급변했습니다. 이번에는 무고죄로 김시구가 잡혀가게 된 것입니다. 조정철은 홍윤애의 희생과 모함의 진실이 드러나며 다시 살아났지만 상처뿐인 결과였습니다. 



이후 이곳저곳으로 유배지를 옮겨다니던 조정철은 정조가 죽은 후 복권되어 관직에 나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27세에 제주로 유배된 뒤 29년 간의 유배생활이 끝났지만 조정철은 홍윤애를 있을 수 없어서 그리워했습니다. 그러던 중 1811년 조정철은 제주목사에 임명되어 31년 만에 다시 제주 땅을 밟게 됩니다. 조정철은 홍윤애가 자신을 위해 목숨을 버려가며 지켜주었다는 과거가 떠올라 한없이 슬퍼했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사진: 목숨을 거려 지켜준 홍윤애,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하는 조정철의 사랑이야기(목숨을 거려 지켜준 홍윤애,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하는 조정철의 사랑이야기 [제주 유배 정조 역린 조정철 홍윤애 사랑] / ⓒ raon20130)


제주에 남아있던 딸과 재회한 후 조정철은 홍윤애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그간의 사건을 정리해서 적고 홍윤애에 대한 감정을 새겨 묘비를 세웠는데, 그것이 지금 제주시 '전롱로'에 있는 그 묘비입니다. 조정철은 홍윤애의 사랑을 가슴에 묻은 채 살았고 '순조'왕 때 형조판서까지 지냈습니다. 조정철과 홍윤애의 가슴 아픈 사연이 남은 제주시는 묘비 옆 길을 '홍랑로'라고 이름 짓고 홍윤애의 사랑과 희생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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