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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허스토리 실화 - 관부재판 뜻과 위안부 영화

키스세븐지식 2018. 6. 22.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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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허스토리 실화 - 관부재판 뜻과 위안부 영화]

아이 캔 스피크와 귀향은 80년이 다 되가는 억울함을 담고 있습니다. 현대의 대한민국에는 아직도 분을 풀지 못하는 피해자 할머니들이 있고, 위안부 영화는 그 심정을 공감하기 때문에 존재합니다. 영화 허스토리 실화는 관부재판 결과를 모티브로 하고 있습니다. 관부재판 뜻은 일본에서 1992년부터 벌어진 위안부 피해자들의 재판을 말합니다. 






관부재판 뜻 - 시모노세키와 부산


일제는 남녀를 가릴 것 없이 수많은 한국인을 강제징용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 중 일부 여성들은 '정신대' 등의 이름으로 일본군 부대 내에서 성노동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광복을 이루면서 이 일들이 다 묻혔습니다. 더구나 박정희는 1965년 '한일협정'을 맺으면서 과거 일본의 잔악행위를 다시 묻어 주었습니다. 일본의 "배상은 끝났다"는 주장은 이것을 기초로 합니다. 


사진: 위안부 피해자를 위로하는 소녀상(사진: 위안부 피해자를 위로하는 소녀상 [허스토리 관부재판] / ⓒ Lisy_)


그 후 1990년대가 되면서 더 이상 참지 못하던 피해자들이 진실을 밝히기 시작했고, 1992년부터 벌어진 법적 소송이 영화 <허스토리> 실화인 '관부재판'인 것입니다. 관부재판 뜻은 '시모노세키 재판'을 말하는데, 이 재판이 중요한 것은 일본이 역사 상 처음으로 일본 정부의 잘못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60여 건의 재판에서 단 한 번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던 일본의 사건이었습니다. 


사진: 관부재판을 배경으로 한 영화 허스토리 포스터(사진: 관부재판을 배경으로 한 영화 허스토리 포스터 [위안부 영화 관부재판 뜻] / ⓒ 민규동)


영화 허스토리 실화인 관부재판이 위안부 영화의 소재가 된 것은 일본군 위안부와 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이 1억 엔의 보상청구소송을 낸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부산 등에 살던 피해자들이 시모노세키와 부산을 오가며 재판을 벌였습니다. 그러므로 관부재판 뜻은 교통지 시모노세키의 관(關)과 부산의 부(釜)에서의 재판이라는 의미입니다. 당시 제소한 재판부는 '야마구치 지방재판소'인 '시모노세키 지부'입니다. 

사진: 관부재판이 열린 시모노세키항(사진: 관부재판이 열린 시모노세키항 [관부재판 뜻] / ⓒ Wiki708)


관부재판 뜻이 시모노세키-부산 재판인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일제침략기에 이들을 끌고 간 불법행위역이 이곳이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부산에서 배를 타고 건너가기에 가까운 곳이라는 것도 고려되었습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도쿄로 옮기려고 했습니다. 일본의 진보적인 시민단체까지 나서서 만 명이 서명운동을 하여 결국 이곳으로 확정시킬 수 있었다고 합니다. 



영화 허스토리 실화 - 관부재판

원고는 10명의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모두 걱정을 했습니다. 소송을 벌여도 다 패소해 왔고, 일본이 위안부 자체를 모른 척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화 허스토리 실화 관부재판은 처음부터 난항이었습니다. 다만 1993년 '고노' 장관이 처음으로 위안부를 인정하는 고노 담화를 했기에 그나마 희망을 걸 수 있는 정도일 뿐입니다. 


사진: 1993년 고노 담화를 하는 일본 고노 장관(사진: 1993년 고노 담화를 하는 일본 고노 장관 [허스토리 실화 위안부 영화] / ⓒ 일본방송)


그러나 이것도 일본이 진정으로 반성해서 한 발언이 아닙니다. 보수당이 정권에서 밀려나는 시기였기 때문에 장관이 소신 있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국 정부도 직접 나서지 않기 때문에 "개인 대 일본 정부"의 소송이 되었습니다. 한국의 '정신대문제대책부산협의회', 일본의 '전후 책임을 묻는, 관부재판을 지원하는 모임' 등 시민단체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정말 외로웠을 것입니다. 


사진: 한국인을 도와주는 일본인 단체 대표의 사진(사진: 한국인을 도와주는 일본인 단체 대표의 사진 [관부재판 실화 위안부 영화] / ⓒ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 전국 행동)


이런 배경으로 인해 영화 허스토리는 위안부 영화면서도 피해자를 대변하는 법정 영화이기도 합니다. 법정에서 일존 정부의 잘못을 밝혀야 하지만 개인들이 할 수 있는 한계는 너무도 컸습니다. 일본 정부가 위안부 자체를 부정하고 있으니 그것부터 증명해야 할 판이었습니다. 관부재판 뜻처럼 피해자들은 6년 동안 23차례나 일본에 가서 재판을 했으므로 열악하고도 외로운 사투였습니다. 

사진: 영화 허스토리 장면의 위안부 할머니(사진: 영화 허스토리 장면의 위안부 할머니 [위안부 영화 관부재판 뜻] / ⓒ 민규동)


일본 스스로는 미국에게 졌을 뿐 한국과 중국에게 패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피해 보상을 법률적으로 제정했을 리도 없습니다. 문제는 판사도 법률을 가지고 판단해야 하는데, 해당 법률이 없으니 적용할 것이 없다는 것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화 허스토리 실화 관부재판은 천신만고 끝에 1993년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관부재판 뜻이 시모노세키와 부산을 오가는 재판이었던 만큼 모진 고생이었습니다. 



피해 위안부 영화 허스토리 뒷면

영화 허스토리 실화 관부재판은 일본이 처음으로 공식적인 위안부 진실을 인정한 사건이며, 이것을 개인들이 해낸 사건입니다. 그러나 한계는 있었습니다. 법률상의 문제 때문에 "피해자를 위한 법을 제정하지 않은 잘못"에 대해서만 승소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근거는 1993년 고노 담화였으며 보상도 기본권 침해의 위로금에 해당하여 겨우 30만 엔이 전부였습니다. 


사진: 실제 관부재판에서 투쟁한 피해자들(사진: 실제 관부재판에서 투쟁한 피해자들 [영화 허스토리 실화] / ⓒ 독립기념관)


그럼에도 일본 정부의 반항은 극렬했습니다. 관부재판이 최초의 위안부 인정 판결이긴 하지만, '여자근로정신대'에 대해서는 끝내 기각이 되고 말았습니다. 더구나 이들은 그 작은 금액마저 다시 항소하여 2심, 3심으로 옮겨 갔습니다. 결국 2001년 일본 정부의 항소심에서 판결이 뒤집혀졌을 뿐 아니라, 그동안의 소송비용도 할머니들에게 전부 부담시켰습니다. 


사진: YTN에 보도된 한일 정상회담의 한 장면 2016(사진: YTN에 보도된 한일 정상회담의 한 장면 2016 [관부재판 뜻 실화] / ⓒ YTN)


원고들도 다시 항소를 했습니다. 그러나 영화 허스토리 실화 관부재판은 해피엔딩이 아니었습니다. 2003년 일본 대법원이 다시 판결할 필요가 없다며 기각을 해 버린 것입니다. 더구나 2015년 박근혜는 이면합의로 위안부 합의를 해버렸습니다. 30년 전의 아버지 박정희 때처럼 위안부 할머니들은 또 다시 상처를 받아야 했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사진: 민족문제연구소 보관의 관부재판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사진: 민족문제연구소 보관의 관부재판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 [위안부 영화 허스토리] / ⓒ 민족문제연구소)


무려 10년이나 시모노세키를 오가며 벌였던 이 재판은 관부재판 뜻만큼이나 멀고도 험한 길이었습니다. 영화 허스토리 실화인 관부재판도 다른 위안부 영화들처럼 위안부, 정신근로대 피해자의 아픔으로 인해 찡한 여운을 남깁니다. 그것은 역사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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