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사 - 닭죽 부정선거 사건 (제4대 국회의원 선거)]
한국 선거사에서 닭죽 사건은 부정선거의 극치를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남 보성군의 개표 중에 수면제를 먹이고 표를 불사른 것이 닭죽 부정선거 사건입니다. 외국 기사에까지 오른 한국의 부정선거는 지금 들어도 창피할 정도의 수준이었습니다.
이승만 자유당의 부정선거
일제로부터 광복을 얻은 후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승만'이 1948년 제1대 대통령으로 뽑혔습니다. 6.25 전쟁의 난리 통 속에서 1951년 자유당을 창당한 후, 1954년 '사사오입'까지 일으키며 장기집권에 들어갔습니다. 정치적 경쟁자인 '조봉암'을 간첩죄로 사형시키는 등 이승만의 부정선거는 말기로 갈수록 최악으로 치달았습니다.
(사진: 52년 만의 무죄 확정과 조봉암 사형 전의 재판 모습 [이승만 자유당 닭죽 수면제] / ⓒ ytn)
그 흐름으로 1958년 치러진 제4대 국회의원 선거도 자유당의 부정선거로 먹칠이 되었고, 그러다가 터진 것이 전남 '보성군'의 '닭죽 부정선거 사건'입니다. 영남과 호남의 지역감정은 박정희 시대에 시작된 것이므로, 당시엔 전남이라도 보수당 표가 많았습니다. 도시는 진보계열이, 농촌은 보수 계열이 일반적이었던 시대입니다.
(사진: 보수당이 집권할 때마다 제왕적 대통령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이승만 자유당 닭죽 수면제] / ⓒ Unknown)
자유당 이승만 정권은 친일자를 봐주고 흡수하여 지지 세력으로 만들었는데, 친일반민족행위자였던 '안용백'도 그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는 일제 말기에 관료를 지내며 조선총독부 기관지에서 '내선일체'를 주장했던 인물입니다. 이승만 자유당이 끌어안고 보살펴 주어서 교육감까지 지냈는데, 안용백의 닭죽 사건도 자유당 부정선거의 하나입니다.
전남 보성 닭죽 사건
안용백은 1958년 제4대 국희의원 선거에서 고향인 전라남도 보성군에 출마하여 '이정래' 후보와 맞붙었습니다. 자유당 부정선거는 경찰과 지방조직의 지원을 받으며 금품까지 동원했습니다. 그러나 생각보다 상대 후보의 돌풍이 거세서 자유당은 당황하였습니다. 투표 후 개표가 진행되는 날 밤, 자유당은 일명 닭죽 부정선거를 계획하였습니다.
(사진: 경남고와 어린이 중외공원의 안용백 친일자 동상 [이승만 자유당 부정선거] / ⓒ 구글 이미지 검색)
부정선거를 감독하고자 나와 있던 참관인들은 야식이라며 나온 닭죽을 맛있게 받아먹었습니다. 그 속에는 어처구니없게도 수면제가 들어 있었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닭죽 부정선거 사건입니다. 참관인들이 골아 떨어져 있는 동안 자유당이 동원한 깡패들이 들이닥쳐서 투표용지를 꺼내 불태웠습니다.
(사진: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 모습 [닭죽 사건 부정선거] / ⓒ smcpage.com)
그날 밤 개표 중에 집에서 잠을 자고 있던 상대측 이정래 후보는 참모가 급히 깨우자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개표소 뒷마당에서 투표용지가 불타고 있는 것을 보고는 황당해했었다고 합니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닭죽을 먹은 참고인들은 곯아떨어져 있고, 깨어서 항의하는 다른 참관인들은 깡패들에 의해 내던져지듯 밖으로 쫓겨나고 있었다고 합니다.
(사진: 광복 이후의 여러가지 선거 투표 이미지들 중 하나 [이승만 자유당 부정선거] / ⓒ 국가기록원)
하지만 너무나 황당하고 무식한 방법이라서 닭죽 사건은 바로 적발되고 재선거가 결정되었습니다. 닭죽 부정선거는 미국 시사주간지인 '타임'지에까지 실리며 톡톡히 나라 망신을 시켰습니다. 대통령 선거 때에도 투표함 속의 표를 바꿔치기하는 부정이 있었지만 수면제까지 동원한 것은 보기 힘든 경우였습니다.
(사진: 3.15 부정선거 당시의 투표함 개표 모습 [국회의원 선거 닭죽 사건]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아무튼 전남 보성의 제4대 국회의원 선거가 닭죽 사건으로 엉망진창이 되자 자유당은 후보를 바꿔서 다시 선거를 치렀습니다. 안용백이 친일파라는 것이 자유당에게는 그리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지만, 부정선거 당사자이니 바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민주당에서는 계속 이정래 후보가 나왔습니다.
(사진: 키스세븐에서 제작한 보수정당 계보도 [부정선거 닭죽 사건] / ⓒ www.kiss7.kr)
하지만 금권선거와 경찰 등 공직자의 선거개입은 여전해서 재선거에서도 이정래 후보는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새로 해도 부정선거는 마찬가지였다는 얘기입니다. 4.19 의거가 있기 전까지 자유당의 부정선거는 달라지지 않았고, 결국 1960년 이승만의 하야에 이르렀습니다.
(사진: 이승만 자유당 때문에 반민특위는 활동을 하지 못하고 친일자가 활개쳤다. [이승만이 방해한 반민특위] / ⓒ Unknown)
자유당은 한국 보수당의 원조격이 되는 정당입니다. 지금의 자유한국당의 뿌리도 자유당에 있습니다. 자유당의 문제점은 단지 제4대 국회의원 선거의 닭죽 부정선거 사건 같은 것만이 아닙니다. 반민족행위자가 다시 뿌리 뻗을 수 있게 보호해 주어서 아무리 잘못해도 또 다시 떵떵거리고 사는 역사를 만들어 주었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친일행적의 안용백도 사회적 명성과 재산을 가지고 편하게 살다가 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