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처가 이황 - 애처가 일화와 이황 부인 권씨와의 관계]
성리학을 꽃피운 조선 초기의 대학자를 대표하는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특히 이황은 애처가라는 얘기들이 전해져 옵니다. 애처가 이황의 부인 권씨는 지적장애인이었기에 오히려 더 많이 감싸고 챙겼다는 얘기입니다. 그의 일화 중 어떤 것들은 현대에도 부부 지침서로 기억할만 합니다.
애처가 이황 부인 권씨
퇴계 '이황'은 1501년에 태어난 학자입니다. 율곡 '이이'는 이황을 가르켜 '공자' - '주자'를 잇는 대학자라고 했습니다. 이토록 큰 영향을 끼친 이황은 애처가라는 평도 받습니다. 우주 만물을 성리학의 이치에서 바라본 이황은 부부라고 할지라도 손님을 대하듯 예를 갖추었다고 합니다. 남존여비의 조선시대에도 이러한 마음가짐을 가졌기에 "애처가 이황"설이 생긴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진: 퇴계 이황 동상. 조선 명종시대의 학자이며 6현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부인 권씨, 이황 애처가 일화 - 애처가 이황] / ⓒ Integral)
퇴계 이황의 사적인 이야기들은 대부분 야사의 이야기들입니다. 유교적으로는 큰 업적을 남겼지만, 가정생활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이황은 두 번의 결혼을 했습니다. 그러나 첫 번째 부인은 두 아들을 낳고 산후조리를 잘못 해서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황의 부인은 '지적장애'로 결혼 전부터 정신이 혼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황이 애처가가 됐는지도 모릅니다.
(사진: 이황의 퇴계문집. 퇴계 이황은 영남학파이며 동인이었다. [애처가 이황, 부인 권씨, 이황 애처가 일화] / ⓒ 이성무)
두 번째인 이황의 부인 권씨는 '권질'의 딸이었습니다. 권질은 '갑자사화', '기묘사화' 등으로 고초를 겪다가 이황이 살던 근처로 유배를 온 적이 있었습니다. 권질은 딸이 지적장애로 혼인을 할 수 없자 이황에게 재혼을 부탁했습니다. 잠시 생각하던 퇴계 이황은 부인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했다고 합니다. 장애라는 편견과 관계없이 "인(仁)"에 의해 "사람"으로서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것이 이황의 사랑법이었습니다.
이황 애처가 일화들
애처가 이황이라는 평이 있는 것은 이황이 부인 권씨의 지적장애를 이해하고 항상 감쌌기 때문입니다. 혼인 후 친정어머니가 지적장애인 권씨에게 물었습니다. 근엄한 선비인데 부부 침실에서도 그렇더냐는 질문인데, 딸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낮토끼지 밤토끼인가!" 정신이 혼미하여 이황의 호인 "퇴계"를 "토끼"로 잘못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퇴계 이황에게는 "낮퇴계 밤토끼"라는 일화가 생겼습니다.
(사진: 조선시대의 금술 좋은 부부의 상징이었던 원앙새. [부인 권씨, 이황 애처가 일화 - 애처가 이황] / ⓒ Jakob Strauß)
퇴계 이황은 부인의 잘못을 항상 헤아려 주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할아버지의 제삿날이 되어 상을 차리는데, 권씨가 제사상의 배를 숨긴 일이 벌어졌습니다. 제사상의 음식을 떨어트린다는 것도 송구한 일인데 치마 밑에 감추어다가 들킨 것입니다. 맏이인 큰 형수가 이를 보고 화를 냈고, 권씨는 먹고 싶어서 그랬다고 했습니다. 이를 본 이황은 "손주 며느리이니 할아버지도 귀엽게 보실 것"이라며 손수 배를 깎아 주었다고 합니다. 이황 애처가설이 나올 만도 합니다.
(사진: 퇴계 이황을 기념하는 도산서원의 전경. [애처가 이황, 부인 권씨, 이황 애처가 일화] / ⓒ Uriah923)
또 한 번은 퇴계 이황이 상갓집에 가야하는데 도포 끝이 너덜거려서 부인에게 꿰매어 달라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황의 부인은 흰 도포 위에 빨간 천을 덧대어 꿰매 주었습니다. 이황이 애처가여서인지는 몰라도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대로 상갓집에 갔습니다. 사람들은 신기해하며 어찌된 건지 물었지만, 퇴계 이황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고 합니다. 지적장애 부인을 둔 이황의 사랑법은 이렇듯 대인다웠습니다.
지적 장애 부인과 이황, 그 후...
애처가 이황은 주변 선비들에게도 이런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성질이 나빠 고칠 수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부인의 잘 잘못은 남편에게 달렸다는 것입니다. 또한 부부 사이라 해서 예의와 존경을 잃어버리고 모욕과 멸시를 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도 했습니다. 이황이 애처가이든 아니든, 이런 말은 현대에서도 중요한 부부 지침서가 될 것입니다.
(사진: 한국문화재단에 소개된 이황 서첩. [부인 권씨, 이황 애처가 일화 - 애처가 이황] / ⓒ k-heritage.tv)
어느덧 세월이 흘러 두 번째 부인마저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애처가 이황은 어렸던 탓에 생모 상을 제대로 못 치룬 두 아들에게 생모처럼 예를 다하라 시켰고, 아들들은 '시묘 살이'를 했습니다. 퇴계 이황도 애처가답게 1년을 부인의 묘 근처에서 영혼을 돌보았다고 합니다. 이황의 사랑법은 마지막까지 예를 다하여 지적장애 부인은 대하는 것입니다.
(사진: 이황과 관기 두향의 일화로 스토리텔링이 조성된 단양군의 공원. [애처가 이황, 부인 권씨, 이황 애처가 일화] / ⓒ thecm.net)
퇴계 이황은 부부 금실이 안 좋은 제자에게 편지를 한 통 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 편지에서 이황 스스로도 "괴롭고 심란하여 답답함을 견딜 수 없었다"며 재혼이 불행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이황은 지적장애 부인의 모자람을 채워주며 살았고 군자의 도를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이황 애처가설은 아는 것을 실천하는 그의 삶의 자세를 통해 저절로 드러나는 일화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