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소녀상 철거 - 한일 위안부 합의와 한일 협정
1965년 박정희 정부는 '한일협정'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20년만인 2015년 박근혜 정부는 '한일 위안부 합의'를 했습니다. 피해자와 국민 의견은 무시된 일본과의 합의가 두 부녀에 의해 계속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이 요구하는 '위안부 소녀상' 철거는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한일 위안부합의와 한일 협정까지 연결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위안부 소녀상 철거의 문제점
위안부 소녀상은 부산에 있는 일본총영사관 앞과 서울 일본대사관 등 전국에 세워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2015년 박근혜 정부가 일본 정부와 한일 위안부 합의를 한 1주년에 맞춰 부산 동구에서는 위안부 소녀상을 철거하려다가 취소하는 사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2017년 1월에는 일본 정부가 항의의 표시로 대사와 영사를 소환하였습니다. 이것은 외교관례 상 매우 높은 경고의 수준에 해당합니다. 그러면서 일본 아베총리는 "소녀상은 위안부 합의를 역행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국가 신용의 문제이니 한국도 성의를 보여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사진: 전국에 있는 위안부 소녀상 중 하나. 쓸쓸한 빈 의자를 곁에 두고 있다. [위안부 소녀상 철거 - 한일 위안부 합의와 한일 협정] / ⓒ Jaehh1006)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에는 소녀상 철거 자체를 언급하는 문구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일본이 강하게 불만을 표시하는 것은, 한국 정부가 비공식적으로는 철거를 약속한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 일어나게 하였습니다. 사실이라면 국민을 속이는 기만행위를 한 것입니다. 일본 정부는 위안부 합의 당시까지만 해도 배상을 할 이유가 없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그 역사는 1965년 한일협정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일본 입장에서는 이미 다 배상했는데도 또 돈을 줬으니 할 만큼 했다는 주장입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추진한 한일 협정이 현대사 내내 발목을 잡고 있는 셈입니다.
(사진: 우리나라 어디에서든 만날 것만 같은 얼굴의 위안부 소녀상. 일제강점기의 만행을 고발하고 있다. [위안부 소녀상 철거 - 한일 위안부 합의와 한일 협정] / ⓒ Lisy_)
위안부 소녀상의 시초는 2011년, 수요집회가 1000회를 맞으면서 국민의 성금으로 건립된 데에 있습니다. 국가 설립도 아니고 민간설립인데 박근혜 정부가 마음대로 철거를 약속을 하고 일본 정부가 내정간섭을 하는 것이 아닌가 살펴봐야 합니다. 이에 대해, 과거부터의 보수정부 특징인 "국가가 국민을 지배한다"는 비민주적 관념 때문이라고 말하는 의견도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1965년 한일협정, 2015년 위안부합의가 이런 보수정권의 문제점이라고 비판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인 중에는 지배받는 스타일의 정치를 좋아하는 국민도 꽤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사진: 어떤 곳의 위안부 소녀상에는 할머니 그림자까지 표현되어 있어서 가슴을 아프게 만든다. [위안부 소녀상 철거 - 한일 위안부 합의와 한일 협정] / ⓒ YunHo LEE)
이미 발견한 사람도 꽤 있겠지만, 위안부 소녀상의 그림자를 보면 할머니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소녀상의 의미는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뜻합니다. 즉 아직도 아물지 못하는 상처인 것입니다. 또 그 옆자리가 비워져 있는 것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또 다른 피해자들의 자리입니다. 위안부 문제는 피해 당사자 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일이기도 한 것입니다. 2011년, 한국 헌법재판소에서 "위안부 문제를 신경 쓰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는 판결이 나면서 시작된 위안부합의는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를 거치며 억지로 끝내려는 모양새처럼 오히려 상처만 더 하고 있습니다.
(사진: 시민이 성금을 모아 만든 위안부 소녀상. 한일위안부합의 이후, 정부가 철거를 약속했는지 논란이 일고 있다. [위안부 소녀상 철거 - 한일 위안부 합의와 한일 협정] / ⓒ Lisy_)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내용
2017년 일본의 위안부 소녀상 철거요구를 거슬러 올라가면 2015년 12월 28일의 박근혜 정부와 일본 아베 정부 간의 한일 위안부 합의에 이릅니다. 당시 위안부합의 내용을 보면, 일본 정부가 책임을 인정하고 사죄하며, 한국 정부가 피해자 지원재단을 설립하고 일본 정부가 예산을 지원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언론에 크게 비치지는 않았지만 여기에는 일본 대사관 앞 위안부 소녀상에 대한 적절한 해결을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은 여론을 의식해서 적절한 해결을 한다고 했을 뿐 일본에게는 위안부 소녀상을 철거하겠다는 이면약속이 있었는지의 논란이 있기도 합니다.
(사진: 2015년에 발표되는 한일위안부합의 내용. 그러나 피해 당사자와 국민들은 굴욕외교를 느끼게 되는 순간이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내용] / ⓒ namu.wiki)
일본 외무상은 "존엄성의 상처에 정부가 책임을 통감하며 사죄와 반성을 한다"는 표명을 했습니다. 일본 야당은 직접 사죄를 해야 한다고 했지만 아베 총리는 공개적인 직접 사죄는 거부하였습니다. 더구나 합의 직후에도 공식적으로 위안부는 전쟁범죄가 아니라고 했고 강제 동원한 증거가 없다는 발언을 했지만, 한국 정부는 즉각적인 반발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중국에서는 한국이 돈 10억 엔에 자존심을 팔아 넘겼다는 비아냥거림이 퍼졌으나, 중국을 따돌림하길 원하는 미국만 한국과 일본의 화해를 환영한다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더구나 2016년 한국 정부는 위안부 기록물을 유네스코에 등재하려던 사업 예산을 모두 삭감하고 말았습니다.
(사진: 아베 총리와 박근혜 대통령. 중앙의 반기문 유엔총장은 위안부합의를 올바른 용단이라고 표현했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내용] / ⓒ MBC뉴스, www.kiss7.kr 편집)
일본이 위안부 소녀상 철거를 요구했던 것에는 위안부 합의의 문제점이 그대로 존재합니다. 일본은 1965년 박정희 정부와의 한일협정으로 청구권 일괄타결을 했으므로 배상금이 아니라 인도적 지원금이라고 못 박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이라는 표현을 넣어서, 향후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더 이상 위안부 문제를 거론하지 못하도록 입을 막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편 이에 대해 한국정부는 일본이 다른 말을 못하도록 우리 정부가 먼저 제안했다고 밝혀서 또한 논란이 되었습니다. 국내 여론은 일본에게 면죄부를 주고 일본의 위안부 잘못에 대한 언급도 포기한 합의라고 비판이 있기도 했습니다.
(사진: 어떤 언론에서는 50%이상이 찬성하는 위안부합의라고 방송했지만, 많은 국민들은 부녀국치, 굴욕적 협상이라고 생각했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내용] / ⓒ 이미지검색 캡처)
2015년 박근혜 정부의 한일 위안부합의는 1965 박정희 정부의 한일협정만큼이나 논란이 많습니다. 일본은 사죄한다고 했지만 군이 관여한 것이라며 교묘하게 법적 책임을 피해갔습니다. 겉 표면은 사죄와 지원금을 받으며 한국의 이익인 것처럼 보이지만, 내부적으로는 일본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을 앞으로는 할 수 없게 되는 상황을 맞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사죄는 진정성이 불분명한데도 말입니다. 공동발표문 형식이므로 정식 협정의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국가 간 공식 발표이기 때문에 위안부 합의를 철회하는 것도 힘든 상황입니다. 2017년 일본은 위안부 소녀상 철거를 요구하며 오히려 공격적인 자세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사진: 현재 생존해 있는 위안부 피해자들은 40여 명이라고 한다. 이미 죽은 피해자들은 더욱 상처를 받게 되는 상황이었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내용] / ⓒ Claire Solery)
1965년 한일 협정 - 한일기본조약
박정희 정부 때인 1965년, 한국과 일본 정부는 한일기본조약이라는 한일협정을 체결하였습니다. 이것은 사실 미국이 원하는 대로 이해관계가 맞물려서 시작된 협정입니다. 미국은 공산국가인 소련과 중국을 포위하고자 했으므로 앙숙 간인 한국과 일본의 화해가 필요했습니다. 마침 장면 정부 때 준비되었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위해 돈이 필요했던 한국 정부는 일본과 국가 간 무역정상화를 연결점으로 하여 협상을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일본은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상업차관 3억 달러 규모의 대규모 지원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 후 무역적자 심화로 인해 한국은 1980년대까지 일본에 300억 달러의 적자를 기록했으니, 일본 입장에서는 미래를 위한 투자인 셈이었습니다.
(사진: 일본과의 한일협정에 서명을 하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 그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또 다시 피눈물을 흘리는 상황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1965년 한일 협정 - 한일기본조약] / ⓒ minjok.or.kr)
위안부 소녀상 논란의 핵심이 된 위안부 합의에까지 영향을 미친 한일 청구권 문제는 1965년 한일협정에 있습니다. 한일기본조약 내용은 '청구권, 경제 협력에 관한 협정', '재일교포의 법적 지위와 대우에 관한 협정', '어업에 관한 협정', '문화재, 문화 협력에 관한 협정'에 관한 4가지가 일괄 타결되는 형태입니다. 물론 포스코 설립 등 경제발전에 영향을 준 것도 사실이고 일본이 북한을 제외시키고 한국만을 공식정부로 인정하게 하는 성과도 있었지만, 피해자 당사자들은 무슨 협정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정부가 돈을 받아 다른 곳에 써버렸다는 비판도 있었습니다. 국민들은 굴욕적 외교라며 시위를 벌였으나 박정희 정부는 계엄령으로 여론을 막았습니다.
(사진: 한일협약 당시 국민들은 굴욕외교라며 강력히 저지햇지만 군사독재정부는 계엄령으로 잡아들였다. 끌려가는 학생과 시민들의 사진. [1965년 한일 협정 - 한일기본조약] / ⓒ kdemo.or.kr)
한일협정에서 일본정부는 피해배상금이 아니라 독립축하금이라는 입장을 취했으며 도의적인 배상이라는 애매한 형식을 취했습니다. 당시 일본 정부는 한국 피해자에게 직접 배상금을 주려고 했지만, 박정희 정부가 극구 거부하며 정부에게 돈을 줄 것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결국 피해자들에게 지급된 금액은 전체의 5% 밖에 안 됩니다. 또한 민족문제연구소에 의하면 박정희의 정당인 공화당 운영비의 2/3을 일본이 지원했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한일협정에 대한 사적인 사례금이냐는 비판이 있을만한 대목입니다. 그 후 일본은 법적인 배상이 끝났으니 더 이상은 피해배상에 대해 금전도, 재판도, 소송도 받지 않겠다는 입장을 취합니다. 위안부 소녀상과 위안부 합의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사진: 마치 평행이론처럼 다시 상처를 주는 역사... 하지만 이 불행은 어떤 국민들이 열렬히 지지하며 뽑아준 행위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1965년 한일 협정 - 한일기본조약] / ⓒ Lisy_ , www.kiss7.kr 편집)
1965년 박정희 정부의 한일 협정 뒷면에는 또 다른 문제가 있는데 바로 독도관련 밀약입니다. 한일협정 5개월 전, 비밀리에 양국 정부는 독도의 영토분쟁이 해결되지 않았으나 해결된 것으로 간주하고 한일협정에서는 언급하지 않기로 약속했습니다. 이 말의 뜻은 한국이 바로 독도를 포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양국이 자기 나라 안에서는 서로 자기 영토라고 주장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1952년 이승만과 UN사령관 클라크가 정한 평화선에서는 분명히 독도가 한국영토로 명시되었었으나 이 마저도 포기하고 12해리 전관 수역조건을 받아들인 것이 한일협정입니다.
1965년 한일협정과 2015년 위안부합의와 2017년 위안부 소녀상 철거 문제는 이처럼 국민을 답답하게 만드는 역사적 문제점을 가득 안고 있는 상황입니다. 억울하고 눈물 흘리는 사람은 결국 힘없는 국민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