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스 암살사건과 전명운, 장인환 의사 (스티븐스 저격사건)]
한국인의 가장 치욕스러운 과거 중 하나는 을사늑약과 경술국치입니다. 스티븐스 암살사건에 전명운, 장인환 의사가 의거를 한 것은 을사년과 경술년 사이의 일입니다. 어찌 보면 우연에 의해 성공할 수 있었던 스티븐스 저격사건을 통해 우리 민족이 얼마나 애통한 세월을 보냈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스티븐스 암살사건 배경
먼저 스티븐스 저격사건을 전명운, 장인환 의사가 거사하기까지의 배경을 정리합니다. 일제는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서 야금야금 권리를 빼앗습니다. 순서는 1895년 명성왕후 시해, 1905년 을사늑약, 1910년 경술국치입니다. 을사늑약에서 외교권을 빼앗겼고, 경술국치에서 국권을 완전히 빼앗겼습니다.
스티븐스 암살사건은 을사늑약과 경술국치 사이에 일어난 일입니다.
(사진: 을사늑약의 조선어본. 독립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 [스티븐스 저격사건 - 전명운, 장인환] / ⓒ mpva.tistory.com)
스티븐스 저격사건에는 '더럼 스티븐스'라는 친일 미국인이 등장합니다. 그는 주일 미국공사관에서 근무하며 일본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을사늑약 때 '대한제국'은 일본의 강압에 의해 더럼 스티븐스를 외교고문으로 임명해야 했습니다.
을사늑약 이후에도 '이토 히로부미'를 도와서 조선이 식민지가 되도록 일본에게 협력하였습니다.
(사진: 더럼 화이트 스티븐스의 사진. 그가 일본 편을 든 것은 제국주의 사고를 가졌기 때문이다. [스티븐스 저격사건 - 전명운, 장인환] / ⓒ Unknown)
한편 스티븐스 암살사건의 전명운과 장인환 의사는 이미 미국에 이민을 가서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있었습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 교민은 약 150명 정도 밖에 안 됐습니다.
전명운은 서울 출신이고 장인환은 평양 출신인데, 미국 철도 노동자를 하거나 어부로 생계를 이어 가고 있었습니다. 스티븐스 저격사건 당시 전명운과 장인환은 30대, 40대였습니다.
(사진: 전명운의 모습. 미국 이민을 한 후 철도 노동자였다. 권총 불발로 격투까지 벌였다. [스티븐스 저격사건 - 전명운, 장인환] / ⓒ mpva.tistory.com)
어떤 자료에서는 두 사람이 전혀 알지 못하는 관계라고도 하고, 어떤 자료에서는 이미 2년 전부터 알고 있었다고도 합니다.
알고 있었다는 자료에서는 같이 알래스카로 어부 일을 하러 갔다가 일본인 관리자의 차별 때문에 도저히 못 견디고 다시 돌아왔다고 합니다. 이렇게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온 것은 스티븐스 암살사건이 일어나기 5개월 전이었습니다.
(사진: 장인환의 모습. 미국에서 어업과 노동으로 살았다. 권총 암살에 성공한다. [스티븐스 저격사건 - 전명운, 장인환] / ⓒ mpva.tistory.com)
더럼 스티븐스는 일본의 자금 후원을 받으며 활동하다가 미국으로 잠시 돌아갔습니다. 스티븐스는 샌프란시스코 항에 내리기가 무섭게 기자회견을 열고 일본의 조선 침략은 당연하다고 했습니다. 조선은 미개국이고 축사 같은 곳에 살고 있다며, 일본이 조선을 문명국이 되도록 보호해 주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스티븐스 저격사건은 그의 일방적 친일행적 때문이었습니다.
(사진: 1900년대의 미국 샌프란시시코의 모습. 우리의 1900년과 너무나 큰 차이이다. [스티븐스 저격사건 - 전명운, 장인환] / ⓒ Unknown)
그전에 교민 대표들이 스티븐스가 묵는 호텔에 찾아간 적도 있었습니다. 스티븐스 암살사건을 전명운과 장인환이 거사하기 하루 전의 일입니다. 교민들은 잘 알지도 못하고 주장하는 망언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스티븐스는 나라도 없는 것들이 함부로 군다는 식의 반응을 보였고, 격분한 교민들에 의해 폭행사건까지 발생하였습니다.
스티븐스 저격사건 - 전명운, 장인환
1908년 더럼 스티븐스는 샌프란시스코를 떠나기 위해 페리역으로 갔습니다. '페리 정거장'에는 배웅하기 위한 일본인과 미국인들이 이미 나와 있었습니다. 스티븐스는 기분 좋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스티븐스 저격사건은 전명운의 권총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전명운이 쏜 총알은 두발 모두 불발이 되었습니다. 너무 낡은 총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진: 스티븐스 저격사건이 발생한 샌프란시스코의 페리역. [스티븐스 암살사건 배경] / ⓒ monovisions.com)
실패한 스티븐스 암살사건은 전명운과 스티븐스의 몸싸움이 되어버렸습니다. 전명운은 권총이 불발되자 달려들어 권총으로 내리쳤고, 갑작스러운 공격에 스티븐스가 방어적 공격을 했습니다.
그러나 덩치 크고 부유하게 살아온 스티븐스에게 작은 체구의 전명운은 어려운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도 당황하고 있는 사이 몸싸움을 하던 스티븐스가 또 다른 총성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사진: 당시 신문 기사. 스티븐스 암살사건을 자세히 설명했다. [스티븐스 암살사건 배경] / ⓒ Unknown)
두 번째 스티븐스 저격사건은 장인환의 권총이었습니다. 장인환이 쏜 세 발 중 두 발이 스티븐스의 허리와 가슴을 맞추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한 발은 몸싸움 중이었던 전명운의 어깨를 관통했습니다.
두 사람이 쓰러지고 곧 경찰이 달려들었습니다. 스티븐스는 병원으로 옮겨져서 수술에 들어갔지만 결국 숨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사진: 이토 히로부미와 스티븐스(왼쪽 사진), 저격사건 신문기사. [스티븐스 암살사건 배경] / ⓒ Unknown)
신기한 것은, 전명운과 장인환이 동시에 나타난 것이 우연이었다는 것입니다. 스티븐스 암살사건은 전명운과 장인환이 각자 준비한 것일 뿐 미리 모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현장에서 거사를 벌이고서야 상대가 와 있었던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더럼 스티븐스 입장에서는 하필이면 같은 시각, 같은 플랫폼에 세 사람이 동시에 있었다는 것이겠습니다.
(사진: 전명운 의사와 장인환 의사의 만남. 둘 다 젊은 나이에 죽게 된다. [스티븐스 암살사건 배경] / ⓒ Unknown)
재판에서 전명운은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나고 장인환은 2등급 살인죄로 감옥에 가야 했습니다. 당시의 일화로, 이승만에게 재판 통역을 부탁했으나 거절당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스티븐스의 장례식은 미국 대통령까지 관심을 쓰고 일본에서는 1등훈장을 주는 등으로 크게 치러졌습니다.
반면 전명운과 장인환은 1962년이 되서야 건국훈장을 받았습니다.
(사진: 신문기사와 수감되는 장인환 의사의 교도소 사진. [스티븐스 암살사건 배경] / ⓒ Unknown)
하지만 전명운과 장인환이 직접 훈장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전명운 미국인으로 귀화하여 견뎌보려고 했지만 생활고 때문에 고생을 했고, 장인환도 생활고와 병고에 시달리다가 자살을 했습니다. 그때가 1947년, 1930년입니다.
친일미국인 스티븐스 저격사건의 전명운과 장인환은 희생을 각오했지만, 광복 후 친일자들이 점령한 한국은 그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조국일 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