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살 실존인물 - 남자현, 김원봉, 안중근, 김상옥, 윤봉길, 염동진, 노덕술]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을 다루다보니 영화 암살의 실존인물이 누구인가에 대한 궁금증이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존인물도 있고 가상을 결합한 인물들도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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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암살에서 거론되는 남자현, 김원봉, 염동진, 노덕술, 안중근, 김상옥, 윤봉길 등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으면 영화를 보는 재미도 더할 것입니다.
영화 암살 실존인물 1 - 남자현, 김원봉
영화 암살에서 '안옥윤'은 독립군 소속으로 있다가 상관을 죽인 이유로 사형수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암살조에 뽑은 이유는 엄청난 사격실력 때문입니다. 여기까지는 암살 줄거리로서의 허구인 부분이지만, 왜 여자 독립군이 주인공인가하는 질문에 모티브가 안옥윤의 실존인물이 '남자현'이었다는 답변이 있습니다. 배경이 일제강점기인 역사물이다 보니 암살의 실존인물이 누굴까 하는 관심을 제법 있었는데, 안옥윤의 실존인물로 알려진 남자현은 그리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사람입니다.
(사진: 안옥윤의 실존인물 남자현 지사와 주연배우 전지현. 남자현은 여자 안중근으로도 알려져 있다. [영화 암살 실존인물 1 - 남자현, 김원봉] / 케이퍼필름, 훈터)
안옥윤의 실존인물로 알려진 남자현은 1872년 태어났고, 남자현의 남편은 을미사변 때 의병활동을 하다가 사망하였습니다. 3.1운동 후 40대의 나이로 만주로 가서 항일독립운동에 가담하였으며, '청산리 대첩'에서 독립군을 돌보면서 만주 독립군의 어머니로 불렸다고 합니다. 무장독립군 통합에 참여하였고 테러활동도 지원했는데, 두 번이나 직접 국내로 잠입하기도 했었습니다.
(사진: 교과서에 수록된 청산리 대첩과 봉오동 전투 지역 설명도. 남자현은 청산리대첩에서도 활동했다고 한다. [영화 암살 실존인물 1 - 남자현, 김원봉] / ⓒ 교과서)
1926년 '사이토 마코토' 조선 총독 암살을 시도했었고, 61세가 되던 1933년엔 일본이 세운 괴뢰국인 만주국 전권대사 '무토 노부요시'를 암살하려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습니다. 그 와중에도 감옥에서 단식으로 투쟁하다가 병으로 인해 보석 석방된 후 결국 사망하였습니다. 안옥윤의 실존인물 남자현은 "여자 안중근"으로도 불렸는데, 독립군의 단결과 대한독립을 위해서 두 번이나 손가락을 자르는 단지를 했기 때문입니다.
(사진: 박문관에 전시된 안중근 의사의 단지 모혐. 남자현도 독립의지를 다지기 위해 단지했다고 한다. [영화 암살 실존인물 1 - 남자현, 김원봉] / ⓒ 훈터)
조승우가 연기한 영화 암살의 실존인물 '김원봉'은 '김구'에게 암살조를 제의한 인물로 나옵니다. 김원봉의 역할이 비중 있게 다뤄진 것은 매우 흔치 않은 경우입니다. 월북하여 북한 정권수립에 공헌한 인물이기에 남한에서는 금기시되었고, 김일성의 일당독재를 반대한 인물이기에 북한에서도 금기시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독립운동에서 김원봉은 비중이 높은 인물입니다. 이런 김원봉을 암살의 줄거리에서는 실존인물의 실명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사진: 조승우가 열연한 김원봉의 모습. 독립운동에서 큰 획을 그었으나 남과 북에서 금기시된 역사인물이다. [영화 암살 실존인물 1 - 남자현, 김원봉] / ⓒ 케이퍼필름, 역사자료사진)
'의열단'과 '조선의용군'을 조직하였으며 광복군 부사령관을 지낸 김원봉은 1948년 월북하였습니다. 김원봉이 월북을 한 이유에는 해방 후 한국에서 높은 지위를 독차지하는 친일파도 있었습니다. 또 다른 설에는 친일파였던 노덕술에게 모욕적인 말을 듣고는 남한의 현실에 실망을 느껴서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박헌영 등과 더 밀접한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이지만, 남한의 친일파 우대정책에 반감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사진: 선전용 영상에 등장한 김원봉으로 모습이라고 알려진 장면. 남한의 친일파 우대정책에 반발하였다. [영화 암살 실존인물 1 - 남자현, 김원봉] / ⓒ 조선의용대 선전용 영상)
영화 암살 실존인물 2 - 염동진, 노덕술
악역으로 이정재가 연기한 염석진은 영화 암살에서 실존인물이 아니라 여러 명을 섞은 등장인물입니다. 염석진의 초반부는 '염동진'이고, 후반부는 '노덕술'이 아닐까하는 추측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일제에게 잡혀 밀정이 되는 과정은 염동진과 유사하며, 해방 후 친일파에서 고위급으로 변신하여 '반민특위'에서 재판 받는 부분은 노덕술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영화와는 다르게 노덕술은 호의호식하다가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사진: 1948년 반민특위 재판모습. 하지만 이승만과 보수 우익에 의해 강제해체되고 친일파 반민족행위자들은 정의의 심판을 받지 않았다. [영화 암살 실존인물 2 - 염동진, 노덕술] / ⓒ www.kiss7.kr 편집)
염동진은 중국망명 후 만주에서 활동하다가 일본 관동군에게 붙잡혀서 고문으로 눈이 멀었습니다. 그 후 '일본 관동군'과의 협력설이 제기되며 밀정이 된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있습니다. 이 부분까지는 암살의 실존인물설로 염석진을 떠올릴만한 의혹이 생길만한 부분입니다. 하지만 증언 이외의 구체적인 물증이 없고 항일비밀단체에서 계속 활동했으므로 밀정 의혹에 반대하는 의견도 많습니다. 6.25 전쟁 때 북한군에게 잡힌 뒤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사진: 이정재가 열연한 염석진의 실존인물로 거론되는 염동진의 모습. 반공주의자였지만 국가 사회주의자였다고 한다. [영화 암살 실존인물 2 - 염동진, 노덕술] / ⓒ 역사자료사진, 케이퍼필름)
6.25 전쟁 전 북한에서 주둔군 소련의 만행을 목격한 뒤, 월남하여 반공활동을 하며 좌익인사들의 암살에 관여하였습니다. 염동진은 비밀결사인 '백의사'를 만든 것으로도 유명한데, 정확한 계열은 파시즘 형태의 국가 사회주의자였다고 합니다. 지나치게 과격하여 미군정은 악질적인 인물이라 평가했고, 김구도 자나 깨나 사람 죽이는 일에만 골몰한다는 표현을 했습니다. 백번 김구의 암살에도 관여했다고 하지만, 실질적인 증거는 없습니다. 인생의 후반부는 영화 암살의 실존인물과 거리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진: 일본 관헌에 남아 있는 문서. 염동진의 사진으로는 유일한 것이다. 백의사를 조직한 인물이다. [영화 암살 실존인물 2 - 염동진, 노덕술] / ⓒ 역사자료)
노덕술은 일제 강점기의 고등계 형사인 악질 친일파이며 해방 후에도 고위급에서 호의호식했었습니다. 암살 줄거리에서도 염석진이 해방 후 고위급 경찰이 되어 무죄 판결을 받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런 점에서 노덕술도 영화 암살의 실존인물설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노덕술은 27년간 고등계 형사활동으로 수많은 독립투사와 항일단체를 투옥하고 일제의 훈장까지 받았습니다. 특히 노덕술의 고문은 너무나 가혹해서 악명이 높았다고 합니다.
(사진: 두번째로 거론되는 이정재의 염석진 실존인물 노덕술. 왼쪽은 고위급에서 활동 당시 사진, 오른쪽은 그 후의 사진. [영화 암살 실존인물 2 - 염동진, 노덕술] / ⓒ 역사자료사진, 케이퍼필름)
해방 직후 북한에서는 시민에게 붙잡혀 곤욕을 치렀지만, 남한으로 도망쳐서는 좌익계 검거에 앞장서며 이승만으로부터 애국자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암살 줄거리에서 증인이 피살되어 무죄가 이뤄지는데, 노덕술도 반민족특위에 회부되었다가 반민족특위 관계자를 암살하려고 했었습니다. 이승만이 감싸고 돌아서 석방되고 나중에는 헌병대장과 군수사 대장에까지 올랐습니다. 보수진영에서 반공을 주장했으며 말년에는 국회의원 선거에도 나왔었다고 합니다.
(사진: 1948년 반민특위에서 체포되는 모습. 하지만 이승만과 우익의 공작으로 무죄로 풀려나고 말았다. [영화 암살 실존인물 2 - 염동진, 노덕술] / ⓒ newstapa.org)
영화 암살 실존인물 3 - 김상옥, 윤봉길, 안중근
안옥윤의 암살 실존인물은 남자현 지사를 모델로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안옥윤의 이름에도 독립운동이 모티브가 된 사연이 있는데, 이 이름은 안중근, 김상옥, 윤봉길에서 한자씩 따온 것이라고 합니다. 처음엔 '안옥윤'이라고 지으려고 했었지만, 이명박 전 대통령의 부인과 이름이 비슷하여 안옥윤으로 바꿨다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김상옥, 윤봉길, 안중근 의사는 실제로는 영화에 등장하지 않지만, 안옥윤이라는 이름으로 영화 암살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사진: 암살에서 속사포, 안옥윤, 황덕삼의 모습. 독립운동 당시 기념사진을 찍던 모습을 재현했다. [영화 암살 실존인물 3 - 김상옥, 윤봉길, 안중근] / ⓒ 케이퍼필름)
영화에서 안옥윤과 속사포, 황덕수가 강인구를 습격할 때 전지현이 지붕 위를 뛰어다니며 총격을 가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영화 암살처럼 실존인물 중에 지붕 총격전을 펼친 독립투사가 있습니다. '김상옥' 지사는 1890년 생으로 진짜로 총잡이 같은 생을 살았던 항일운동가입니다. 친일반역자를 총살하고 일본 총독의 암살을 하다가 발각되자 상해로 갔습니다. 그 후 다시 총독 암살을 위해 국내 잠입을 했으나 여의치 않자, 1923년 김상옥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피신했습니다.
(사진: 안옥윤의 실존인물인 김상옥 지사. 쌍권총 사격 솜씨와 무술이 뛰어났다고 한다. 영화 암살의 지붕 위 총격전 장면이 인용되었다. [영화 암살 실존인물 3 - 김상옥, 윤봉길, 안중근] / ⓒ 역사자료사진, 케이퍼필름)
그러나 밀고를 당하여 일본 무장경찰이 덮쳤고 김상옥은 쌍권총을 쏘며 지붕 위를 뛰어다니며 도주했습니다. 며칠 후 일본 경찰은 무장경찰 400여명을 동원해 포위를 해 왔습니다. 김상옥은 10발의 총알을 맞으면서도 몇 시간이나 시내 총격전을 벌였습니다. 결국 쌍권총의 총알이 떨어지자 마지막 총알로 자결을 하게 됩니다. 무술실력이 뛰어나고 총 솜씨도 대단해서 '동대문 홍길동'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영화 암살에서는 하와이 피스톨이 쌍권총을 쏘며 실존인물 김상옥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사진: 김상옥은 영화 암살의 하와이 피스톨의 실존인물이기도 하다. 쌍권총과 콧수염이 매우 비슷하다. [영화 암살 실존인물 3 - 김상옥, 윤봉길, 안중근] / ⓒ 케이퍼필름. www.kiss7.kr 편집)
영화 암살에서 김원봉을 만난 암살조가 태극기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장면은 꽤 익숙한 장면입니다. 바로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의 공원에서 폭탄을 던지기 전에 찍었던 장면과 유사합니다. 윤봉길은 1908년 생으로, 고려 장군 '윤관'의 후손이며 시인 겸 계몽가입니다. 김구를 찾아가 몸을 바칠 것을 맹세하고, 1932년 상하이에서 일본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과 단장을 죽였습니다. 중국의 장개석은 "100만 대군도 못한 일을 조선 청년이 했다"며 감탄을 하였다고 합니다.
(사진: 윤봉길 의사의 마지막 기념촬영 모습. 사형되기까지 너무나 혹독한 고문에 시달렸다고 한다. 영화 장면과 비교. [영화 암살 실존인물 3 - 김상옥, 윤봉길, 안중근] / ⓒ 역사자료사진, 케이퍼필름)
원래는 폭탄 투척 후 자결하려고 했으나 폭발 불발로 붙잡혀서 모진 고문을 당하였습니다. 결국 25세의 나이로 총살당한 윤봉길은 길거리에 암매장되었습니다. 일본이 보복하는 의미로 죽여서도 시체를 밟고 다니고자 했던 것입니다. 윤봉길의 의거는 한국 독립운동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1930년대는 독립운동이 시들해져가고 만주지역도 토벌 당해서 상하이 임시정부가 유명무실한 상태가 되었었습니다. 윤봉길의 홍커우공원 의거 이후로 중국정부와 함께 연합하여 항일운동을 펼칠 수 있도록 윤봉길이 희생을 한 것입니다.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만큼이나 큰 영향을 가집니다.
(사진: 안중근 의사와 윤봉길 의사는 가장 유명한 독립투사이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배경에 한 획을 그었기 때문이다. [영화 암살 실존인물 3 - 김상옥, 윤봉길, 안중근] / ⓒ 역사자료사진, 케이퍼필름)
안옥윤의 이름에 얽힌 실존인물 '안중근'은 가장 유명한 독립운동가이며 고려 학자 '안향'의 후손입니다. 많이 알려진 바와 같이 1879년생인 그는 하얼빈에서 초대조선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습니다. 윤봉길처럼 그도 교육운동과 계몽을 펴던 지식인이었습니다. 일본은 안중근을 테러범 취급했으나, 안중근은 자신이 의병 참모중장이라고 밝히며 테러가 아니라 전투였음을 주장하였습니다. 흔히 '도마 안중근'이라고 하는데, '도마'는 세례명인 '토마스'의 한자음입니다. 천주교 신자로서 전투에서도 포로를 풀어 주었을 만큼 함부로 살생을 하지 않았던 안중근, 그래서 저격사건은 전투였던 것입니다.
(사진: 통계조사에 의하면 독립운동가의 자손은 3대가 망한다는 것이 사실인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국민 중에는 이런 것을 기억하지 않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영화 암살 실존인물 3 - 김상옥, 윤봉길, 안중근] /ⓒ 신문검색 캡처)
2015년 광복 70주년의 해에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경제수준을 통계조사한 결과가 있습니다. 여기서 독립운동가 후손의 75%가 월 200만 원 이하의 빈곤구간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국가 연금을 제외하면 최저생계비 수준의 경제수준 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더욱 문제는 독립운동가의 자녀, 손자녀로 갈수록 더욱 빈곤도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재산의 대물림과 교육의 기회가 친일파 반역자보다 불리한 것이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상위층이며 보수주의인 자들이 반공은 외쳐도 친일청산은 외면하는 이유는 이러한 역사적 불공평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독립운동은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