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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쉰들러 리스트 - 이레나 센들러와 제고타

2018. 5. 25.

[폴란드 쉰들러 리스트 - 이레나 센들러와 제고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독일의 유대인 학살은 공포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오스카 쉰들러 등의 유대인 구출활동은 칭송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폴란드 쉰들러리스트인 이레나 센들러의 활동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약 2500명을 학살 위기에서 구하는 데 큰 공을 세운 그녀는 제고타라는 단체와 함께 인권, 아동복지에서 기억되어야 할 사람입니다. 





이레나 센들러와 제고타


유대인은 2천 년 전에 나라를 잃은 뒤 뿔뿔이 흩어져 살았습니다. 유럽에는 약 900만 명의 유대인이 살았는데, 그 중 약 600만 명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학살당했습니다. 폴란드 쉰들러리스트의 '이레나 센들러(Irena-sendler)'는 폴란드에서 약 2500명의 유대인을 구하는 데에 공헌을 했습니다. 특히 직접 구조한 400여 명의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고문마저 이겨내는 의지를 보였습니다. 


사진: 2500명을 죽음에서 구한 여자 쉰들러라는 제목의 신문기사.(사진: 2500명을 죽음에서 구한 여자 쉰들러라는 제목의 신문기사. [폴란드 쉰들러리스트 이레나 센들러] / ⓒ Jake)


폴란드에는 약 200만 명이 살고 있었습니다. 독일은 폴란드를 점령한 뒤 폴란드의 유대인뿐만 아니라 전 유럽의 유대인을 잡아서 이송시켰습니다. 나치 독일의 목적은 지구상에서 유대인을 멸족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아우슈비츠' 등의 수용소에서 어린 아이까지 독가스로 살해했습니다. 유럽 유대인의 2/3가 학살당했던 것입니다. 


사진: 나치독일은 전 유럽의 유대인을 말살하려고 했다. 어린이들도 포함되었다.(사진: 나치독일은 전 유럽의 유대인을 말살하려고 했다. 어린이들도 포함되었다. [폴란드 쉰들러리스트 이레나 센들러] / ⓒ auschwitz.org)


폴란드 쉰들러리스트의 이레나 센들러는 어린 시절에 의사였던 아버지가 장티푸스 환자를 치료하다가 죽었습니다. 그 뒤, 이웃 유대인들의 도움으로 대학까지 졸업한 이레나 센들러는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1939년 즈음에 바르샤바 시의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사회복지국에서 일했으므로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을 했습니다. 

사진: 제고타와 활동하던 시절의 모습.(사진: 제고타와 활동하던 시절의 모습. [폴란드 쉰들러리스트 이레나 센들러] / ⓒ barilive.it)


그리고 전쟁이 일어나자 '제고타(Zegota)'에 가입하였습니다. 제고타는 유대인을 돕는 폴란드 국내의 지하조직이었습니다. 이레나 센들러는 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에 제고타의 어린이 구조팀의 책임자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사회복지국 소속이었으므로 유대인 수용소인 '게토'에 자주 출입할 수 있었습니다. 전염병 등을 관리했던 것입니다. 

사진: 게토는 삼엄한 경비 아래에 있었지만 방역차는 통과할 수 있었다.(사진: 게토는 삼엄한 경비 아래에 있었지만 방역차는 통과할 수 있었다. [폴란드 쉰들러리스트 이레나 센들러] / ⓒ nysun.com)


유대인 게토 수용소는 나쁜 환경 때문에 장티푸스 등의 전염병이 자주 돌았고, 검사와 방역을 위해 20여 명의 동료들과 수용소에 자주 들어갔습니다. 전염병에 걸린 사람이든 아니든, 게토 밖으로 나올 때는 몇 명씩 탈출 시켰고 특히 어린이들이 많았습니다. 전염병에 걸렸다고 하므로 독일군도 딱히 막지 않았고, 검열도 느슨했던 것을 이용한 것입니다. 


사진: 어린이들마저 잔혹하게 학살당했던 아우슈비츠의 사진.(사진: 어린이들마저 잔혹하게 학살당했던 아우슈비츠의 사진. [폴란드 쉰들러리스트 이레나 센들러] / ⓒ auschwitz.org)


환자용 앰뷸런스나 시체를 실은 수레 등에 숨어서 아이들은 탈출을 했으며, 혹시나 모를 일을 대비하여 이름을 바꿔서 고아원, 수녀원 등에 아이들을 맡겼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부모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본명은 따로 적어서 유리병에 담아 보관했습니다. 폴란드 쉰들러리스트는 이레나 센들러의 헌신 속에서 어느덧 2500명을 넘겨가고 있었습니다. 



폴란드 쉰들러리스트 이레나 센들러

그러던 1943년의 어느 날, 낌새를 챈 독일 '게슈타포'는 이레나 센들러의 집에 들이닥쳐서 그녀를 체포해 갔습니다. 게슈타포는 아이들의 소재를 찾기 위해 고문까지 했지만, 폴란드 쉰들러리스트는 이레나 센들러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그녀의 동료는 신속히 그녀의 집에서 명단을 빼돌렸고 아이들의 안전을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사진: 인권을 위한 공헌을 했지만, 수십년 동안 인정받지도 못하고 살았다.(사진: 인권을 위한 공헌을 했지만, 수십년 동안 인정받지도 못하고 살았다. [이레나 센들러와 제고타] / ⓒ nypost.com)


이레나 센들러는 죽음을 각오하였고 총살형 선고까지 받았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도움이 있었는지 저항세력이 습격하여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재빨리 돌아와서는 명단을 다시 정리하여 친구의 집 앞 사과나무 아래에 묻었습니다. 폴란드의 쉰들러리스트는 전쟁이 끝난 뒤 입양된 어린이들을 찾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목숨을 걸고 지켜낸 리스트인 것입니다. 

사진: 그녀가 숨겼던 명단은 아이들이 다시 부모를 찾아갈 수 있도록 본명을 기록해 놓았다.(사진: 그녀가 숨겼던 명단은 아이들이 다시 부모를 찾아갈 수 있도록 본명을 기록해 놓았다. [이레나 센들러와 제고타] / ⓒ auschwitz.org)


전쟁이 끝나고 고아들을 되찾는 작업에 바빴지만 여기서 고생이 끝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폴란드에 공산혁명이 일어나서 기존의 공무원들은 반혁명세력으로 낙인찍히고 투옥되었습니다. 인명 구조 활동은 전혀 인정받지 못했으며, 심지어 이스라엘에서 수여하는 "의로운 시민상"도 받지 못하도록 출국이 금지되었습니다. 그 후 이레나 센들러는 노인과 아동복지를 위해 조용히 봉사를 하며 살 뿐이었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사진: 노년의 센들러.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항상 어려운 사람을 위해 헌신했던 사람이다.(사진: 노년의 센들러.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항상 어려운 사람을 위해 헌신했던 사람이다. [이레나 센들러와 제고타] / ⓒ snopes.com)


하지만 세상은 그녀를 잊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녀를 명예시민으로 추대했고 폴란드에서 공산주의 정권이 몰락한 후 1996년에는 훈장도 받게 되었습니다. 노벨 평화상 후보에도 올랐으며 '오드리헵번 인권상'의 영예도 안았습니다. 2500명의 폴란드 쉰들러리스트인 이레나 센들러는 뒤늦게 공로를 인정받고, 2008년 삶을 접었습니다. 말년에 이레나 센들러는 이런 헌신이 아버지의 가르침 때문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항상 "물에 빠진 사람을 본다면 최선을 다해 도우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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