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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생각 노래의 최순애와 이원수 - 오빠생각 동요 가사의 사연

2018. 2. 15.

[오빠생각 노래의 최순애와 이원수 - 오빠생각 동요 가사의 사연]

한 동안 전 국민의 국민동요였던 오빠생각 노래에는 작사가 최순애와 이원수의 러브스토리가 있습니다. 이 동요는 작곡가 박태준이 곡을 붙였는데, 뜸뿍뜸뿍 뜸북새하며 시작하는 오빠생각 가사에는 그리움의 서정성이 가득합니다. 이 글은 오빠생각 노래에 얽힌 일제강점기 아동 문학가들의 러브스토리와 배경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글의 순서]

오빠생각 작사, 최순애

오빠생각 가사, 동요의 탄생

오빠생각 노래와 최순애, 이원수

오빠생각 작사, 최순애


일제강점기인 1925년, 어린이 잡지 <어린이>에는 열두 살 소녀 `최순애`의 시가 실렸습니다. 서울 간 오빠를 그리워하며 지은 시 <오빠생각>이 입선한 것입니다. 그리고 수원에 살고 있던 최순애가 지은 시 오빠생각은 멀리 경상남도에 살고 있는 열다섯 살 소년 `이원수`의 가슴을 설레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10년 후, 이원수와 최순애는 러브스토리에 성공하여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진: 시사인에 오게된 이원수, 최순애 부부. 둘 다 아동문학가이다.(사진: 시사인에 오게된 이원수, 최순애 부부. 둘 다 아동문학가이다. [오빠생각 노래와 최순애, 이원수] / ⓒ sisain.co.kr)


10연간의 편지로 맺어진 오빠생각 노래는 이런 사연과 함께 국민동요로 남았습니다. 오빠생각 가사는 떠나간 사람이 돌아오길 바라는 애틋한 마음을 표현한 동시인 것입니다. 

최순애의 오빠생각 가사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때​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 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기럭 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

귓들 귓들 귀뚜라미​

슬피 울건만​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오빠생각 가사, 동요의 탄생

어린이라는 잡지는 어린이날로 유명한 소파 `방정환`이 만든 잡지입니다. 열두 살의 소녀 최순애는 이 잡지의 열렬한 독자였습니다. 여러 편의 시를 투고하고 퀴즈응모에 참여하는 등 많은 활동을 하였습니다. 

최순애가 1925년 잡지 어린이에서 입상한 후, 1926년에는 이원수가 <고향의 봄>으로 입상하였습니다. 얼마 후 `홍난파`가 고향의 봄을 노래로 만들었고, 오빠생각은 5년 후에 박태준이 작곡을 하게 됩니다. 

사진: 소파 방정환이 펴낸 잡지 어린이. 국가기록원 자료.(사진: 소파 방정환이 펴낸 잡지 어린이. 국가기록원 자료. [오빠생각 작사, 최순애] / ⓒ theme.archives.go.kr)국가기록원


최순애가 방정환의 잡지 어린이에 이렇게 애착을 보인 것은 가정 내력도 한 몫을 했습니다. 아버지 `최경우`는 소파 방정환의 어린이 사업을 숭배하듯 지지했었다고 합니다. 

아홉 살 터울의 오빠 `최영주`도 방정환과 함께 어린이 사업에서 활약하는 인물이었습니다. 방정환의 무덤을 세운 사람이 최영주이며, 아버지도 방정환 곁에 산소를 만들었고, 자신도 방정환 옆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하고 떠났습니다. 

사진: 어린 시절의 최순애, 이원수, 최영주 사진자료.(사진: 어린 시절의 최순애, 이원수, 최영주 사진자료. [오빠생각 작사, 최순애] / ⓒ kimshome.kr)


오빠생각 노래의 가사는 최순애와 최영주의 애틋한 사연이 담겨 있습니다. 오빠 최영주는 일본에서 유학을 하다가 `관동대지진`에서 일본인이 조선인을 무차별 학살하자 이를 피해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일본 순사들은 오빠를 감시하고 따라다녔습니다. 오빠는 한 달에 한 번 집을 방문했는데, 올 때마다 선물을 사오곤 했었습니다. 일본 경찰을 피해 서울로 떠난 오빠는 다음에 올 때 또 선물 사오겠다고 약속을 했지만, 그 후 영영 돌아오지 못하고 건강을 망쳐서 요절했습니다. 


사진: 왼쪽은 오빠생각의 주인공 최영주의 가족사진. 오른쪽은 최순애, 이원수의 가족사진.(사진: 왼쪽은 오빠생각의 주인공 최영주의 가족사진. 오른쪽은 최순애, 이원수의 가족사진. [오빠생각 작사, 최순애] / ⓒ seniortoday.co.kr)


한편 오빠생각 가사가 된 이 동시를 읽은 어린 이원수는 감동하여 편지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최순애와 이원수의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빠생각 가사를 쓴 후 최순애와 이원수에게 직접적으로 친분이 생긴 것은 동요 시인인 `윤석중`이 만든 `굴렁쇠`라는 회람잡지 덕분입니다. 회람잡지란, 윤석중이 표지를 만든 후 다른 회원에게 편지로 보내면 거기에 글을 쓴 후 다시 다른 회원에게 편지로 보내면서 잡지를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오빠생각 노래와 최순애, 이원수

그렇게 편지와 문학 글로 10년의 인연을 맺어 오던 최순애와 이원수는 드디어 첫 만남을 가지기로 약속했지만,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원수가 민족의식에 눈을 뜨며 참가한 반일독서회 사건으로 구속되고 만 것입니다. 

오빠를 그리워하던 오빠생각 노래는 이번에는 님을 그리워하는 노래가 되었고, 최순애는 이원수를 그리워하며 오빠생각 노래를 부르곤 했다고 합니다. 

사진: 노년의 이원수, 최순애 부부. 동요와 동시, 아동문학에 공헌하였다.(사진: 노년의 이원수, 최순애 부부. 동요와 동시, 아동문학에 공헌하였다. [오빠생각 가사, 동요의 탄생] / ⓒ urisuwon.com)


마침내, 징역 10개월을 지내고 출소한 후 이원수와 최순애는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과수원집의 유복한 최순애에 비해서 너무도 가난한 이원수의 집안 형편 때문에 반대가 심했다고 합니다. 

어찌어찌하여 최순애의 집에서 결혼을 한 후 최순애는 이원수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이원수의 집은 찢어지게 가난해서 살림살이도 거의 없는 집이었다고 합니다. 그 후에도 이원수는 돈을 거의 못 벌어서 가난하게 살아야 했습니다. 

사진: 결혼식 직후 수원에서 찍은 최순애와 이원수 부부, 외가의 가족사진.(사진: 결혼식 직후 수원에서 찍은 최순애와 이원수 부부, 외가의 가족사진. [오빠생각 가사, 동요의 탄생] / ⓒ urisuwon)


비록 이원수가 1940년대부터 갑자기 친일자로 변절했고, 황국신민으로서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자는 글을 쓰는 등의 행위로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지만, <고향의 봄>, <겨울나무>, <엄마 없는 날>, <꼬마 옥이> 등을 발표하며 한국 아동문학에서는 큰 업적을 남긴 것은 맞는 일입니다. 

오빠생각 동요로 유명해진 최순애는 문학 활동을 접고 2남 2녀를 키우는데 주력했고, 책을 내려고 준비했던 시들이 6.25 전쟁으로 모두 불타면서 그 후의 작품은 크게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사진: 오빠생각 동요에 나오는 뜸부기의 모습. 오빠생각 노래는 국민동요가 되었다.(사진: 오빠생각 동요에 나오는 뜸부기의 모습. 오빠생각 노래는 국민동요가 되었다. [오빠생각 가사, 동요의 탄생] / ⓒ orientalbirdimages.org)


오빠생각 가사가 국민에게 주었던 서정성은 단순한 동요가 아니라 서글프면서도 한 서린 감성이었습니다. 작곡가 박태준은 잡지 어린이를 보던 중 이 시를 발견하고 바로 오빠생각 노래를 만들었다고 전해집니다. 

거기에는 당시 문예교사였던 박태준이 정식 작곡을 제대로 할 줄도 모르던 때에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는 최순애에게 감동하여 만들었다는 사연도 있습니다. 작곡가 박태준은 특히 마지막 부분을 작곡할 때 흐르는 눈물이 오선지를 흥건히 적셨었다고 회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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