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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한 지식 칼럼/역사&사건

파비아 전투 - 파비아성 전투와 기병, 파이크 앤 샷 전술 역사

2025. 3. 27.

파비아 전투

기병, 파이크 앤 샷 전술 역사


파비아 전투 - 파비아성 전투와 기병, 파이크 앤 샷 전술 역사
파비아 전투 - 파비아성 전투와 기병, 파이크 앤 샷 전술 역사 ⓒ Rupert Heller


 

1525년은 서양에서, 1575년은 동양에서, 기마병의 전술이 무너지고 보병과 화승총의 위력이 병법에서 중요해 지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것은 파비아 전투와 나가시노 전투입니다. 이 기사에서는 그중에서 서양의 파비아 전투를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이 전투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이후의 전투 양상과 대립 방식에 큰 변화가 왔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국가가 대비하는 방식도 달라집니다. 그게 어떤 과정이었는지, 배경과 과정, 결말까지 자세히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려고 합니다. 16세기 유럽 최대의 맞대결인 Battle of Pavia의 분석을 이제 시작합니다.

 


 

파비아 전투 - 파비아성 전투와 기병, 파이크 앤 샷 전술 역사


 

파비아 전투의 역사적 배경

 

1525년 2월 24일, 이탈리아 북부 파비아(Pavia)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군대와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의 군대가 이탈리아 패권을 두고 전투를 벌였습니다. 서양 군사 전술은 이 전쟁 이전과 이후로 나뉠 정도로 큰 변화를 겪게 됩니다. 기사 계급은 몰락하고 보병의 중요성이 크게 올라가게 됩니다.

 

배경에는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제국의 유럽 패권 다툼이 있었습니다. 16세기 유럽의 균형이 깨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현재의 독일 지역을 중심으로 있던 신성 로마 제국에 카를 5세가 황제로 오르면서 세력 싸움이 시작됩니다. 더구나 그는 스페인까지 거머쥐면서,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됩니다.

 

그때 유럽에서 신성 로마 제국에 맞설 수 있는 나라는 프랑스뿐이었습니다. 여러 유럽 국가들은 신성 로마 제국에 지나치게 힘이 쏠리는 것을 두려워했고, 은근히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가 맞서 주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한편 이탈리아는 프랑스의 남쪽에 붙어 있어서, 신성 로마 제국과 스페인의 사이에 있기 때문에 충돌의 장소가 되고 말았습니다.

 

왼쪽 카를 5세, 오른쪽 프랑수아 1세 - 파비아 전투의 역사적 배경
왼쪽 카를 5세, 오른쪽 프랑수아 1세 - 파비아 전투의 역사적 배경 ⓒ Rupert Heller

 


 

파비아성 전투의 지리적 환경

 

당시 이탈리아는 수십 개의 나라로 쪼개져 있었습니다. 피렌체 공화국, 밀라노 공국, 베네치아 공화국, 나폴리 왕국, 교황령 등으로 쪼개져 있었는데, 대부분의 독립군은 이탈리아 북부에 있었습니다. 남부의 나폴리 지역은 프랑스의 지배에 놓였습니다. 이곳의 왕위 계승권에 프랑스가 간섭할 핑곗거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곧이어 프랑스는 북부의 밀라노 지역에도 욕심을 가졌습니다. 여기를 정복하면 이탈리아 전체를 틀어쥐게 됩니다. 1524년, 프랑수아 1세는 4만 명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직접 알프스를 넘어 밀라노로 진격했습니다. 밀라노를 장악한 프랑스군은 다음 목표로 파비아를 향해 진격했습니다.

 

그런데 프랑스 오른쪽의 신성 로마 제국과 왼쪽의 스페인을 가진 카를 5세는 프랑스를 포위하듯 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사이에 있는 이탈리아를 프랑스가 거머쥐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파비아 성을 지원했는데, 여기에 프랑스가 공격해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나 파비아 수비군의 저항이 강렬해서 프랑스군은 쉽게 점령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세력 구도와 전투 배경 - 파비아성 전투의 지리적 환경
세력 구도와 전투 배경 - 파비아성 전투의 지리적 환경 ⓒ Unknown, www.kiss7.kr 편집

 


 

프랑수아 1세와 카를 5세의 대결

 

프랑스군은 강력한 포병이 있었지만 공성전이 이어지면서 프랑스군의 피해만 커져갔습니다. 그러자 성을 포위하여 고립시킨 후 굶겨 죽이는 전략으로 전환했습니다. 그러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겸 스페인 국왕인 카를 5세는 파비아를 구원하기 위해 대규모 지원군을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스페인군, 독일 용병 등으로 구성된 지원군은 파비아 근처에 도착했습니다. 문제는 카를 5세의 군대가 파비아성 옆쪽으로 위치해서, 어떻게 보면 프랑스군의 측면을 향하고 있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 프랑스는 파비아성 포위를 하면서, 동시에 옆에서 치고 들어오는 신성 로마 제국의 군대를 막아야 하는 난관에 처하게 됩니다.

 

1525년 2월, 드디어 파비아 전투가 시작됩니다. 신성 로마 제국의 군대는 밤중에 프랑스군이 있는 북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포병이 파비아성을 포위한 프랑스군의 뒤쪽을 공격하면서, 오히려 자신의 막사에 불을 질러서 퇴각하는 척하며 프랑스군이 아무런 판단도 할 수 없도록 혼란을 주었습니다.

 

프랑수아 1세와 카를 5세의 대결 - 당시 충돌 지점
프랑수아 1세와 카를 5세의 대결 - 당시 충돌 지점 ⓒ Unknown, www.kiss7.kr 편집

 

 


 

프랑스 최강 기병 대 신성 로마 제국의 보병

 

파비아성 전투는 당시 유럽의 군사력을 대표하는 다양한 병력들이 격돌한 중요한 전투였습니다. 이때 프랑스군은 유럽에게 가장 강력한 중갑 기병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장다름(Gendarme)"이라고 불리는 이 기마병은 중갑으로 무장하고 돌격하는 전술에 특화되어 있었습니다.

 

기병대의 능력은 최상이었습니다. 전투가 시작되자 프랑수아 1세의 기병은 카를 5세의 기병을 흩뜨리며 압도했습니다. 하지만 숲으로 둘러싸인 지형적 특성과 황제군 보병의 효과적인 대응으로 인해 프랑스 기병대는 점차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이때 신성 로마 제국의 보병이 등장했습니다. 이들은 화승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기병은 탱크입니다. 기병의 돌격전순을 상대에게 큰 공포를 주었기에 나라마다 기병대 키우기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16세기가 되면서 달라졌습니다. 보병에게 화승총이라는 것이 생겼던 것입니다. 칼, 창, 활은 근접전에서만 성능이 나왔지만, 총은 기병이 달려오기 전에 그들을 쓰러트릴 수 있었습니다.

 

전투 상황도 - 프랑스 최강 기병 대 신성 로마 제국의 보병
전투 상황도 - 프랑스 최강 기병 대 신성 로마 제국의 보병 ⓒ Unknown, www.kiss7.kr 편집

 


 

Pike and shot 파이크 앤 샷 전술

 

프랑스군은 최강의 기병 외에도 용병 중 최강이라는 스위스 용병대, 53문에 달하는 강력한 포병대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양쪽 군대가 섞여서 싸우는 전투 중에는 포를 쏠 수가 없었습니다. 같은 편도 죽기 때문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기병과 보병입니다. 하지만 카를 5세는 이것을 보병으로 막아냅니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파이크 앤 샷 전술이고, 이것이 가능하게 만든 것이 테르시오 전투대형입니다. 한자로는 창총진 방진이라고도 합니다. 기병이 달려오는 동안 화승총 보병이 총을 쏴대고, 가까이 오면 매우 긴 창을 가진 장창병이 말의 접근을 막고, 상대 기병과 보병이 허둥대는 동안 다시 화승총 보병이 나타나서 총을 쏴댔습니다.

 

당시 화승총은 한 번 쏘는 데애 몇 분씩 걸렸습니다. 그런데 스페인군 아르케부스 총병 3천 명은 3열 횡대로 배치되어 각 열이 번갈아 가며 사격해서, 마치 연속으로 쏘는 것 같은 효과를 만들어냈습니다. 파이크 앤 샷 전술은 상대 병력이 정신차릴 틈을 주지 않고 계속적인 공격을 해서, 그 뒤로 추가 기습까지 가능해진 것입니다.

 

Pike and shot 파이크 앤 샷 전술 - 기병을 무너트린 장창병과 화승총 조합 전투
Pike and shot 파이크 앤 샷 전술 - 기병을 무너트린 장창병과 화승총 조합 전투 ⓒ Royal Armouries

 

 


 

파비아 전투의 역사적 영향

 

한동안 유럽은 기병이 최고였습니다. 그래서 기사계급이 크게 늘어나고 권한도 커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파비아성 전투 이후 기병의 활용성에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중세 시대 전투력의 핵심이었던 기사 계급의 몰락이 오는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습니다. 화승총과 보병 방진이 과거의 전술을 이겨낸다는 것을 입증한 기념적 전투입니다.

 

파이크 앤 샷 테르시오 병사 구성 - 파비아 전투의 역사적 영향
파이크 앤 샷 테르시오 병사 구성 - 파비아 전투의 역사적 영향 ⓒ Unknown

 

이후 유럽 각국의 군대는 보병과 화약 무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군사 전략을 변화시켜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무적으로 칭송받던 스위스 용병대의 명성 또한 이 전투를 계기로 크게 추락했습니다. 봉건 제도의 상징이었던 기사 계급의 퇴조는 중앙 집권적인 군사력의 강화로 바뀌는 결정적인 역사 흐름을 보이게 됩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겸 스페인 국왕인 카를 5세에게 압도적으로 패한 프랑스의 국왕 프랑수아 1세는 파비아 전투에서 포로로 잡히는 치욕를 겪으며 유럽 내 영향력이 급히 꺾였습니다. 마침내 프랑수아 1세는 압송 후 감금되었다가 굴욕적인 마드리드 조약을 맺고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은 강력한 1인자로 우뚝서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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