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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한 지식 칼럼/역사&사건

1976년 신안 보물선 사건 - 700년 전 신안선의 신안 해저 유물

2024. 12. 29.

신안 보물선 사건

1976년 신안선 해저 유물


1976년 신안 보물선 사건 - 700년 전 신안선의 신안 해저 유물
1976년 신안 보물선 사건 - 700년 전 신안선의 신안 해저 유물 ⓒ 국가유산채널


 

바다 속에서 700년 전 보물선이 발견되었습니다. 인양팀과 도굴꾼들 간의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습니다. 이것은 1976년에 있었던 신안 보물선 사건의 이야기입니다. 엄청난 가치가 있었던 이 발굴 작업에서 수중 고고학이라는 학문까지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14세기 무역선인 신안선 보물 인양작업을 통해서 고려청자와 동전 등이 쏟아져 나왔던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단순히 발견이 떼돈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역사까지 더듬으며 전말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1976년 신안 보물선 사건 - 700년 전 신안선의 신안 해저 유물


 

중국에서 일본으로 가다가 침몰?

 

1976년, 신안 해저 유물 매장 해역(전남 신안군 증도면)에서 14세기 원나라 무역선인 신안선이 발견되었습니다. 신안선에서 중국 도자기와 고려청자, 향신료 등이 발견되었는데, 일본으로 향하다가 침몰한 것으로 추정됐습니다. 엄청난 가치를 가진 이 보물들은 9년간 총 11차에 걸친 수중 발굴을 통해 건져올렸습니다.

 

보물선 사건의 시작은 1975년이었습니다. 어부가 고기를 잡다가 그물에 도자기 여섯 점이 걸려 올라온 것을 신고한 것입니다. 한국은 수중 발굴을 해 본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이 사건은 한국 수중고고학의 시작이 됩니다. 그 과정에서 목선 일부가 발견되면서 보물선이었다는 것이 점점 확실해졌습니다. 

 

문제는 서해가 탁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조수간만의 차가 심했다는 것입니다. 잠수사들 뿐만 아니라 대형 군함까지 동원해서 발굴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엄청난 보물이 나올 것이라는 보도에 전 국민의 관심도 모아졌습니다. 더불어서 대체 왜 이 보물들이 서해 바다 깊이 있었을까 하는 수중 고고학의 연구도 시작되었습니다.

 

700년 전 신안선의 신안 해저 유물
700년 전 신안선의 신안 해저 유물 ⓒ treasure Namdo

 


 

700년 전 신안선의 신안 해저 유물

 

신안선은 14세기 동아시아 해상무역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유물이었습니다. 배의 크기는 최대 길이 34m, 폭 11m, 중량 200톤에 달하는 대형 목선으로, 700년 전 동아시아 무역선박의 규모를 짐작하게 합니다. 신안선은 중국 원나라 시대의 무역선으로, 중국 저장성 닝보에서 출발하여 일본 후쿠오카현 하카타 항으로 향하던 중이었던 것으로 보였습니다.

 

배에는 일본 상류층 귀족들이 사들인 차, 꽃꽂이, 향 피우기용 도자기, 그리고 향로, 금속 공예품 등이 실려 있었습니다. 도자기가 60%는 중국 저장성에서 생산된 것이었고, 고려청자는 중국으로 수출되었다가 일본인들이 다시 사들인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 이에도 동전 28톤, 자단목 1,000여 개, 각종 약재와 향신료 등이 있었습니다.

 

1984년까지의 도굴에서 총 2만 2천여 점의 유물이 발견되었습니다. 특히 발견된 목간은 배의 출발 시기와 목적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가 되었습니다. 배 바닥에 깔린 자단목과 동전은 선박의 무게중심을 잡는 역할을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1976 신안 보물선 사건

 

침몰 원인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1323년경 태풍과 같은 기상 재해를 만나 침몰한 것으로 추정될 뿐입니다. 하지만 많은 역사를 알게 해 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습니다. 특히 무게 약 28톤에 달하는 800만 개의 동전과 7점의 고려 청자의 의미가 중요했습니다. 

 

이 동전들은 서기 1세기 중국 신나라 때 발행된 화천부터 1310년 원나라 발행 지대통보까지 총 66건 299종이 있었습니다. 일본에서 화폐로 사용하기 위해 중국 동전을 대량으로 수입했던 것으로 보였습니다. 기술이 모자랐던 일본은 동전 사용 이외에도 녹여서 종을 만드는 등의 금속 원자재로도 활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중국 도자기가 절대적으로 많은 가운데, 고려청자는 단 7점만 실려 있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무역에서 고려청자가 중요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점입니다. 고려청자들은 접시, 그릇, 술병 등의 모양으로 제작된 것들이었습니다. 14세기에 항저우 일대를 방문한 일본인들이 다시 사들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예상 경로 - 1976 신안 보물선 사건
당시 예상 경로 - 1976 신안 보물선 사건 ⓒ MBC

 


 

한국 수중 고고학의 발전

 

하지만 보물 소문이 나자 벌레같은 도굴꾼들도 몰려 들었습니다. 약 20년 사이, 도굴꾼들이 집단으로 유물들을 훔쳐갔습니다. 동해보다 깊이가 얕아서 평균 수심이 20m 조금 넘는 정도였기에 벌어지는 일이었습니다. 여기저기로 팔려가는 유물이 알려지면서 뒤늦게 정신차린 정부가 적극적으로 회수를 위해 노렸습니다. 

 

정부는 대부분의 유물을 되찾고 전시하기로 했습니다. 1994년, 문화재청은 목포에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를 만들고, 그 외에도 여러 국립박물관과 문화재청 산하 기관에도 나누어 소장했습니다. 90%는 수장고에 보관되어 공개하지 않았지만 명품 위주로 5% 가량의 1,000여 점만이 전시되었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그 후 2016년, 신안선 발굴 40주년을 맞아서 미공개였던 유물들도 최초로 공개했습니다. 2023년에는 신안선 발굴 50주년으로 국립광주박물관에서 아시아도자문화실을 운영하기 시작했습니다. 700년의 보물을 인양한 것만 의의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문화재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고 관리와 연구하는 학술에도 많은 발전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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