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와 가야
역사와 유래, 기마민족
부여는 만주에 있던 나라입니다. 가야는 경상남도에 있던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 두 나라가 사실은 같은 민족으로 구성된 나라였을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중국 라마동 유적과 김해 대성동 고분 유적에서 나온 연구입니다.
우선 부여의 역사와 가야의 역사가 어떻게 흐름을 갖는지를 설명하고, 그 배경과 과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기원전 4세기(B.C. 400~300)부터 기원후 5세기(A.C. 400)까지의 문명 이동의 대역사를 따라가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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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의 역사와 가야의 역사 - 유래와 북방 기마민족 연관성
예맥족인 부여의 시작
부여(기원전 4세기~ 서기 494년)는 현재의 중국 지린시 부근 송화강 유역에서 성장한 나라로, 700여 년 동안 강력한 힘을 유지하며 번영을 누렸습니다. 이곳은 지금은 만주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그러나 이때의 이곳은 중국 땅이 아니었습니다. 강력한 고조선과 부여가 존재했기 때문에 한족은 접근도 못 하는 곳이었습니다.
기원전 3세기경, 부여는 남쪽으로 이동하며 세력 확장을 시작했습니다. 음산 산맥(위치. 만리장성 지역)을 넘어 진출한 부여는 주변 나라들을 통합하며 점차 강력해졌고, 양 지역까지 진출하며 중원을 위협하는 존재로 성장했습니다. 1세기에 이르러서는 이미 중국에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될 정도였습니다.
2~3세기에는 동북 평원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동북아시아의 강대국으로 군림하게 됩니다. 이때 고조선은 쇠퇴기에 이르러서 점점 작아졌습니다. 중국 연나라 등의 공격이 계속되는 가운데, 부여가 오히려 영토를 넓히며 강력한 나라로 우뚝 서게 됩니다. 기원전 108년 고조선이 멸망한 뒤에도 부여는 계속되었습니다.
부여의 역사
부여는 고구려와 백제의 뿌리가 되는 나라로, 고구려의 시조 주몽은 부여에서 탈출하여 고구려를 건국했습니다. 금와왕의 친아들이 아니었기에 왕위 계승에서 밀려서 위기에 처하자 남쪽으로 탈출하여 고구려를 세운 동명성왕이 바로 주몽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정치는 부여와 매우 비슷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백제 역시 자신들의 뿌리를 부여에 두고 스스로를 '남부여'라고 칭하기도 했습니다. 백제를 세운 온조왕은 동명성왕의 아들입니다. 동명성왕의 전처 아들 유리왕이 왕이 되자, 후처인 소서노의 아들 온조는 남으로 내려와서 백제를 세웠습니다. 이처럼 부여는 다른 여러 세력들에게도 영향을 미치며 동북아시아 역사에 큰 영향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3세기 말부터 부여의 힘은 점차 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4세기 초에는 선비족의 나라인 전연과 고구려의 견제를 받으며 쇠퇴하기 시작했고, 346년 선비족의 침략으로 멸망을 맞이했습니다. 당시 선비족은 부여를 공격하여 5만여 명의 포로를 끌고 갔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김해 대성동 고분
부여가 선비족에게 멸망했다고 해서 중국 민족이 승리한 것이 아닙니다. 부여를 공격한 선비족이 세운 나라는 중국 동북쪽의 연나라였는데, 선비족의 뿌리는 고조선 문화권에서 나왔습니다. 인종적으로는 부여가 예족, 고구려가 맥족이며, 선비는 흉노에 더 가깝긴 하지만, 중국이 점령한 것이 아니라 같은 세력권 민족간의 다툼이었습니다.
선비족은 만주에서 3차례에 걸쳐 남하해서 중국 내부에 들어가서 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그런데 선비족 영역권에 있는 라마동이라는 곳의 유물이 특이합니다. 이곳에 있는 유물과 경남 김해 지역의 유물이 상당히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라마동의 위치는 요동과 요서의 중간쯤인데, 고구려의 땅을 선비족이 점령한 곳입니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부여 유물과 유사한 유물들이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 출토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근거로 일부 학자들은 전연의 침입을 피해 남쪽으로 도망친 부여인들이 가야 지역에 정착했고, 이들이 가야의 지배층이 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부여와 가야의 연관성
여기까지 역사의 흐름을 보자면, 고구려 북쪽의 부여를 예맥족의 일파인 선비족의 전연이 346년 공격했고, 부여 주민들을 잡아다가 라마동에서 살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라마동에 남은 유물을 보면 선비족과 부여족의 공통의 문화가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발견되는 부여족의 문화가 김해의 대성동에서 발견된다는 미스터리가 생깁니다.
라마동에서 발견되는 부여인의 무덤 형태는 관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땅을 판 후 나무로 벽을 만들고 그 위에 나무를 얹어서 방처럼 만드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이런 형태의 부여 고분이 김해 대성동 고분에서 그대로 발견됩니다. 그렇다면 김해의 가야국은 북방민족의 나라였다는 추정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남쪽에서 가야의 건국은 기원전 1세기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기 4세기쯤 북방에서 내려온 부여의 유민들이 가야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실제로도 가야의 전성기는 서기 400년 전후였습니다. 그러므로 가야는 약한 세력으로 신라에 흡수된 정도의 역사가 아니라, 북방 유민이 내려와서 만든 체제였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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