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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 (원본) / 열국(列國)의 쟁웅(爭雄)시대 - 제2장 - 1 "동부여(東扶餘)의 분립(分立)"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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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 (원본) / 열국(列國)의 쟁웅(爭雄)시대 - 제2장 - 1 "동부여(東扶餘)의 분립(分立)"

키스세븐지식 2023. 4. 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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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 (원본)

열국(列國)의 쟁웅(爭雄)시대 - 제2장 - 1 "동부여(東扶餘)의 분립(分立)"

 

단재 신채호 선생의 역사책 조선상고사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총 12권)

그러나 단순한 복사가 아니라, 중요 부분에 형광색을 하여 요약 파악에 쉽도록 도움이 첨부된 포스팅입니다. 

(참고: 《조선상고사》(저자 신채호)는 저작권 만료로 현재 CC0이 되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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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 (원본) / 열국(列國)의 쟁웅(爭雄)시대 - 제2장 - 1 "동부여(東扶餘)의 분립(分立)"

 

 

동부여(東扶餘)의 분립(分立)


1) 解夫婁(해부루)의 東遷(동천)과 解幕漱(해모수)의 일어남

북부여와 두 동부여와 고구려의 네 나라는 신조선의 판도 안에서 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신조선이 멸망하여 부여 왕조가 되고 부여가 다시 나누어져서 위의 세 나라가 되었는지, 부여는 곧 신조선의 별명이고 따로 부여라는 왕조가 없이 신조선으로 부터 위의 세 나라가 되었는지, 이는 상고할 길이 없거니와, 신조선이 흉노 모돈 ( 冒頓) 에게 패한 때가 기원전 200년 경이요, 동 ·북부여의 분립도 또한 기원전 200 년경 이니, 나중의 설이 혹 근사하지 않을까 한다.

전사 ( 前史 ) 에 동 ·북부여가 분립한 사실을 기록하여, “부여왕 해부루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산천에 다니며 기도하여 아들 낳기를 구하다가 곤연 ( 鯤淵 : 鏡泊湖 경박호 ) 에 이르러서는 왕이 탄 말이 큰 돌을 보고 눈물을 흘리므로 이를 괴이하게 여겨 그 돌을 뒤집으니 금빛 개구리 모양의 어린아이가 있는지라 왕이 말하기를, “이는 하늘이 주신 내 아들이다.” 하고 데려다 길러서 이름을 금와 ( 金蛙 ) 라 하고 태자로 삼았다. 그 뒤 얼마만에 상 ( 相 ) 아란불 ( 阿蘭弗 ) 이 왕에게, “요사이 하늘이 저에게 내려오셔서 말씀하시기를 이 땅에는 장차내 자손으로 하여금 나라를 세우게 하려고 하니, 너희들은 동해변의 가섭원 ( 迦葉原 ) 으로 가거라, 그 땅이 기름져 오곡이 잘 되느니라고 하더이다.” 하고 서울을 옮기기를 청하므로, 왕이 그의 말을 쫓아 가섭원으로 천도하여, 나라 이름을 동부여라 하고 고도 ( 故都 ) 에는 천제 ( 天帝 ) 의 아들 해모수 ( 解募漱 ) 가 오룡거 ( 五龍車 ) 를 타고, 종자 백여 명은 흰 고니〔白鳥〕를 타고 웅심산 ( 熊心山 , 일명 阿斯山 , 또 일명은 鹿山이니 지금 哈爾濱의 宗達山 ) 에 내려와서, 채운 ( 彩雲 ) 이 머리 위에 뜨고 음악이 구름 속에서 울리기를 10 여일 만에, 해모수가 산 아래로 내려와, 새깃의 관을 쓰고 용광 ( 龍光 ) 의 칼을 차고, 아침에는 정사 ( 政事 ) 를 듣고 저녁에는 하늘로 올라가므로 세상 사람들이 천제의 아들이라 일컬었다.”고 하였다.

어떤 이는, “기록이 너무 신화적이라 믿을 수 없다.”고 하지마는, 어느 나라이고 고대의 신화시대가 있어 후세 역사가들이 그 신화속에서 사실을 캐내게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말이 돌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하늘이 아란불에게 내려왔다. ' 해모수가 오룡거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왔다. '고 한 말들은 다 신화이지만, 해부루가 남의 집 사생 아인 금와를 주워다가 태자를 삼았음도 사실이요, 해부루가 아란불의 신화에 의하여 천도를 단행한 것도 사실이요, 해모수가 천제의 아들이라고 일컫고 고도 ( 故都 ) 에 웅거하였음도 사실이니, 통털어 말하면 우리 북부여의 분립은 역사상 빼지 못할 큰 사실이다.

다만 우리가 유감으로 생각하는 것은, 이것이 북부여인이나 동부여인이 부여의 계통을 서술하기 위하여 기록한 것이 아니라, 한갓 고구려인이 그 시조 추모왕 ( 鄒牟王 ) 의 내력을 설명하기 위하여 기록한 것이므로 겨우 해부루 ·해모수 두 대왕이 동 ·북부여로 분립한 약사를 말했을 뿐이고, 그 이전의 부여 해부루의 내력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 하였음이 그 하나요, 또한 그나마 고구려인이 기록한 원문이 아니라 신라 말엽의 한학자인 불교승이 개찬 ( 改撰 ) 한 것이므로, 신가를 고구려의 이두문대로 `상가 ( 相加 ) '라 쓰지 않고 한문의 뜻대로 상 ( 相 ) 이라 썼으며, `가시라'를 고구려 이두문대로 `갈사나 ( 曷思那 ) '라 쓰지 않고 불경 ( 佛經 ) 의 명사에 맞추어 가섭원 ( 加葉原 ) 이라 써서 본래의 문자가 아님이 그 둘이다.

당시의 제왕 ( 帝王 ) 은 제왕인 동시에 제사장 ( 祭司長 ) 이며, 당시의 장상 ( 將相 ) 은 장상인 동시에 무사 ( 巫師 ) 요, 복사 ( 卜師 ) 였으니, 해부루는 제사장 ---대단군의 직책을 세습한 사람이고 아란불은 강신술 ( 降神術 ) 을 가진 무사와 미래를 예언하는 복사의 직책을 겸한 상가 ( 相加 ) 였다. 대단군과 상가가 가장 높은 지위에 있지만, 신조선의 습관엔 내우외환 같은건 물론이요, 천재지변 같은 것도 그 허물이 대단군에게로 돌아간다 ( 삼국지에 홍수와 가뭄이 고르지 못하고 오곡이 잘 익지 아니하면 곧 그 허물이 왕에게로 돌아가서 왕을 바꿔야 한다고 하고, 혹은 마땅히 죽여야 한다 --水早不調 五穀不登 輒歸輒於 或 言當易 或言當殺 ) 고 하였다.

천시 ( 天時 ) 나 인사 (人事 ) 에 불행이 있으면 대단군을 대단군으로 인정치 않고 내쫓았는데, 이때가 흉노 모돈과 전쟁을 치른지 오래지 않았으니아마 패전의 부끄러움으로 말미암아 인민의 신망이 짧어져서 대단군의 지위를 보전할 수 없으므로 아란불과 모의해 갈사나 --지금의 훈춘 등지로 달아나서 새 나라를 세운 것이고, 해모수는 해부루 와 동족이며 고주몽 ( 高朱蒙 ) 의 아버지다. 삼국유사 왕력편 ( 王歷篇 ) 에 주몽을 단군의 아들이라 하였으니, 대개 해모수가 해부루의 동천 ( 東遷 ) 을 기회하여 하늘에서 내려온 대단군이라 스스로 일걷고 왕위를 도모한 것이고, 부여는 불 곧 도성 ( 都城 ) 혹은 도회를 일컬음이므로, 해부루가 동부여라 일컬으매, 해모수는 북부여라 일컬었을 것이니, 북부여라는 명칭이 역사에 빠졌으므로 최근 선유들이 두 가지를 구별 하기 위하여 비로소 왕 노릇한 부여를 북부여라 일컬었다.

 

 


2) 南北曷思·南北 沃沮의 두 東扶餘의 분립(남북갈사·남북옥저의 두 동부여의 분립)

 

해부루가 갈사나 --지금의 훈춘에 천도하여 동부여가 되었음을 앞서 말한 바와 같거니와, 갈사나란 무엇인가? 우리 옛말에 숲을 `갓' 혹은 `가시'라 하였는데, 고대에 지금의 함경도와 만주 길림의 동북부와 소련 연해주의 남쪽 끝에 나무가 울창하여 수천 리 끝이 없는 대삼림의 바다를 이루고 있어 이 지역을 `가시라'라 일컬었으니, `가시라'란 삼림국 ( 森林國 ) 이라는 뜻이다. `가시라'를 이두문으로 갈사국 ( 曷思國 ) ·가슬라 ( 加瑟羅 ) ·가서라 ( 迦西羅 ) ·아서량 ( 阿西良 ) 등 으로 적는데, 이는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와 지리지에 보인 것이고, 또 혹`가섭원기 ( 迦葉原記 ) '라고도 하였으니, 이는 대각국사 ( 大覺國師 ) 의 삼국사 ( 三國史 ) 에 보인 것이다.

지나사에서는 `가시라'를 `옥저 ( 沃沮 ) '라고 적었는데, 만주원류고 ( 滿洲源流考 ) 에 의하면 옥저는 `와지'의 번역이고, `와지'는 만주어의 숲이니, 예 ( 濊 ) 곧 읍루 ( 輯婁 ) 는 만주족의 선조요, 읍루가 당시 조선 열국 중 말〔言〕이 홀로 달라서 삼국지나 북사에 특기하였으니, 우리의 `가시라'를 예족 ( 濊族 ) 은 `와지'라 불렀으므로 지나인들은 예어를 번역하여 옥저라고 한 것이다. 두만강 이북을 북갈사 ( 北曷思 ) 라 일컫고, 이남을 남갈사 ( 南曷思 ) 라 일컬었는데, 북갈사는 곧 북옥저 ( 北沃沮 ) 요, 남갈사는 곧 남옥저 ( 南沃沮 ) 이니 지금의 함경도는 남옥저에 해당된다.

고사에 남·북옥저를 다 땅이 기름지고 아름답다고 하였으나, 지금의 함경도는 메마른 땅이니, 혹 옛날과 지금의 토질이 달랐던 것이 아닌가한다. 두 `가시라'의 인민들이 순박하고 부지런하여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고 여자가 다 아름다우므로, 부여나 고구려의 호민 ( 豪民 ) 들이 이를 착취하여 어물과 농산물을 천 리 먼 길에 갖다 바치게 하고, 아름다운 여자를 뽑아다가 비첩 ( 婢妾 ) 을 삼았다고 한다.

해부루가 북 ` 가시라' --지금의 훈춘으로 옮겨가 동부여가 되어, 아들 금와를 거쳐 손자 대소 ( 帶素 ) 에 이르러 대소가 고구려 대주류왕 ( 大朱留王 ) 에게 패하여 죽고, 아우 모갑 ( 某甲 ) 과 종제 ( 從弟 ) 모을 ( 某 乙 ) 이 나라를 다투어 모을은 구도 ( 舊都 ) 에 웅거하여 북갈사 ( 北曷思 ) 혹은 남동부여 ( 南東扶餘 ) 라 하였는데, 그 자세한 것은 다음 장에서 말하려니와 지금까지의 학자들이, a) 동부여가 나뉘어 북동 ·남동의 두 부여로 되었음을 모르고 한 개의 동부여만 기록하고, b) 옥저가 곧 갈사 ( 曷思 ) 임을 모르고 옥저 이외에서 갈사를 찾으려 하고, c)북동 ·남 동의 두 갈사가 곧 남 ·북의 두 갈사 ( 兩加瑟羅 ) 요, 남북의 두 갈사가 곧 남북의 두 옥저임을 모르고 부여 ·갈사 ·옥저를 각각 다른 세 지방으로 나누고, d) 강릉 ( 江陵 ) 을 `가시라' --기슬나 ( 加瑟那 ) 라 함을 신라 경덕왕이 북쪽 땅을 잃은 뒤에 옮겨 설치한 고적인 줄을 모르고 드디어 기슬나가 동부여의 옛 서울이라고 하였다 . 그래서 지리가 문란하고 사실이 흔란해져서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되었거니와, 이제 갈사 ( 曷思 ) ·가슬 ( 加瑟) ·가섭 ( 迦葉 ) 이 이두문으로 다 같이 `가시라'임 을 알고, 대소의 아우 모갑과 그 종제 모을이 나뉘어 있는 두 `가시라'의 위치를 찾아서 두 `가시라'가 곧 남·북 옥저임을 알고, 추모왕이 동부여에서 고구려로 올 때에 `남으로 달아났다 ( 南奔 ). '는 말과 , 주류왕 ( 朱留王 ) 이 고구려에서 동부여를 칠 때에, `북쪽을 쳤다 ( 北伐 ). '는 말로써 북 `가시라'의 위치를 알아서 위와 같이 정리하였다.

 

3)北扶餘의 문화

 

북부여의 역사는 오직 해모수가 도읍을 세운 사실 이외에는 겨우 북부여의 별명인 황룡국 ( 黃龍國 ) 이 고구려 유류왕 ( 備留王 ) 본기에 한번 보이고는 다시 북부여에 대한 말이 우리 조선인의 붓끝으로 전해진 것이 없고, 만일 전해진 것이 있다 하면 다 지나사에서 초록한 것이다. 북부여의 서울은 `아스라' --부사량 ( 扶斯樑 ) 이니, 곧 대단군 왕검의 삼경 ( 三京 )-- 세 왕검성의 하나요, 지금의 소련령 ( 領 ) 우수리[烏蘇里〕는 곧 `아스라'의 이름이 그대로 전해진 것이다. 그 본래의 땅은 지금의 합이빈이니, 망망한 수천 리의 평원으로 땅이 기름져서 오곡이 잘 되고, 종횡으로 굴곡 ( 屈曲 ) 한 송 ( 松 : 古名 아리라 ) 이 있어 교통의 편의를 주고, 인민이 부지런하고 굳세며, 대주 ( 大珠 ) ·적옥 ( 未玉 ) 의 채굴과 그림 비단과 수놓은 비단의 직포와 여우 ·삵·원숭이·담비 등의 가죽을 외국에 수출하며, 성곽 ·궁설의 건축과, 창고 저축의 많음이 다 옛 서울의 문명을 자랑했다. 왕검의 태자 부루가 하우에게 홍수 다스라는 법을 가르쳤다 운운하는 금간옥첩의 문자도 왕궁에 보관되어 있고, 신지 ( 神志 ) 라 일컫는 이두문의 역사류며, 풍월 ( 風月 ) 이라 일컫는 이두문의 시가집 ( 詩歌集 ) 도 대개 이 나라에 수집해 있었다.

해모수 이후에 북부여는 예와 선비를 정복하여 한때 강국으로 일컬어 지다가 뒤에 예와 선비가 반 ( 叛 ) 하여 고구려로 돌아가자, 국세가 마침내 쇠약해져서 조선 열국의 패권을 잃어버리기에 이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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